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신춘문예, 당선 초점 맞춘 난해한 형태 비슷한 시들 난무"
이어산 "신춘문예, 당선 초점 맞춘 난해한 형태 비슷한 시들 난무"
  • 현달환 기자
  • 승인 2019.01.04 21:15
  • 댓글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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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18)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

▲"경고!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다가 화병이 날 수도 있음"

이어산 시인. 평론가
이어산 시인. 평론가

올해 각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새해 벽두에 발표됐다.
당선작을 최종 선정한 심사위원 중에는 필자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는 분들도 있지만 욕먹을 각오로 이 글을 쓴다.

여러분은 이 글을 다 읽어도 좋지만 읽다가 화병에 걸릴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서 읽되 읽기를 중단해도 된다.

한국의 시가 마침내 망하게 된다면 작품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필자가 무식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시들이 무슨 특색이 있으며 무슨 감동을 독자에게 주는가?

매년 이렇게 많은 당선자를 내고 있지만 독자들 중 그들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은 시가 과연 얼마나 될까? 30년을 넘게 시를 써온 필자는 몇 개 작품을 빼고는 모두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어떨 땐 난해하거나 헷갈리는 시와, 시가 추구하는 애매성의 미학을 혼돈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물론 작품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거다”고 무릎을 칠만한 작품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당선자의 상당수는 문창과 출신이거나 재학생이다. 시가 추구하는 사람살이의 희노애락과 인생의 깊은 맛이 우러나는 시를 바라는 것은 무망한 일인가? 시인다운 시인과 시 기술자 중 누구를 뽑는 것이 진정으로 시의 발전을 위하는 일이란 말인가? 피카소의 작품이나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처음부터 이해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런 명작을 남기기 까지의 과정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그런 과정의 결과물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있었기에 명작이 된 것이다. 시도 그렇다. 이제는 시인으로 뽑아도 될만한 사람의 좀 알아보자.

신춘문예가 대학 수학능력 시험이 아니라면 그 시를 쓴 사람을 좀 살펴보면 안 된단 말인가? 시만 잘 쓰면 최고라는 그 아집들 때문에 시 잘 쓰는 싸이코패스가 나올 수도 있다. 신춘문예나 우리나라 문학상에서 시인의 됨됨이을 살펴보는 노력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당선에 초점을 맞춘 난해한 형태의 비슷한 시들이 난무한다.

제주의 4.3평화문학상도 작품성 위주로 뽑는다. 이렇게 되면 4.3은 들러리이고 이 사건을 각색하여 쓴 시 기술자들이 훨씬 유리하다. 그 사건을 직접 겪었던 당사자나 가족이 평생 겪어온 절절한 아픔을 쓴 작품이라면 그 작품성이라는 것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다른 누가 쓴 작품보다 4.3의 진실 규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4.3을 간접경험한 도민들을 배려하는 것도 4.3의 정신에 부합할 것이다. 필자는 작품상의 범위를 좁히자는 말이 아니다. 제주 밖의 응모자들도 4.3을 제대로 알고 진정성이 있는 좋은 작품을 내도록 이 상의 성격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가족이나 도민에게 우선 가산점이라도 주어서 작품성도 봐야 되겠지만 상징성에도 반드시 주목하여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국의 상금 킬러들 밥상이 될 수밖에 없다. 역대 수상작이 정말 4.3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생각하는가?

전국의 수많은 문학상 수상작을 보면 그 상의 본래 취지나 지역의 특색에 관계없이 작품이 비슷하다. 그리고 상금이 많이 걸린 문학상은 ‘알음알음 갈라먹기’라는 소문도 자자하다. 이런 현상은 심사위원 구성에서 이미 예견 된다.

