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69)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추사 유적지
[장영주 칼럼](69)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추사 유적지
  • 뉴스N제주
  • 승인 2022.06.1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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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 추사 유적지

문화재 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제24호 면적 1만 8308㎡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이곳에는 김정희의 고택을 비롯하여 화순옹주(영조의 2녀)와 김한신 부부의 합장묘, 홍문, 김흥경(한신의 아버지)의 묘, 김정희의 묘, 화암사, 그리고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백송 등이 있다.

추사 선생 고택은 김정희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에 의하여 1750년(영조 20)경 건립되었다.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ㄱ자 모양의 사랑채와 후면에 口자 안채가 있고, 안채 뒤로는 높은 축대를 쌓고 사당을 배치해 두었다. 주변은 사방을 담으로 둘러 두었다.

고택에서 남쪽으로 약 100여m 떨어진 곳에 화순옹주 홍문이 동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홍문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하사한 열녀문이다. 정면 8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우측 어칸에 외문을 만들고, 이 문의 정면에 홍살을 세워 두었다.

화암사는 김정희가 불교에 심취하여 늘 다니면서 수도를 하던 곳으로, 조선 말에 중수한 적이 있다. 이 절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시경루(詩境樓)’ 등의 편액이 남아 있다.

백송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인데 김정희가 25세 때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종자를 붓 통에 담아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출처 『충남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85)

□ 추사 김정희 유배길/추사에게 길을 묻다

● 대정우물터(추사 최초 거주지) 가는 길 포토

송계순 집 대정현 포졸로 추사가 대정현에서 처음 머무른 집이다.

○ 추사 김정희 유배길

제주에서 8년가량 유배 생활을 한 김정희는 대정현 제주추사관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그렸다.

유배길은 추사 김정희가 화북포구를 통해 귀양 와 서쪽 한길을 통해(당시 아름다운 나무숲이 마음의 안식을 가져 왔다고 회술하고 있다) 대정현 현재 위치에 위리안치된다.

김정희 유배길은 대정현 강도순의 집 등 마을 길로 이어지는 집념의 길과 추사 선생이 썼던 시들을 감상하는 시공원인 수월이 못에서 오설록 다원까지 가는 인연의 길, 대정향교에서 안덕계곡까지 이르는 사색의 길 등 세 3개의 코스로 나뉘어 있다.

○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

다시 만난 추사와 제주 세한도 길이 2022. 04. 05 – 05. 29.까지 열리고 있다. 특별히 세한도 원본을 볼 수 있는 정말 희귀한 전시회이다.

178년 만에 처음으로 작품의 탄생지인 제주에서 ‘세한도’를 선보이는 이번 전시회는 지난 2020년 세한도를 소장해오던 손창근(1929년생) 선생의 기증을 기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세한,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의 순회전시로 마련됐다. 세한도를 비롯하여 ‘불이선란도’ ‘김정희 초상’ 등 13점의 작품을 함께 선보여 김정희의 삶과 예술세계를 폭넓게 살펴볼 수 있게 구성했다.

김정희 초상화, 19세기 중반 김정희 제자 문인화가 허련이 그림, 19세기 전반 조선 문예계의 중심에 있던 김정희는 1840년 55세의 나이에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된다. 8년간 이어진 세한(설 전후의 혹독한 추위를 이르며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뜻함)의 시기에 죄인이 된 자신을 잊지 않고 변함없이 귀한 책을 보내 주며 위로해주던 역관 제자 이상적(1804~1865)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는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는 논어의 구절을 모티프로 한 그림으로, 시련 속에서도 변치 않는 신의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조선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는다.

이상적은 세한도가 그려진 1844년에 북경에 가서 청나라 문인 16인의 글을 받았다. 이후 제자 김병선(1830~1891)과 그의 아들 김준학(1859~1914 이후)을 거쳐 김정희 연구자인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가 소장하게 됐다.

후지쓰카가 일본으로 가져간 세한도를 1944년에는 서화가 손재형(1903~1981)이 위험을 무릅쓰고 되찾아 왔다. 이처럼 세한도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오가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도 그것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지켜졌다.

1970년 무렵에는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1903~1983)가 세한도의 주인이 되었고, 대를 이어 이 그림을 소장한 손창근 선생은 마침내 2020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기증된 세한도를 국민과 함께 나누고 손창근 선생의 숭고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특별전을 개최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22년, 이 전시는 세한도, 다시 만난 추사와 제주라는 제목으로 178년 만에 세한도 작품의 탄생지 제주를 찾아오게 됐다.

불이선란도, 김정희가 그린 난 그림, 문인의 정신을 나타낸다. 김정희 인장과 글씨체를 맛볼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여기서 잠깐, 김정희가 보통 쓰였던 인장이 20여 개라 한다.

그 인장을 관리하던 제자를 두었는데 그는 화가로서 선비로서 붓 관리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한다.

잠깐, 완당인보(박혜백 저)에는 추사의 인장이 무려 180개 나온다.

○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에서 길을 묻다

전시를 열며, 19세기 전반 학문과 예술의 중심에 있었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1840년 제주로 유배를 옵니다. 이곳에서 그는 죄인의 신분이 된 자신을 잊지 않고 변함없이 귀한 책을 보며 위로해준 제자 이상적(1804-1865)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세한도(국보)를 그렸습니다.

〈세한도〉는 추운 겨울에도 푸르른 송백을 소재로, 시련 속에서도 신의를 굳게 지킨 변치 않는 마음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소중히 전해졌습니다.

2020년, 대를 이어 소장해 온 손창근(1929년생) 선생의 숭고한 기증으로 세한도는 우리 모두의 품에 돌아오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그 감동의 여운을 이어 178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에서 세한도를 선보이는 특별전 세한도, 다시 만난 추사와 제주를 개최합니다. 오랜 여정을 거쳐 다시 제주에서 만나는 세한도는 긴 두루마리의 길이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인사말 중).

<세한도> 1884, 종이에 수묵화,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80호

조선 500년 동안 300명 내외가 제주도로 유배 왔고, 기록에 남긴 사람은 100명 정도이다. 광해군이나 추사 같은 이는 중죄인으로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를 당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좁쌀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 소리다.

출처 이 건(1614-1662)의 제주 풍토기에서

○ 제주 유배 서신 문학 연구

추사는 수시로 아내에게 편지를 써 입에 맞는 음식을 공급받았다.

그는 의식주 너머 수선화나 귤에 반하며 세월을 녹여냈다. 벗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천으로 피는 제주 수선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와 그 가치를 모르고 말먹이로 주는 농부의 무지함(?)을 한탄하였다(권인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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