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71)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제주추사관
[장영주 칼럼](71)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제주추사관
  • 뉴스N제주
  • 승인 2022.06.2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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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제주추사관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등록 : 1종 미술관(2010. 12. 27)
-규모 : 부지면적(1,618.00㎡), 건축연면적(1,193.90㎡)
-상설전시실, 체험실

제주추사관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 5월 건립되었다.

제주추사관의 전신은 1984년 제주지역 예술인들과 제주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추사유물전시관이다. 그러나 전시관이 낡은 데다, 2007년 10월 추사유배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그 격에 걸맞게 재건립되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새롭게 제주추사관을 완공하였다.

제주추사관은 추사기념 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부국문화재단, 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해 주신 ‘예산김정희종가유물일괄’ 추사 현판 글씨, 추사 편지 글씨, 추사 지인의 편지 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출처 홈페이지

대정현 남문지 못에는 추사 유배 시절 모습을 입석에 새겼다.

○ 소치 허련

조선 시대 왕 헌종이 소치가 추사의 유배지에서 추사 뒷바라지하고 있을 때 그(소치)(1808~1893)를 낙선재로 불렀다. 수치는 관복을 입고 입궁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손인 무명화가가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한다.

소치는 추사가 제주로 유배 가기 전 서울 집 사랑채에 기숙하며 시서화를 배우던 마지막 제자로 추사가 유배되고 몇 달 뒤 제주로 내려간다. 스승의 유배 뒷바라지를 위해 무려 세 번이나 거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자서전 소치 실록에 나온다. 갈 때마다 유배지에서 스승과 함께하며 몇 개월씩 머물렀다 한다.

야화 한마당

헌종, 그대가 세 번 제주에 들어갈 때 거친 풍랑 속으로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냐?

허련, 하늘과 맞닿은 큰바다에 거룻배를 이용해 왕래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운명에 맡겼습니다.

헌종, 현지에 당도해 스승을 만나니 소회가 어떠하더냐?

허련, 위리안치 중인 스승을 찾아가 먼저 절을 올리고 나니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사옵니다.

헌종은 제주 목사의 장계를 통해 보고를 받은 듯 소치의 제주 행적과 추사의 유배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추사는 8년 3개월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상경했다가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자 1852년 7월 다시 최북단 북청으로 유배를 떠난다.

○ 제주 추사 적거지

제주도 대정현성 동문 자리 안쪽에 자리 잡은 추사 적거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다.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으로, 조선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다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화북포구를 통해 유배되었다. 화북 민가에서 1박하고 제주성 아전 고한익 집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대정현 포졸 송계순 집에서 머물다가 강도순 집으로 위리안치된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김정희는 이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추사 적거지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에 남긴 유배 문학의 커다란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금석학과 유학, 서학의 의미는 역사적·학술적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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