상금이 많이 걸린 문학상일수록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는 유명시인들 위주로 최종 심사를 맡긴다. 우스운 일은 어느 유명한 시인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을 몇 개나 심사했다고 한다. 그러니 자기가 좋아하는 성향의 비슷한 작품을 뽑거나 개인적이 친소관계가 작용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문학상의 무용론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그리고 신춘문예도 문창과 출신이나 시 기술자들이 공감되지도 않는 말장난으로 당선되는 ‘헷갈리는 문예’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아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어보고 당선자들이 소위 한국시단의 중요세력으로 커 갈 것이라는 해당 언론사의 주장에 공감 되는지, 또는 우리 시단의 미래가 밝은 것인지 가늠해 보기를 바란다.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신의 당신
- 문혜연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 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봅니다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캉캉
- 최인호

발목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불란서 댄서들은 하이힐에 올라야 비로소
태어나지
발끝을 모으지
분란은 구두 속에도 있고
탁아소에도 있고 어쩌면
태리는 눈의 결정 속에서도 자라고

오후 세시에는 캉캉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려면 쓸데없는 말들이 필요해요
식탁 아래서 발을 흔들고
유쾌해졌지 아무 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래 휘파람 부는 것 같아서
뉴스를 튼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가십을 만들죠
상반신만 보이는 아나운서의 팔을 믿으며
캉캉은 감춰지는 중
양말 속에 주머니 속에
불란서 댄서들의 스포티한
팬티 속에
빨간 주름치마가 되어
덤블링이 되어
지구가 돌아간다

구세군 냄비에 눈이 쌓이고 내년에는
내년의 근심이 기다리겠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제왕절개 했습니다 답하겠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은 캉캉.
발끝을 들어 올릴 때마다
불거지는 중

▲1988년 서울 출생
▲강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

-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서울에서 살고 있음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중퇴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 노혜진

예순두 살에 뽀얀 속살입니다 시야각으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 벗고 만날 수 있고 온몸을 훑고도
괜찮아요 엄마는 때수건과 우유를 손에 들고 옵니다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두꺼운 발톱과 무좀을 병이라 부릅니다 탕의 수증기는 소리와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그 발
톱으로 네일 숍에 왔대” 동료들이 웃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엄마 얘기만 합니다 아빠 얘기만 하는 동료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없니?” 질
문은 되돌려집니다 알고도 모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동료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아차 하면서 재채기처럼 웃었습니다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만큼
웃음거리들이 쉽게 배어나오는 회사입니다 제가 오늘 재채기를 했던가요
바디 클렌저에서 수영장 냄새가 납니다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떠오릅니다 카
페 화장실 앞에서 스콘을 먹어야 했어요 열고 닫히는 문은 섬이었다가 여름이다가 코끼리였습
니다 삼십 분 동안 읽었는데요 시 한 편을 오래 보았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책을 동료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쓰는 몰입을 알 리 없어요 동료가 농담을 던
졌습니다 “등단을 못 하겠구나” 엉뚱한 발언을 잘 하는 저의 별명은 소설가입니다 “시를 씁니다”
말하지 않아요 동료들은 알고도 모르는 것일까요
“친구들은 어때요?” 하면 엄마가 떠오릅니다 저의 벗입니다 같은 원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 같
은 구두를 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서로에게 선물합니다 기억이 풍성해지면 쪼그라
드는 현재들 진짜 벗들은 기억의 원 안에 있어요
항공사가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엄마는 키위를 반으로 자릅니다 포도를 씻고 귤을 깝니다
키위의 씨만큼 늘어나는 의혹들 과일 열한 통을 들고 출근합니다 회사일까 집단일까 궁금합니다 급
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과일은 엄마에게 달아 두는 외상입니다
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
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
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 살에 꾸었던 꿈의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1977년 광주 출생
▲세종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졸업

▪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랜섬박스

-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1994년 충남 서산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

