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70)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추사, 화북진 도착
[장영주 칼럼](70)추사 김정희 수제자 박규안 -추사, 화북진 도착
  • 뉴스N제주
  • 승인 2022.06.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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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공무원대한민국최고기록(기네스북·400여권·종이전자오디오책 중복있음)
통일교육위원·남북교육교류위원회위원·민통제주협의회부회장·평통자문위원 지냄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아동문학가·문학평론가·사진작가
장영주 작가
장영주 작가

◆양순필, 제주 유배문학연구, 도서출판 제주문화, 1992.에서

추사의 불우한 유배 생활 제주도와 북청 등지에서의 11년 지루한 세월은 서간이 아니었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서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풀어 놓았다.

추사의 한글 서간은 34통 발굴 정리되었는데 그중 15통은 제주도 대정현 유배 생활 동안 쓰인 것으로(유보 6통 별도) 두 번째(첫째 부인 한산 이 씨가 변을 당해) 부인 예안 이 씨(32통)와 며느리(2통)에게 쓴 서간을 위 계첨 박규안과 연관성에서 몇 건을 들여다보면,

1)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대정 적거소에 도착한 후 부인에게 쓴 편지에 해남을 떠나 제주도로 오는 과정에서 풍랑을 만났다고 적었지만 어디에 도착했는지는 편지에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양 학자는 제주도 화북진 포구에 당도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떠날 때 장소가 확실하지 않으매 조천포구로 나갔다고 추정(김정희는 그나마 조정에서 상당한 배려를 해준 인물로 본다면 조천포가 맞는 것이다. 조천포구에 내리면 조천관이 바로 인접해 있어 높은 직책의 양반들이 귀양이나 장사꾼들이 오갈 때 조천관에서 묶었다.

장한철 표해록에도 조천관에 묶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곳에는 연북정이란 정자가 있어서 한양에서 임금이 부름을 받으면 곧장 올라갈 준비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광해는 조정에서 아주 위험한 인물로 봤기에 유배 올 때 조천포구가 아니 어등포로 배를 검은 천으로 드리운 채 귀양 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 9월 27일 하루 만에 해남에서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성에서 대정성 까지는 서쪽으로 팔십 리 떨어져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소견과 대동소이하다. 당시 제주도는 일주도로(한길) 하나밖에 없는지라 그 길을 통해 유배 가는 데 나무가 울창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묻어 나는 내용의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본다.

3) 10월 1일 대정현에 도착한 추사는 포교 송계순의 집 밖거리를 반분하여 생활하였다고 하는데 필자가 대정우물터 앞 추사 적거지로 예상되는 집을 살펴본 결과 이와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4) 후일 추사는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를 이동, 마찬가지로 밖거리에 생활한 것으로 현재 고증되어 밀랍이 제시되어 있다.

5) 1848년 12월 6일 석방 명을 받았으나 추사에게 전해지기는 12월 19일이었다 한다. 다음 해 1849년 정월 7일에 대정을 출발하여(서쪽으로 돌아왔다는 가설을 필자와 동일) 조천포구(여기서는 나타나지 않음)로 가는 도중 제주성 김리 집에서 묶었다는데, 여기서 필자와 다른 일이 생겨난다.

필자는 서쪽 한길을 통해 동쪽으로 돌아가는 도중 곽지현(곽지리)에 들려 계첨 박규안 집에서 며칠을 소일했다고 보는 데 여기에는 그런 기록이 편지에는 없다. 이 부분이 이글에서 제자 박규안의 핵심 분야이다.

유홍준, ㈜창비, 2018.에서

서장,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유홍준은 본 책을 쓰며 양순필, 제주 유배문화연구, 제주문화, 1992.를 참고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본 내용은 앞 양순필 내용과 비슷한 점이 많은 관계로 그냥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오는 길과 적거지 관련,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되돌아가는 길의 관련성을 이기 하는 차원에서 설화의 넋두리를 조금 가미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석양 무렵에 곧바로 제주성 화북진에 당도했네, 여기가 바로 하선하는 곳인데 구경 나온 제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 “오늘 풍세가 배를 이토록 빨리 몰고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했다네. 그래서 나 또한 이상하게 여겼네 (전집 권 2, 아우 명희에게, 제1신)」

주) 편지 내용에 하루 만에 다다랐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거리를 택했다는 것인데, 그건 관곶(조천 소재)이라면 조천포구가 될 상 싶기도 하고, 구경나온 사람들이 나오는 데 그 당시 구경나올 사람들이 있다는 건 화북보다는 조천포구(조천관이 있어서)가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기와집이 수십 채 있었다는 말과 연관성에서 본다면?

추사가 풍랑 속에 제주로 건너간 사실은 이내 하나의 전설로 미화되어, 훗날 민규호는 「완당 김공 소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주는 옛 탐라인데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 이곳을 건너가려면 보통 열흘에서 한 달 정도가 소요되곤 했다.

