[이어산 칼럼](15)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칼럼](15)토요 詩 창작 강좌
  • 뉴스N제주
  • 승인 2018.12.14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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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시인. 평론가

■ 토요 시 창작 강좌>

□ 거짓 단식(斷食)과 거짓 시(詩)

이어산 시인.평론가
이어산 시인.평론가

우리나라에선 정국(政局)이 꼬이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 단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자주 있다.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군소정당의 대표 두 분이 단식 중이라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그 분들의 절박함을 이해하면서도 단식 7일째니 9일째니 하면서 중계하듯 보도를 하는 것을 보곤 잘못 된 용어선택을 넘은 거짓보도를 당장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거짓 보도라니?! 당신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항의한다면 증거를 대겠다. TV에 비춰지는 그 분들의 초인적인 건강 비결은 모르겠지만 일단 단식이란 ‘모든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그 분들이 음식은 먹지 않되 물은 마신다니 일단 금식(禁食) 일지는 몰라도 단식은 아니다. "지엽적인 단어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말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한다면 뭘 한참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특히 한 단어가 시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는 시를 아는 시인이라면 더욱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삶의 위기에서 단식과 금식기도를 몇 차례 경험해본 필자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들은 전문가의 조언에 따르면 정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단식으로 일주일을 넘기면 생명을 유지하기가 힘들게 된다는 것이다.

물만 마시는 금식이라고 할지라도 일주일을 넘기면 일어날 힘은 고사하고 말을 할 기운도 없어진다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며 필자도 경험 했다.

이런 사실은 의학적으로도 이미 실증된 바 있다. 보통체질인 사람이라면 금식을 일주일만 해 보라.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살이 빠진다.

유대민족을 멸망시키려는 바사국의 총리대신 하만의 흉계를 전해 듣고 부름을 받지 않으면 왕비라고 할지라도 왕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던 당시의 엄격한 법을 무릅쓰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을 한 후 왕 앞에 나아가 멸망 직전의 유대민족을 구해냈다는 '에스더書'의 기록에도 단식이 아니라 금식이다.

일주일을 넘게 단식을 했다는 사람들이 언론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씩씩하고 말도 잘하고 심지어는 피둥피둥한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들은 정말 초능력을 부여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거짓 단식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의사는 물론이고 언론인이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다 비겁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시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시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진실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의 덕목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사무사(思無邪/생각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 정신이다.

시는 시인이 오래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세상에 고백하는 이야기다. 그 고백이 독자에게 옮겨져서 시인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다. 그런데 시인이 자기가 쓴 시와 다른 삶이거나 거짓을 보고도 눈감는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는 것이 옳은 태도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철학자 데메트리오스(Demetrius)는 “시의 언어란 먹이를 덮치기 직전에 몸을 최대한 웅크린 야수와도 같다”고 했는데 토끼 한 마리를 잡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처럼 시의 언어란 이렇게 최대한 웅크렸다가 폭발적으로 펼쳐지는 진실한 힘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독자 한 사람은 고만고만한 시인 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요즘들어서는 더욱 확신이 간다. 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강좌는 시를 읽어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고 시를 제대로 알고 써보자는 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낭송 바람‘도 필자의 “생명 시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수준 높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낭송 시”와 구별 되야 한다며 홀대하기도 하지만 낭송이 되자 않는 시는 시의 본류에서 이탈한 것이라는 생각을 필자가 갖게되기 까지는 오랜시간을 헤매다 얻은 결론이다.
“서정으로 돌아가자”는 쪽에 필자가 서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란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주에 관한 멋진 논문을 쓰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는 비유다. 결은 약간 다르지만 "멋진 시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만의 일기다.

"시정신이 투철한 시인은 우리 가운데서 자라난 한 그루의 나무다. 그리고 그 나무의 모양이나 맺는 열매, 낙엽 까지도 제각각의 모양이 뚜렷한 개체다."
지금 시대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시를 써서 발표하는 시인보다 시를 올바르게 감상할 줄 아는 독자들이다.

시인은 많지만 독자가 적은 기현상을 바꾸어야 한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귀하게 여겨서 숲을 만들어 내는 산주(山主)처럼 시의 주인은 시인이 아니라 독자다. 시를 읽어주는 독자가 많은 나라는 독자가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키우는 것과 같다.

오늘은 접시와 인간을 동일체로 보고 파멸과 완성이라는 시인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시 한 편 소개하는 것으로 맺는다.

   矛盾(모순)의 흙

   -오세영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흙, 그릇

-이어산 <생명 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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