- 권영하

하늘 끝 마천루 정수리에
밧줄을 꽁꽁 묶었다
동아줄 토해내며 낙하하는 몸으로
건물의 창을 닦으며 절벽으로 내려간다
빌딩들 눈부시게 플래시를 터트려도
허공길 유리블록 사뿐히 밟으면서
수족관 물고기처럼
살랑살랑 물호수를 흔들며 헤엄친다
뙤약볕 빨아먹은 유리성이 열을 뿜고
빌딩허리를 돌아온 왜바람이
목숨줄을 무섭게 흔들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아이스링크에 정빙기같이
생채기를 지운다
유리벽에 갇힌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도 열어주고
유리창에 비치는 현수막의 사연도
살포시 보듬어 닦는다
의지할 곳도 없는 허공에서
작업복 물에 젖어 파스내음 진동하고
피로가 줄끝에서 경적처럼 돋아나지만
또다시 하늘에 밧줄을 묶는다
땀 흘린 줄길이만큼 도시는 맑아지고
유리벽에 그려진 풍경화도
끼끗해지니까

▲1965년생
▲경북 문경시 점촌중학교 교사.

▪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훈민정음 재개발지구

- 한경선

매물로 나온 낯선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푸른 종이 속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강남로에 집현전을 차려놓고
그 안에 가득 바람을 풀어놓았다

​이곳의 바람은
타워팰리스 하늘과 내통한 지 이미 오래다
집현전 내벽에 새롭게 나붙은 훈민정음을 보며
성층권에서 내려온 별똥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별똥들의 방언도 이곳에서는
종종 새로운 훈민정음으로 인정된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소문의 지도를 따라
북두칠성이 제 궤도를 돌 때
궤도를 벗어난 뭇별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각진 상자 한 귀퉁이에 지친 제 하루를 누인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상자 속의 상자
앰뷸런스 소리가 빈번한 이곳
곽에서 관으로 이동하는 길목에도 훈민정음이 있다
흐린 불빛을 달고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관은
언젠가는 땅속 깊이 스며들어 더 이상
길어 올릴 수 없는 검은 우물을 만질 것이다

노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이미 그 우물의 색깔을 알고 있다
종종 허름한 지하방으로 스며들던 그 우물의 예언을 사람들은 한때
언문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순식간에 곽이 관으로 변하는 것은 집현전의 소관이 아니다
ㄱ자로 꺾인 길을 돌아 ㄴ자로 통하는 길은

​강남로 후미진 골목 도처에 널려있다
나랏말싸미 세상인심과 달라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주위에 이상한 소문의 울타리를 친다
바람이 곽을 슬쩍 밀면 순식간에 관이 되는 이 새로운 골목에서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집현전 벽면에 새로운 훈민정음을 붙이고
네모난 상자곽 안의 잠을 사랑한 아버지는 오늘도
당신의 잠 속에 칠성판을 그려 넣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아버지에겐 종종 잠도 또 다른 언문이다

▲1959년 서울 출생.
▲동국대일산캠퍼스 평생교육원 시창작과정 수료.

▪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沼)

- 김윤진

고양이소에서 정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당신은 물웅덩이를 지켰다. 짙은 녹색의 고양이소처럼 당신의 집은 고양이의 눈처럼 깊고 고요하다.

가만히 있다가도 다이빙하거나 발을 헛디뎌서 누가 그 깊이를 만지면, 털을 바짝 세우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가릉, 하고 울어댔다. 몸을 으스스 떨며 건져 올린 신발의 개수를 일지에 적어 넣는 것이 여름 당번의 일. 개학 후 신발의 개수만큼 책상이 비고, 당신이 지키지 못한 동생들은 집을 떠나고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어 두근대는 소(沼)에서 산다. 꿈속에 당신의 아비는 칼을 들고 당신을 쫓아오고. 또 하나 당신의 아비는 발목이 부러진 당신을 부축하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은 당신 어깨를 감싸고, 파도가 되었다가 호수가 되었다가 그저 무지개 장화를 신은 아이들의 퐁당거리는 빗물이 되었다가, 당신마저 발을 담그면 세숫대야 물은 심층을 알 수 없었다.

