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의 미감(美感)은 애매성이 클수록 풍부해진다"
이어산 "시의 미감(美感)은 애매성이 클수록 풍부해진다"
  • 현달환 기자
  • 승인 2019.02.08 22:56
  • 댓글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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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23)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 토요 시 창작 강좌(23)

□설명시와 설명문의 차이

이어산 시인. 평론가
이어산 시인. 평론가

그동안 필자는 “시에 대해 설명하는 순간 산문이 되기 쉽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독자 중에서 한 분이 이런 질문을 보내왔다. “분명히 설명시(說明詩)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명하는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은 시의 확장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렇다 ‘설명시(exposition poetry)’로 분류되는 시가 있다. 필자가 강조한 것은 “시적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서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뜻으로 이 시를 썼다”거나 “어떤 사건에 대한 발생원인과 경과를 시술하는” 방식이 설명문이다. 즉, 정보(지식)의 전달이 목적인 글을 말한다.

이에 반해 ‘설명시’는 문맥의 형식상 설명적인 틀만 빌어서 쓴 것이지만 ‘시적 정의(definition)’, 즉 시인의 진술이 들어가는 시를 말한다. 예를 들면 ‘고드름’이라는 시에서 고드름의 속성, 즉 성질이나 모양 등에 시인의 시적 관념이나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동반되어야 한다.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환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이 아끼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고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소리

   결국은 물이었다
   한잔 먹지 않겠는가

      - 박정원, 「고드름」 전문

위 시처럼 ‘설명시’는 하찮은 사물에도 ’시적묘사+의미부여’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시가 탄생한다. 그러므로 대상을 설명하는 것으로만 그치면 설명문이거나 산문이 되어버린다. 설명시라도 대상을 다 말하지는 않는다. 행간의 빈자리에는 독자들의 공간, 즉 생각할 여백을 둔다.

시는 조급해하면 할수록 잘 안 된다. 시는 뜸이 들어야 제대로 익는다. 초보자들이 시라고 내어놓는 글 중에는 설명문이나 묘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글이 많이 발견된다.

이는 마치 익지 않은 밥처럼 생쌀이 씹히는 듯한 글이다. 쌀을 불리고 적당히 물을 붓고 알맞은 크기의 솥에 넣고 불을 지펴서 뜸이 돌도록 해야 제대로 밥이 되듯 시도 시적 대상을 요리하는 방법과 형식을 익히지 않으면 시가 추구하는 의미를 살려내기가 힘들게 된다.

결국 시가 시다와지는 것은 또다시 '애매성'과 결부된다. 애매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시는 시적 대상(사물)을 빌려서 우리의 인생사를 애매하게 말하는 문학 양식'이라서 그렇다.

사람살이 자체가 애매한 것처럼 인생사가 내포되지 않은 시는 사물의 설명이나 묘사(스케치)에 그치기 쉽다. 그래서 직설적이지 않되 삶의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의 애매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인식을 갖기 바란다. 이것은 부정확하거나 해독 불가능한 난해한 글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다의적(多意的) 의미가 내재(內在)된 상태를 말한다.

엠프슨(W. Empson)은 애매성을 '뜻 겹침'이라고 말했다. '중층 묘사'라고도 한다. "시의 미감(美感)은 애매성이 클수록 풍부해진다"고도한다. 애매성과 난해성이 구분되어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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