그런데 공이 이곳을 건널 적에는 유독 큰 파도 속에서 천둥 벼락까지 만나 죽고 사는 것이 순간에 달린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뱃사공도 다리가 떨려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뱃머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소리 높여 시를 읊으니 시 읊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서로 지지 않고 오르내렸다. 공은 인하여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며 “사공이 힘껏 키를 끌어당겨 저쪽으로 향하라!” 했다. 그러자 항해가 빨라져 마침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제주에 당도하니 제주 사람들이 “날아서 건너온 것 같다” 라고 했다.(전집 권수, 완당 김공 소전)

추사가 도착한 화북진은 제주목관아에서 10리 떨어진 항구로 유배객들은 대개 여기로 들어왔다. 추사 앞엔 우암 송시열, 추사 뒤에 면암 최익현이 이곳을 거쳐 갔다. 화북진에는 오늘날에도 해신당(海神堂)이라는 사당과 연대(姬臺)가 남아 있어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이 해신당은 1820년에 한상목 목사가 처음 세우고 1841년에 이원조 방어사가 중수한 것으로, 여기에는 추사의 제주 유배 말년에 제주 목사로 부임해온 장인식이 1849년에 해신지위(海神之位)라고 쓴 돌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화북진에 도착한 추사는 우선 배에서 만난 한 아전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배가 정박한 (…) 화북진 아래 민가에서 유숙했다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성으로 들어가 고한익이라는 아전의 집에 잠깐 있었다네. 이 아전은 전직 이방이었다는데 배에서부터 고생을 함께했다네. 매우 좋은 사람인 데다 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뜻이 있으니 이 또한 곤궁한 처지로서 감동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네.(전집 권 2, 아우 명희에게, 제1신)」

당시 제주는 유배객이 들어오면 그것이 한차례 구경거리가 되었다. 추사는 ‘영주 화북진 도중’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시는 다음 페이지를 넘겨 이어진다.

주) 노인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노인성은 남쪽 바닷가에서만 볼 수 있는 신비의 별로 서귀포시 삼매봉 정상 정자에서가 제일 관측하기 좋다 한다.

겨울철에는 새벽 2시에서 3시 정도 여름철에는 21시에서 22시 사이가 제일 좋다. 필자도 네 번 노인성 관측하려고 갔는데 겨우 한번 조그맣게 흐릿하게 보일 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별을 보면 무병장수한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마을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몰려듦은/쫓겨난 신하 생김새가 가증스러워서겠지/마침내 백 번 꺾여 천 번 갈린 곳에 오니/남극성 은혜로운 빛 바다에 파도 없네.

(남극성이란 말이 나온다. 노인성이라고도 하는데 이 남극노인성은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상서로운 별이다. 이 별을 보면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곧잘 중앙에 알려져 제주로 귀양 오든 문인들의 풍류 차 오든 이별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추사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거로 기록되는데 데 아마 노인성에 대한 설화를 들은 것 같다.)

화북진에서 대정현으로 가자면 애월·한림·한경 마을을 거쳐 갈 수도 있으나 그러면 해안선을 따라 돌아야 하므로 추사 일행은 중산간 마을을 잇는 지름길을 택했다. 이때 추사는 한라산 자락의 이국적인 풍광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 당시 중산간 길이 제주현에서 대정현까지 이어져 있었는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제주에는 한길이라 해서 길이 하나밖에 없던 시절이라 중산간 길이 만약 있었다면 그 길은 아주 좁고, 꼬불꼬불하여 한길(180여 킬로미터, 현재 해안도로 240여 킬로미터)로 가는 것보다 몇 배 힘이 더 들었을 것 같은데, 가는 길 며칠 동안 숙박 관계며 위치추적 관계며 좀 불편함이 있을 거란 추론을 해 본다.

필자도 어렸을 때 곽지에서 제주 성내까지 20킬로미터를 걸어서 가 봤는데 6시간 걸렸다. 당시 추사 일행은 대정현까지 25시간쯤 걸리지 않았나 보면 중산간 도로라는 게 좀.

「대정으로 가는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人馬)가 발을 붙이기 어려웠으나, 절반을 지난 뒤부터는 길이 약간 평탄했다네. 그리고, 또 밀림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빛이 겨우 실낱만큼이나 통했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들로 겨울에도 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또 육지의 단풍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느낌이 있었겠는가.(전집 권 2, 아우 명의에게, 제1신)」

그런 쓸쓸한 늦가을의 서정을 안고 추사는 1840년 10월 2일 대정현에 도착했다.

추사가 대정현에 와서 처음 유배 처로 삼은 곳은 대정읍성 안동네(안성리 1682번지) 송계순의 집에 머물렀다.