▲1971년 제주 서귀포 출생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명옥헌 별자리

-최재영

원림에 드니 그늘까지 붉다

명옥헌*을 따라 운행하는 배롱나무는

별자리보다도 뜨거워

눈이 타들어가는 붉은 계절을 완성한다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 연못 속 꽃그늘

그 그늘 안에서는 무엇이든 옥구슬 소리로 흘러가고

어디선가 시작된 바람은 낮은 파문으로 돌아와

우주의 눈물로 화들짝 여울져 가는데,

기어이 후두둑 흐드러지는 자미성(紫微星)**

연못 속으로 어느 인연이 자맥질 해 들어왔나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젖히고

한여름 염천에 백리까지 향기를 몰아간다

그 지극함으로 꽃은 피고지는 것

제 그림자를 그윽히 들여다보며

아무도 본 적 없는 첫 개화의 우주에서

명옥헌 별자리들의 황홀한 궤도가 한창이다

한 생을 달려와 뜨겁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드디어 아무 망설임 없이 안과 밖을 당기니

활짝 열고 맞아들이는 견고한 합일의 연못

눈물겹게, 붉다

*명옥헌(鳴玉軒): 전남 당양군 소재. 조선중기 오이정이 세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소리 같다하여 명옥헌이라 함
**자미성(紫微星): 자미는 백일홍나무, 배롱나무라고도 하며 하늘의 은하수를 본따 명옥헌 연못 주위에 28그루의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함.

▪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박신우

별이 깃든 방, 연구진들이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별 가운데 가장 크기가 작은 별을 발견 했습니다 그 크기는 목성보다 작고 토성보다 약간 큰 정도로, 지구 열 개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라더군요 세상에 정말 작군요, 옥탑방에서 생각했어요 이런 작고 조밀한 별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말이죠 핵융합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표면은 극히 어둡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늘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이 별의 천장은 매우 낮습니다 산소가 희박하죠 멀리서보는 야경은 아름다울지 몰라요 어차피 낮에는 하늘로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먼지가 이만큼이나 모이니 질량에 대해 얘기할 수 있군요 그건 괜찮은 발견이에요
먼 곳에서 별에 대해 말하면 안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중력을 연구하지는 말아야죠 피아노 두드리듯 논문을 쏟아내지 말아요 차라리 눈물에 대해 써보는 게 어때요 별의 부피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레를 더듬는 일이죠 옥상난간을 서성거리는 멀미처럼 말이에요
여기 옥탑에서는 중력이 약해서 몸의 상당부분이 기체로 존재해요 그래요 모든 별들은 항상 지상으로 언제 떨어질지 숨을 뻗고 있는 거죠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명왕성 유일 전파사

-김향숙

모든 가전家電엔 명왕성冥王星 하나 두둥실 들어있다고 했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하는 것이 제명이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는 모르는 게 없다 이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 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공구들의 명칭마다엔 알파벳 하나씩 휘어지고 벗겨진 곳곳에 일본식 표현이 살짝 묻어있다

오일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배운 적 없는 어깨너머의 기술로 만지작거리면 고장 난 밥솥이 빨간 눈을 켜고, 커피포트 녹음기 선풍기와 마음 고장 심하게 난 이웃까지 불러 앉혀놓고 막걸리 한 잔 따라주면서 다독다독 고친다

십자와 일자, 플러스와 마이너스만 있으면 퇴출당한 명왕성도 거뜬히 고친다고 큰소리치는 명왕성 유일 전파사 그 사내

봄날이어서 수리 마친 가전들
저러다 파란 이파리들 막 돋아날까 걱정스러운데
고친 카세트 들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
흥겨운 듯 절절한 트로트가 그 뒤를 따라간다

★김향숙 씨 약력△1966년 경북 상주 출생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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