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칼럼](2)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칼럼](2)토요 詩 창작 강좌
  • 뉴스N제주
  • 승인 2018.09.14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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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詩 창작 강좌(2)

□오래 남을 시

이어산 시인/평론가
이어산 시인/평론가

시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좋은 사람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보편적 상식을 벗어나지 않은 선한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얻고자 하는 좋은 것들의 대부분은 대가없이 쉽게 얻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좋은 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시를 읽어내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는 시 공부에 얼마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필자는 시를 읽어낼 수 있는 시안(詩眼)을 갖기까지 먼저 제대로 된 독자가 되자는 운동이 바로 '생명 시 운동'의 바탕에 깔려있기도 하다.

시는 시인이 오래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세상에 고백하는 이야기다. 그 고백이 독자에게 옮겨져서 시인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다.

그런데 독자나 시인이 자기 수준에 맞는 시만 선호하면 그것이 나에게 위로를 줄지는 몰라도 나를 성장으로 이끌어 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독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시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더욱 분발하도록 하는 시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성장으로 이끌 시란 무엇인가? 그것의 난이도를 나누자면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있고 완성도로 구분하면 '잘 쓴 시'와 '못 쓴 시'가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쉽지만 잘 쓴 시>가 있고 <못 쓴 쉬운 시>, <어렵지만 잘 쓴 시>, <어렵고 못 쓴 시>가 있을 수 있다. 유명 비평가나 시인들 중에는 <어렵지만 잘 쓴 시>를 최고의 시로 꼽는 경우가 많다. 이런 흐름은 난해한 시가 시단에 범람하게 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나는 본다.

명시(名詩)로 기억되는 시는 독자의 학식이나 여러 층위의 사람들에 관계없이 오래도록 남아서 감동을 주는 시다. 윤동주나 백석의 시가 그렇고 ‘낙화’의 시인 이형기와 ‘농무’의 신경림, 한국 유일의 계관시인 ‘그대 있음에’의 김남조, 섬진강 시인 김용택, ‘웃기는 짬뽕’ 신미균 시인 등의 시가 그렇다.

이런 시들은 이십 대에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고 삼사십 대, 오십 대의 느낌이 다르며 다시 보아도 눈길이 가게 되는 시다.

결론적으로 우리를 성장으로 이끄는 시는 '어려운 시'가 아니라 '오래 남는 시'가 가장 높은 경지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가시
박성우

요건 찔레고 요건 아카시아야
잘 봐, 꽃은 예쁘지만 가시가 있지?
아빠 근데, 찔레랑 아카시아는
이름에도 가시가 있는 것 같아

위 시는 아이의 말을 그냥 올려놓은 듯 쉽다. 이 시의 말결에서 '가시'를 읽어 낸 아이의 느낌을 낚아 올린 박성우 시인이 언어를 대하는 자세와 꼼꼼한 눈길을 주목하기 바란다.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사말로도 상황과 떠오르는 이미지가 잘 맞도록 언어를 배치하는 작업이다.

사람을 설득하거나 시인이 생색을 내지도, 감탄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은 독자가 하도록 여백을 두는 것이다. 마치 엄청난 슬픔을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가 더 슬퍼지도록 하는 것과 같다.

갈 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우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속울음을 참아내며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싸움을 하고 있다. 나는 울지 않는다는 다짐으로 살아가면서도 등 기댈 벽조차 없는 팍팍한 현실에서 새어나오는 눈물을 갈대의 이미지와 잘 연결한 것이다.

시란 본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진 갈래다. 특히 삶을 위로하고 눈물 흘리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시인을 다른 사람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신경림 시인의 위 시는 해방 후의 혼란기에 쓴 시다. 그는 친구가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면서 자신도 조사를 받을 때 등을 돌린 문단에 대한 강한 불만으로 낙향하여 자신이 애지중지 간직하였던 시집과 책들을 몽땅 내다버린다. 그리고 절필을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73년이 되어서 시집 <농무>가 창작과비평사의 "창비시선" 1호로 발표되면서 한국문단에 재 등단했다.

시골에 묻혀 살아가려는 그를 시단으로 다시 이끈 이는 그의 시적 재능을 너무 아깝게 생각했던 김관식 시인에 의해서다. 그의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었더라면 한국시의 거목을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어산,<생명 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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