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詩란 인생의 오솔길 산책하는 것"
이어산 "詩란 인생의 오솔길 산책하는 것"
  • 현달환 기자
  • 승인 2019.01.25 22:29
  • 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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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21)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21)

□시의 확장성과 언어의 사냥꾼

이어산 시인. 평론가
이어산 시인. 평론가

시의 기본 틀은 A는B라는 은유다. 그러나 B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C도 되고 D도 되며 A라는 대상은 여러 형태로 치환 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것임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A에 매몰되면 시는 A의 설명문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새로운 언어의 사냥꾼이다. 좋은 시인이 되는 일은 남이 사냥하지 못한 언어(뜻)를 사냥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A를 은유하는 B나 C, D, E, F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무한 연쇄반응이다.

끝없이 새로운 의미를 담아 내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작은 주체들의 노래이거나 웅얼거림, 또는 고백이다. 거대 담론적인 시는 자칫 큰 조각상의 입에 감춰진 스피커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소리가 될 수 있다.

차라리 산들거리는 바람에 실려 있는 소리, 작은 새들의 지저귐, 사람살이의 희로애락의 발견이 시 정신에도 가깝다.

나무에 사과
매달려 있음이여 주렁주렁
뿌리의 입덧이 한참 심해
선혈을 흘리며
내가 아픈 것은
어머니도 나를 배고 저 하늘을 베어 먹은 탓일까
철조망 근처
과수원 길을 걷다
떨어진 한 알을 줍네
한 쪽이
물들어 있는

- 심종록, 「떨어진 사과」 전문

위 시는 시인의 아픈 몸에 빗댄 사과이야기다.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뿌리의 입덧’으로 보았고, 그 입덧이 심해서 선혈을 흘리고 있다고 치환 하면서 “어머니도 나를 배고 저 하늘을 베어 먹은 탓일까?”라고 했는데 아픔은 어머니의 삶과도 연관 시킨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할 지점은 ‘철조망 근처/과수원길 걷다/떨어진 사과 한 알을 줍네“라는 표현이다.

이 부분은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더 큰 의미의 확장성을 가진다. 왜 ’철조망‘이 나왔을까? 물론 과수원에 둘러쳐진 철조망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상징은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연은 더 의미심장하다. “한 쪽이/물들어 있는”이다.

이렇게 사과 A는 B가 되었고 C인줄 알았는데 D로도 의미 변환이 일어났다.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는데 이중플레이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이 제대로 어우러지게 하란 말이다. 개성 있는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의 산책을 많이 해본 사람이 제대로 쓸 수 있다.

산책이란 천천히 주변의 풍광과 자신의 호흡을 맞춰가며 음미하면서 걷는 것이다. 음미한다는 말은 즐긴다는 말과도 같다. 소설을 읽는 일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일이라면 시는 호젓한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소믈리에처럼 그것을 음미하며 즐기는 일이다.

위 심종록 시인의 시도 천천히 걸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시다. 인생의 길을 바쁘게 걷거나 뛰어다녔던 사람도 길을 천천히 걸어볼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누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살아가는 형편과 관계없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시를 쓰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라. 한가하거나 시간이 남아서 시를 쓴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쁜 삶의 현장에서도 짬을 내어 글 한 줄 쓰고 시 한 편 읽는 것이 바로 인생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게 되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 시란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온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고 살아온 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시는 읽은 양이 아무리 많아도 그 시 속으로 산책하지 않았다면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다. 제대로 산책을 해본 사람은 그 길을 잘 안다. 그리고 그 길엔 무엇이 있으며 새가 지저귀는지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시의 오솔길을 제대로 산책해본 사람(제대로 된 독자)이 쓸 수 있다. 그것은 독서의 양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가 쓴 시의 양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밀도와 질로 승부한다.

이 말은 짧거나 긴 시에 관계없이 언어를 얼마만큼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내용의 어떤 고리로 나와 연결된 시를 쓰느냐가 감동이 있는 좋은 시가 되게 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있다.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이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자 소설의 주인공처럼 권총자살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데서 시작 되었는데 주로 유명인이 자살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비슷한 형태의 자살이 늘어난다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괴테를 향한 비난이 늘어나자 “산업화로 인한 수천 명의 희생자가 생기는데 그 중 몇몇을 베르테르에게 허용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필자는 우리의 시 중에서 ‘베르테르 효과’ 같은 것을 낼 수 있을만큼 큰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시가 출현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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