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74)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계첨에게 길을 묻다
[장영주 칼럼](74)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계첨에게 길을 묻다
  • 뉴스N제주
  • 승인 2022.07.17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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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 계첨에게 길을 묻다

100일 된 홍윤애 딸은 홍윤애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향리 큰 딸(홍윤애 언니)에게 맡겨져 키우다가 곽지리로 시집오게 되는데 이 이동 경로는 밀양 박씨 규정공파 연안공편 족보(사무실 제주시 수영장 근방)를 기준 삼아 자료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 외는 들리는 이야기를 정리했음이니 혹여 이에 대한 새로운 사실(홍윤애 딸 조 씨라고만 전하는 연유, 곽지리로 오게 된 경로 불투명)을 인지하게 되면 보완하는 절차를 가질 생각이다.

홍윤애의 딸이 언니 손에 자라다가 곽지리 박씨 집안 박수영에게 시집가 아들 하나 딸 둘 낳고 세상을 떠나 엄젱이 남돌이에 묻혀 있다가 건설 사업 중 무덤을 발견하여 현 소낭굴에 위치한 곳으로 이장하여 그 산소 옆에 조정철 사위(홍윤애 딸의 남편 박수영) 무덤을 만들고 옆에 홍윤애 아들 묘와 함께 있다(현재 소유자는 박씨 부친 밭인데 이제 아들 박@진이 묘소를 벌초하고 있다. 홍윤애 딸의 비 글씨는 조정철이 썼다고 전해 온다).

곽지리 등틍거리에 듬돌이 있는 데 이곳을 지나가는 외지인들은 이곳에서는 조심하였다 한다. 만약 힘자랑하려면 듬돌(크기가 두 종류)을 들어 자세를 낮춰야 이 길을 건너갈 수 있었으니 그 이유는 조정철(제주목사이며 형조판서에 지중추부사를 지냄)의 사위가 사는 동네인 관계로 감히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전해 오는데,

비록 가세가 기울였지만 그래도 조정철 목사의 사위 박수영인지라 그가 사는 섯동네(조정철의 사위는 연못가 앞에 있는 연안공파 박흥@ 큰 집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동동네 작은 집으로도 추정)와 혹여 홍윤애 딸 이름으로 마련해 준 동동네 박씨 문중 작은집(조정철 하사금으로 주택 구입 가능성, 현재 박씨 집안이 거주하는 곳은 그 당시로써 상상하기 어려운 300평 정도의 넓은 집) 사이에 듬돌을 두어 이 길을 지나는 이들을 시험해 본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바로 추사 김정희가 박규안 집안(섯동네 현재 박흥범 큰집)에서 며칠 거주하며 후세를 양성했는데, 족보에 의하면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 박계첨(박규안)이 집안임을 위처럼 나타내고 있다. 박규안은 자는 계첨 또는 병안 호는 혜백 또는 자기이다. 갑신년 7월 5일 출생하여 추사 김정희 선생의 수제자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완당인보를 편집해 현재 추사 전각 연구와 추사 서화의 사실 여부를 판별하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 있다. 경술년 6월 6일 사망하였고 곽지 지명 하와우사 간방에 좌하여 안치되었다. 곽지 공동묘지에 배우자 전주 이씨와 4월 3일 합장하였다(해설 문금자 한문 연구가).

박규안 분인 전주 이씨 쌍분 비
박규안 분인 전주 이씨 쌍분 비
박규안 묘
비문
한라산이 잘 보이는 곳
한라산이 잘 보이는 곳

한라산이 잘 보이는 곳 곽지 공동묘지에 묻히다.

단 여기서 남극사인이란 글씨를 써(명전) 보내 왔다는데, 소재지는 파악 중이다. 3 수제자 중 곽지 박규안에게 남긴 추사체로 진품명품에 나갈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주) 박규안은 조정철의 외손자(홍윤애 딸의 아들)와 같은 행렬로 박 씨 족보에 24세(대)로 나와 있다.

이에 대한 사항은 애월읍 장영주 책에 자세한 설화가 제시되어 있고 별도로 추사 김정희에 관한 책에서도 기록해 두었음이며 곽지리 향토지에도 추가 자료를 제시할 예정이다.

주) 추사 수제자 박규안도 곽지리가 문필봉의 저력을 발휘하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문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여러 선비 비석과 문필봉도 복원하였다(당시 필자는 맥주 한 상자 기증했다).

현재 조정철 족보가 박씨 집안에 내려오는 데 주변에 추사 김정희 글씨(남극사인박계첨, 박씨 집안 큰집 섯동네)를 박규안(박씨 집안 24세·대로 박수영은 작은 집 동동네 사위로, 박규안은 큰집 섯동네에 양자(?)로 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이 죽자 관을 덮은 명전에 글씨를 써 유골을 곽지리에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다. 덧붙여 어딘가 이 추사 김정희 글씨가 있다는 낭설에 곽지리지를 발간할 때 그 연유를 자세히 기록해 두고자 함이다.

주) 이 스토리는 신상우 전 곽지리장의 도움으로 박씨 집안 족보(박병직 제공)를 근거하였으며 길가에 버려진 병풍과 추사 김정희가 쓴 남극사인박계첨이란 서예(명전) 추정 자료를 참고하였으며 앞으로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

계첨 박규안은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사람으로 추사 김정희가 대정현에서 위리안치 되어있을 동안 드나들었던 길과 마애명을 남기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서쪽 길을 통해 대정현으로 위리안치될 때 봐 두었던) 곽지현에 잠시 들려(문촌이란 소문을 듣고) 글씨체가 아주 좋은 박규안(위리안치되었을 때 수제자) 집에서 거주하기를 며칠 있었는데 필자는 그 집에서 나온 연습용 창호지에 추사체(박규안이 연습했던 붓글씨 연습지)를 연을 만드는 데 썼던 기억이 새롭다.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이때 김정희는 수제자 박규안의 글씨가 워낙 뛰어나 누가 진짜 추사체인지 분간 어렵게 될 정도였는데 추사 김정희가 너무 안타까운 글솜씨를 아쉽게 생각하여 박규안을 데리고 한양에 올라가 과거에 보게 하는 데 그만 장원 급제하는 바람에 한양 선비들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매 그를 안타깝게 여겨 시신 관 명전에 남극사인이란 글씨를 써 보내 왔다고 1987년에 만든 곽금국민학교 향토지에 나왔는데 이를 토대로 필자가 채록 덧붙이기 글이 민족전래동화에 수록한바 거기에는 계참 박규안이라 되어 있는 건 채록 과정에서 계첨을 계참으로 수록한 것이 오늘날에도 정정되지 않으매 이번 곽지리 향토지를 만들 때 바로 잡았음이며 이 이야기는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돌하르방 선녀탕(인성리를 중심으로)에 대정현 남문성과 관련 지어 맛보기로 제시하였던 자료를 한데 모으는 작업을 병행하여 특별기고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남극사인박계첨이란 명전 글씨는 곽지리 박씨 집안(제주목사 조정철 사위 동네)에 내려온다고 한다. 아직 실물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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