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65)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장영주 칼럼](65)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 뉴스N제주
  • 승인 2022.05.1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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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추사 김정희에게는 3 수제자가 있었다 한다.

그중 가장 아끼는 수제자는 계첨 박규안인데, 그는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출신이다.

계첨 박규안은 추사가 대정현에 위리안치됐을 때 늘 찾아간 문하생으로 수학하던 차 추사가 귀양이 풀리자 서쪽 한길을 통해 한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문하생 출신지인 문촌 곽지리 계첨 박규안 집에 들러 여러 날을 기거하며 동네 사람들과 교류하며 소일하다가 계첨을 한양에 데려가 과거에 응시하게 했는데,

장원 급제하자 한양 선비들이 시기 질투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매 ‘남극사인계첨’이란 명전을 시신과 함께 곽지리 계첨 집에 보내니 그 후손들은 한라산이 잘 보이는 곳에 무덤을 부인과 함께 합묘하고 명전은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 자료(전자책, 장영주)는 추사 김정희 연구자료에도 안 나타나는 귀중한 채록을 기준으로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고자 하니 추가 김정희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편집자 주) 

다음과 같은 진행으로 이어진다.

□ 목차

□ 칼럼/광해 유배길 추사 유배길

□ 머리글

□ 추사 김정희

○ 추사 글 모음

○ 추사 유적지

□ 추사 김정희 유배길/추사에게 길을 묻다

○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

○ 제주 유배 서신 문학 연구

□ 제주추사관

○ 제주 추사 적거지

□ 제주민속촌 추사전시관 포토 길

□ 제자 박규안

○ 계첨 박규안(朴奎安)/장영주 작

□ 계첨 박규안/계첨에게 길을 묻다

○ 계첨에게 길을 묻다

○ 세상에 처음 알리는 계첨 스토리

○ 버려진 병풍에서 박규안 흔적

□ 칼럼/광해 유배길 추사 유배길

제주신문 기사승인 2018.05.20, 11:20:00

▲ 장영주 교육학박사/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 광해군 길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선조와 인조 재임 기간 사이에 조선을 다스렸다. 1641년 8월 7일(음력 7월 1일) 조선 전라도 제주목(현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유배(귀양) 중 사망해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안장됐으며 모친 공빈 김 씨와 배우자 폐비 유 씨, 폐세자, 폐세자빈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광해가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후송)할 때 엄중하게 명령을 내려가는 곳을 알지 못하게 했으므로 배 위의 사면을 검은 휘장으로 막아 밖을 전혀 볼 수 없도록 했다. 배가 해안(어등포)에 닿은 후에 비로소 제주도에 왔다고 알리니 광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가 어찌해서 여기까지 왔느냐? 내가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고 하면서 불안해했다고 한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강화에서 제주까지 멀고 먼 길을 내려온 광해는 당시 심정을 ‘바람이 불어 비가 흩날리는 성머리를 지나는데… 안개 낀 강 위로 외로운 배에 누웠어라’라는 시로 나타냈다(출처: 손종흠, 왕릉 역사 기행, 도서출판 앨피, 2016.). 여기서 광해의 아픈 심정을 노래했기에 듣는 이들이 모두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영감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온갖 관청이 하루가 멀다고 모든 것을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해 염치없는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을 요구해 심지어 김치판서(김채판서)니 잡채참관이니 하는 말까지 생기게 했습니까?…영감께서 왕위를 잃은 것은 스스로 잘못한 결과이지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속에 갇혀 있단 말이오?” 이렇게 광해가 유배지에서 여자 종에게 영감이라 구박받는 일도 빈번했고 바깥출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감시를 받았으나 초연히 유배 생활을 했다. 광해가 위리안치됐던 곳이 제주성 서쪽 부근이라 알려져 있다(현 국민은행 자리에 광해 적소터란 표지석이 있음). 이하생략

○ 김정희 길

네이버 백과에 의하면, 조선 시대 선비 출생 1786년(정조 10) 사망 1856년(철종 7)으로 문신, 실학자, 서화가이다.

조선조 병조판서 김노경과 기계 유 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 앞으로 대를 이으려고 양자가 되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었다.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8년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렸다.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렸다.

(다음에 게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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