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2024-03-29 17:02 (금)
>
[이어산 칼럼](9)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칼럼](9)토요 詩 창작 강좌
  • 뉴스N제주
  • 승인 2018.11.03 05:48
  • 댓글 3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어산 시인/평론가

■ 토요 시 창작 강좌(9)

□시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이어산 시인. 평론가
이어산 시인/평론가

시는 문학 가운데서도 가장 엘리트 갈래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심오하고 얕은 것 같으면서도 깊고 넓고 어려운 것이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가 갖는 무게는 문학의 으뜸자리에 놓이는 것이다.

빨리 시인이 되려는 것은 바늘을 허리에 매어서 바느질 하려는 것과도 같다. 시인이 되는 길이 쉽지는 않지만 정도(正道)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일필휘지로 단숨에 쓴 시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성공한 시인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쓴 시가 좋은 시로 기억되는 것도 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다. 퇴고는 시를 단단하게 하는 지름길이며 시를 배우는 사람의 정도이고 의무다.

어느 날 지인이 시를 좀 봐 달라기에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퇴고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히 퇴고를 했다"는 대답이었다. 어떻게 퇴고를 했냐는 물음에 "시를 써놓고는 밤새도록 몇 번이나 고쳤다"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그게 바로 초고다"라고!

초고(草稿)란 초벌 원고, 즉 처음 쓴 시다. 밤새 쓴 글은 거의가 초고다. 밤을 새워서 썼던 작품이라도 다시 다음 밤을 새워가며 살펴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다시 고쳐서 완성한 것이 두 번째 퇴고작품이다.

그렇게 몇 번의 수정을 거친 후 “더 이상의 표현을 도무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 다시 자기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에게 보여 주어서 지적을 받아보고 한 번 더 살펴본 후 발표를 해도 전혀 늦지 않다.

시를 배울 때는 자기와 실력이 비슷하거나 시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작품을 봐 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 자세는 현시욕(現示慾)일 수 있다. 시 공부를 할 땐 위로 향한 퇴고를 해야 한다. 아래로 향한 퇴고는 오히려 시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이 꼭 버려야 할 것은 퇴고를 싫어하는 고집이다. 대부분의 유명 시인들은 한결 같이 퇴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신중하게 작품을 써라는 것이다.

고급작품은 이런 퇴고의 노력 끝에 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의 소설을 퇴고하면서 마침표 하나를 찍기 위해 보름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노인과 바다'라는 걸작이다.

   맑은 계곡으로 단풍이 진다
   온몸에 수천 개의 입술을 숨기고도
   사내 하나 유혹하지 못했을까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앉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 다방 늙은 여자
   볼 밑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부르다 만 슬픈 노래를 마저 부르려는 듯 그 여자
   반쯤 지워진 입술을 부르르 비튼다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
   지우다 만 입술을 계곡으로 떨군다

   - 박성우, <단풍> 전문

박성우 시인의 위 시는 열 번도 넘게 퇴고를 한 작품이라고 한다. 물질의 속성을 심화 확대시켜 소재론과 주제론이 살아 있다. 단풍을 “빨간 립스틱을 지우는 길손 다방 늙은 여자”로 의인화 시키면서 사물시의 전형을 보여 준다.

볼 밑으로 눈물이 흐르고 입술을 부르르 떨며 슬픔을 삼키는 여자, 그러면서 단풍이라는 사물의 묘사가 아니라 “세상이 서둘러 단풍들게 한 그 여자”라는 진술이 이 시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의 좁은 아파트 한 구석
   시든 꽃잎 하나 헉! 소리를 내며
   우글쭈글해진 모노륨 마루위에 눕는 소리 들린다

   ㅡ 땅에 내려가고 싶다

   누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한다

   ㅡ강은교, <꽃잎> 전문

위 작품도 묘사라는 껍질을 넘어서 속살을 보여 주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과즙 같은 시다. 현대시에서 거대담론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렇게 속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미시담론으로 섬세한 감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좋은 시가 탄생한다.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