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72)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제자 박규안
[장영주 칼럼](72)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제자 박규안
  • 뉴스N제주
  • 승인 2022.07.0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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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제주민속촌 추사전시관 포토 길 

□ 제자 박규안

○ 계첨 박규안(朴奎安)/장영주 작

조선 시대의 명필가라면 추사 김정희 선생을 꼽는다. 그의 문장 솜씨며, 글솜씨야말로 전대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문촌이라는 소식을 듣고 어느 마을(곽지리)에 들렸다.

이때 추사 선생이 박규안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두뇌가 영특함을 높이 평가하여 박규안을 수제자로 삼았다.

그때부터 박규안은 추사 선생과 같이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

“자네의 재능이야말로 으뜸이로세. 여기서 그냥 썩기는 아까우이. 그러니 나와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게나.”

추사 선생은 박규안의 재능을 너무 아까워한 나머지 한양에 갈 때 데리고 갔다.

박규안은 한양에서 밤낮으로 추사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과거 시험에 응시한 결과 장원 급제하였다.

이때 과거 시험장에서 시험관들은 모두 추사 선생이 쓴 글인 줄 알고 심사를 하는 데 시간이 걸릴 만큼 워낙 뛰어난 솜씨였다.

추사 선생이 썼는지 박규안이가 썼는지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딱 두 사람 추사 선생과 박규안이었다.

“체, 저런 촌놈에게 장원 자리를 내주었다니….”

한양의 선비들은 모두 박규안을 시기했다.

“저놈을 그냥 두었다가는 우리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니 저놈을 없애버리자.”

한양의 선비들은 무서운 계략을 세워 박규안을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추사 선생은 사흘 낮, 사흘 밤을 슬피 울다 박규안에게 친필로 명전에 ‘남극사인’이라 써서 유골과 함께 마을로 보냈다고 전해 온다.

(출처 장영주, 민족전래동화, 아동문예, 1991)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주) 위 설화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러 자료를 통해 필자가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를 통해 퍼즐을 맞춰보면 처음에 계참 박규안이 최근에 계첨 박규안 또는 박계찬으로 추사 김정희 제자로 전해오고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즉 박계찬이란 인물은 채록과정에서 박규안이 계첨이란 아호를 썼기에 그냥 성에 아호를 붙여 박계첨이라 할 것을 그냥 박계찬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되는바(박혜원이란 설도 있다)

여기서 계첨은 김정희의 아호를 뜻하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또한, 남극사인이란 남쪽(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 남극사인박계첨이라 써 준 글이 박계안 후손(증증손자) 박치순이 소장하고 있다는 설도 있는데 여기서 박치순은 혹 곽지 박치@ 또는 박기@의 선친이 아닌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는 필자가 곽지리 출신으로 어렸을 때 박치선 또는 박기정 댁에서 나온 붓글씨(박규안이 김정희와 함께 서체를 연구하던 때 연습 했던 글씨)가 있는 창오지(당시엔 화선지가 아닌 창호지에 붓글씨를 쓴 거로 전해온다)를 얻어다 정년(연의 종류)을 만들어 띄우며 연싸움을 하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추사 김정희의 글씨 병풍을 소유하고 있다는 동네 어른이 증언도 있다, 다만 박치순과 필자의 나이 차가 68세로 너무 간격이 큰 것은 사실이나 박치순이 필자 나이 20세에 사망했다는 정황에 비춰 본다면 그 집에 묻혀 있던 당시<궤짝 밑 바닥이라 들음>

박규안이 김정희와 함께 서체를 공부하던 창호지일 가능성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여겨진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8년 3월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면서(귀양 올 때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들어왔다는 서신내용, 화북에서 대정현까지 서쪽 한길(일주도로)을 통해 간 거로 추정되는바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귀향할 때도 왔던 길 즉 서쪽 한길을 통해 화북항이 아닌 조천항(당시 귀양이 풀렸기에 조천관에 머물렀을 수도 있음)으로 갔을 거란 추론을 해 보면 대정현에서 조천포구로 가는 도중 곽지현(제주도에 현이 고려 시대에 17군데 있었는데 곽지리가 행정의 중심지였던걸 생각해 내서, 곽지리에 문촌이란 소식을 듣고 중간에 휴식을 취할 양으로 곽지리에 머물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즉 대정현에 위리안치됐을 때 간간히 찾아와 글 공무를 하던 3 수제자 중 한 명이 박규안)이 문촌이라 알려졌기에 곽지리에 들려 박치@ 선생 또는 섯동네 박기@ 선생 댁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박규안을 제자로 삼아 소일하며 글공부를 마무리하다가 박규안을 한양에 데리고 가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게 하여 장원 급제하니 그곳 한양 선비들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해 그 시신을 곽지리 박치@ 또는 박기@ 댁에 보내며 ‘남극사인박계첨’이란 명전을 써서 동봉한 것으로 추정되는바 장영주, 애월읍 역사설화스토리텔링에는 어느 마을을 곽지리로 표시하는바 이에 따른 약간의 보충자료는 뉴제주일보에 기제 되었기에 그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필자는 설화 학자로 스토리텔링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혹여 역사성에 보탬과 수정이 있을 시 이는 사학자들이 근거를 제시하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김찬흡, 제주애월읍명감, 제주향토연구회, 2011. 12 쪽에도 추사 문하생 박계첨을 곽지리 저명인사로 분류해 놓고 있다. 필자는 이 연구회 이사로 참여했다. 141쪽에 나와 있는 자료를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박계첨 (1824-몰) 곽지, 서예가, 호는 자기, 일명 박규안, 본관은 밀양 박씨 규정공파 24세손 연안공계(곽지 박 칩), 곽지마을 ‘구린질-동네’에서 박수건朴秀建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즐겼다.

1840년 추사秋史 김정희가 9년 제주 유배 때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준급 서예가로 성취한 세 사람을 추사삼문秋史三門이라 한다. 첫째 박계첨(곽지)과 김구오金九五(제주성안)는 추사체를 완숙할 정도로 키우고, 강도순姜道淳(대정현)은 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

추사는 제주 성안에 김구오를 만나러 가다가 곽지마을에 들러 박계첨 댁에 며칠 머물고 갈 정도로 친숙하여, 전해지는 말이 많으며 이 마을에는 추사체의 글씨가 많이 남았던 것을 일본강점기에 일본인의 매우 좋아해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박계첨은 문과 급제한 장령 박수룡(1829-1861)의 조카이며 그 영향을 받아 대성한 것이다. 후손은 곽지마을에 없고 다만 장령의 증손 박경후朴京厚(1928-)는 4·3사건 직후 상가리에서 고내리로 옮겨 산다.<제주사 인명사전 >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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