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칼럼](16)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칼럼](16)토요 詩 창작 강좌
  • 뉴스N제주
  • 승인 2018.12.2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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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시인. 평론가
"진술을 넣은 시가 시로서 생명력 갖게 돼"
이어산 시인.평론가
이어산 시인.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

□시의 완성과 애매성

 작곡을 하는 사람에게 기막힌 선율이 떠올라도 그것을 악보에 옮겨서 연주를 하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없거니와 음악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음악이라고 우겨서 연주하면 되겠는가? 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시상이 떠올라도 제자리에 맞는 언어로 표현되어야하고 그것을 시로 읽어주는 독자가 있어야 비로소 시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시로 승화되지 못한 것을 시라고 내어 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시의 완성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시의 완성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가 읽을 맛이 나는 시다. 이것은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언어예술인 시가 독자로부터 인정을 받기위해서는 우선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든지 뭔가 끌리는 것이 있게 해야 된다.

우리가 미인을 볼 때 한 눈에 알아보는 것이지 부분 부분을 나눠서 미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시는 이해를 다 하질 못해도 시의 깊이나 그 꼴이 시로서의 흡인력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라도 꼴이 제대로 갖추어진 시는 읽을수록 맛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시의 꼴을 제대로 갖춘 시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시적 대상의 외면풍경과 내면풍경이 제대로 조합된 시를 말한다.

외면풍경이란 시인이 체험했거나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내면풍경이란 시적대상에 부여되는 새로운 의미나 정서적 상상력을 통한 시인의 마음이나 정신이 담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 매번 말하는 '사물의 묘사(외면풍경)+진술(시인의 생각넣기)'다.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세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 함민복, <소스라치다> 전문

말하자면 위 시의 첫 연은 묘사이고 둘째 연은 진술이며 셋째 연은 철학적 관조다. 사람보다 더 놀랐을 뱀이나 지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 입장을 심안(心眼)으로 해석한 시다.

시는 정보전달의 목적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세워진 언어의 건축물이다. 그런데 이 언어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재료를 멀리에서 찾으려고 하면 시 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시적인 순간은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일상에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에 많은 시가 숨어있다.

평소에 보이지 않는 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힘들어도 주변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말을 걸어야 한다. 시적 대상이 여기저기에서 응답을 할 것이다.

또 하나, 우리의 시가 진실하게 독자에게 다가 갈 수 있도록 하려면 남에게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이야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체면을 던지고 나를 가리고 있던 가식을 던져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진실이 오롯이 드러나는 시를 쓸 수 있다.

이것은 시 쓰기의 본질적 방향이며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이나 독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긍정적인 힘이 되는 시작법(詩作法)이기도 하다. 이 작법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약간 겸연쩍한 내용이나 많이 부끄러웠던 일들도 시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 같은 것이고 아래 시처럼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좀 어때?”
   “응, 괜찮어.”
   그랬더니 존댓말을 한다. 그래서 나도 존댓말을 했다.
   “내일 또 오십시오.”
   “그러지요.”

      - 김영승, <권태 72> 전문

위 시는 사회지도층의 권의의식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시다. 우리가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 의사를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려고 하지만 자칫 방심하면 잘못 말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설화(舌禍)를 겪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시는 왜 비논리적이고 애매하게 쓸까? 단적으로 말해서 시란 인생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생사에는 정답이 없잖은가? 시도 그렇다. 각자 느끼는 감성과 서정은 주관적인 것이기에 객관적인 정답이 없다.

시에서 '애매성'을 빼버리면 산문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애매성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불분명한 글을 시라고 발표하는 경우를 본다. 이렇게 되면 시인의 역량이 모자라서 얼버무린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현대시는 애매성을 무기로 난해한 시를 쏟아내는 시인들이 넘쳐나서 독자가 시에서 멀어지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 애매하다는 말은 부정확 하거나 해독 불가능한 난해한 글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다의적(多意的) 의미가 내재(內在)된 상태를 말한다. 엠프슨(W. Empson)은 애매성을 "뜻 겹침"이라고 말했다. 문학용어로 중층묘사라고도 한다. 현대시단은 대체로 애매성을 적극 옹호한다.

"시의 미감(美感)은 애매성이 클수록 풍부해 진다"고도 한다. 필자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입장이지만 애매성과 난해성은 구분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시는 시적 대상(사물)을 빌려서 우리의 인생사를 애매하게 말하는 문학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생사가 내포되지 않은 시는 사물의 서술이나 묘사(스케치)에 그치기 쉽다.

여기에 더하여 직설적이지 않되 사람살이의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진술을 넣은 시가 시로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를 다시 한 번 강조 한다.
http://www.newsn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5671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시공부 문의 : (064)90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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