「정군(鄭若)이 먼저 가서 군교(軍校)인 송계순의 집을 얻어 여기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은 과연 읍 안에서는 약간 나은 집인 데다 꽤 정갈하게 닦아놓았더라네. 온돌방은 한 칸인데 남쪽으로 향하여 가느다란 뒷마루가 있고, 동쪽으로는 작은 부엌이 있으며 부엌 북쪽에는 또 두 칸의 부엌 칸이 있고 곳간이 한 칸 있네. 이것이 바깥채라네. 또 안채로 이와 같은 것이 있어 주인은 전처럼 안채를 쓰고 내가 바깥채에 기거하기로 했다네.

다만 바깥채는 이미 절반으로 갈라서 경계를 만들어놓아 손님을 맞이하기 충분하고, 작은 부엌을 장차 온돌방으로 개조한다면 손님이나 하인 무리가 또 거기에 들어가 기거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일은 변통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네.(같은 글)」

추사는 이렇게 마련한 집을 그린대로 편안한 거처로 삼을 수 있었던 듯 집을 장만하자마자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후 추사는 거처를 대정현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며 탱자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초가집에서 위리안치한다. 또 유배가 끝날 무렵 식수의 불편 때문에 안덕계곡이 있는 대정현 창천리로 한 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서귀포시에서는 1983년, 추사의 유배지 가운데 그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강도순의 집(안성리 1662번지)을 복원하고 그 앞에 추사 유물전시관을 세웠다. 고증에 따라 60평 대지 안거리 밖거리 모거리 이문거리라는 초가를 지었다. 2007년에는 유물전시관을 헐고 제주추사관을 새로 지었다. 이 건물은 세한도 그림에 나오는 집을 모델로 했다.

추사에게 정말로 귀한 제지가 생겼다. 필장(筆匠) 박혜백(朴慧百)이다. 박혜백은 제주도 사람으로 재첩이라는 자를 썼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비가 없다. 추사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붓 만드는 솜씨를 이렇게 칭찬했다.

「박혜백이 제법 붓 고르는 데 능하여 다람쥐 털로 만든 청서필을 늑대 털로 만든 낭호필 보다 더 치면서 스스로 그 묘리를 얻었다고 여겨, 남이 혹 자신의 견해를 그르게 여기더라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초미필을 보고 나서는 이를 대단히 칭찬하여 낭호필·청서필보다 품질이 우수하다고 했으니, 그의 말이 진실로 잘못된 것이 아니네. 그러나 초미필 낭호필보다 더 나은 (…) 중국 호남에서 생산되는 여러 품종의 붓을 두루 보아 그의 안목을 넓히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네. (전집 권 2, 막내아우 성희에게, 제7신)」

「기쁜 소식이 온 것은 섣달 19일 (…) 특별히 보낸 인편은 섣달 그믐날에 왔는데, 작은 아우, 막내아우의 편지를 연달아 받아보았으나 이 기쁜 소식은 한 자도 언급이 없어 이 마음 몹시 타서 발광이 나려 하고 갈수록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네. (…)

(섣달 그믐날의) 두 번째 서신이 온 뒤로는 예전 처소에 더 오래 머물 수가 없어서 속히 돌아갈 행장을 꾸리는데, 애들의 정성스럽고 보살핌과 철규(노비)의 부지런한 주선으로 7일 이내에 9년(8년 3개월) 묵은 온갖 잡다한 일을 다 처리했다네.

그리하여 이달 7일에는 대정에서 출발하여 에 본주(本州, 제주목)로 향하다가 본주 아래 김리(아전 김 씨)의 집에서 하룻밤을 묶고(…) 지금(1월 8일)은 포구로 내려와 순풍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정한 계획이 없네.(전집 권 2, 막내아우 상희에게, 제9신)」

잠깐, 곽지리 박규안 이야기가 없다.

추사는 그렇게 제주목에 도착하여 육지로 가는 배의 출항을 기다렸다. 그러나 출선(出船)은 바람이 많아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되는 것이 당시 사정이었다. 아무리 조급증이 나도 하늘의 바람에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추사는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여러 사람의 의견이 서로 맞은 다음에야 배가 뜰 수 있다네. 듣자 하니 오늘 저녁에는 바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잠시 바람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도 하니 내 맘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인지라 민망하고 결박할 뿐이네. (…) 이렇게 오늘 저녁의 바람은 기약할 수 없어 팔룡이에게 편선(使船)을 이용하여 먼저 가도록 했는데 과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 대략 이렇게 몇 자를 적어 부친다마는 이제 어느 날에나 다시 편지가 있을지 모르겠네.(같은 글)」

(화북항에 해신당이 있다)

얼마나 간절하고 애타는 일이었겠는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무사히 육지로 건너가고 싶었겠는가, 추사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해신당에 제사를 지내며 남해 용왕에게 비는 간절한 제문을 지어 바쳤다. 추사의 제문은 아주 평범한 글로, 문체에 긴밀하고 아름다운 맛이 전혀 없다. 윤율도 상정도 없다. 오직 신령님께 도와달라는 애원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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