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인 "진술(陳述)...시와 비시(非詩)를 가르는 경계선"
이어산 시인 "진술(陳述)...시와 비시(非詩)를 가르는 경계선"
  • 뉴스N제주
  • 승인 2019.11.3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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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시 창작 강좌(62)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62)

□시와 비시(非詩)를 가르는 경계선

사진=한라마을 작은도서관 돌담
사진=한라마을 작은도서관 돌담

현대시에서의 묘사(描寫)란 시적 대상을 중심에 놓고 스케치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묘사에는 시적화자(詩的話者/시 속에서 진술하는 사람)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에서 자기주장이 없는 약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난 시는 실패한 시지만 자기주장이 없는 시는 죽은 시"라고들 말한다. 시적 화자가 없다는 것은 시에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시의 전개는 진술을 위해 묘사를 하는 것인데, 묘사는 사진과 같은 것이라면 진술은 나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다 쓰면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시는 산문처럼 써놓고 감정을 조절하여 써서는 안 될 말을 골라내는 일이다. 즉 무슨 나무인지를 알 수만 있다면 가지를 다 쳐내어도 된다는 뜻이다. 나무의 보이는 부분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와 의미망으로 연결하여 진술하는 일이 시쓰기다.

진술에는 자기주장, 즉 자기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묘사만으로도 시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평론가는 진술(陳述)이 없는 시는 비시(非詩)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묘사는 정물화와 같고, 진술이 들어간 시는 시인의 생각을 곳곳에 숨겨놓은 ‘말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진술은 우리들의 정서 밑바닥에 잠겨 있는 상투적인 의미 체계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깨달음을 동반하는 표현이어야 한다.


    신라 헌강왕 이후
    절이 산을 업고 있다
    갈전 쪽으로 기울거나
    진성 쪽으로 기울거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물지게 지고 가던 남새미 사람
    물이 첨벙거릴 때
    산은 첨벙거리지 않는 것이
    용하다 여겼을 뿐이다

    - 강희근, <절이 산을 업고> 전문


시 잘 쓰기로 유명한 강희근 시인(경상대학교 명예교수)의 위 시는 짧은 시 속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의 내용으로 봐선 그 절은 신라 헌강왕 때 지어진 절이겠다. 갈전이 나오고 진성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천년 고찰인 진주 월아산에 자리잡고 있는 청곡사가 분명하다.

이 시에선 묘사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절이 산을 업고 있다’니 절창이다. 청곡사에 몇 번 가본 필자는 진주8경의 하나인 ‘월아산 해돋이’를 보면서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었는데 그 월아산이 온전히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갈전 쪽으로 기울거나/진성 쪽으로 기울거나/언제 그런 일이/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몇 번을 바라본 풍광이었지만 필자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이런 것이 시인의 진술이다. 산이 이리저리 기울어질리 만무하지만 시인의 심미안(審美眼)은 양쪽 마을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서 갈전 쪽으로, 혹은 진성 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으로 산을 업고 있다는 것이다. 남새미 마을 사람들이 길어먹던 우물, 물지게의 ‘물이 첨벙거릴 때/산이 첨벙거리지 않은 것이/용하다 여겼을 뿐이다’

진성 사람들은 자기네 산이라고 하고 갈전 사람들은 자기네 산이라고 했을, 이해에 따라서 자기네 쪽의 산이라고 우기지만 ‘산은 언제나 그대로다’는 표현인데 직설적이지 않으면서 시적 감동을 불러오는 좋은 시다.

시는 '정서적 언어의 회고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리처즈(I.A Richards)는 과학적 언어인 객관적, 개념적, 비개인적, 지시적, 논리적 의미보다는 정서적 언어인 주관적, 간접적, 개인적, 함축적, 비약적 의미를 살리는 시를 써야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했는데, 비논리적이거나 이질적 경험들을 끌어들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거나 결합되도록 한 포괄의 시(poetry of inclusion)가 최고급의 시이며 그것이 시의 특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론은 테이트의 텐션(tension/긴장감), 브룩스의 역설(paradox/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것 너머에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수사법)과 아이러니(irony/반어법이라고도 하는데 시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사실 사이의 괴리, 또는 그런 표현으로 쓰인다)로 발전하였다.

서정적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강희근 시인의 시선집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묘사와 진술, 통할(포괄하는 시), 텐션, 역설과 아이러니를 공부하기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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