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의 주인공은 화자(話者)...시인이여, 시 속에서 빠져나오라"
이어산 "시의 주인공은 화자(話者)...시인이여, 시 속에서 빠져나오라"
  • 뉴스N제주
  • 승인 2019.11.22 19:43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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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61)토요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詩 창작 강좌(61)

□시인이여, 시 속에서 빠져나오라

가을 하늘에 솟아난 노란 감
가을 하늘에 솟아난 노란 감

필자의 토요강좌를 처음 시작한 것은 7년 전이었다. 몇몇 매체에서 전재나 연재도 하였지만 아무튼 오늘로 300회를 채웠다. 그동안 과분한 사랑을 준 독자도 있지만 어설픈 강좌에 대한 염려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강의를 들춰보면 정말 얼굴이 화끈할 정도로 부족한 강좌도 있었음을 필자가 자각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 강의는 시를 잘 쓰는 기술자를 만들기 위한 강의가 아니라 시인조차 시집을 사서 읽지 않는 세태에서 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라도 시집을 사서 읽는 ‘독자가 먼저 되자’는 운동으로 시작하였으므로 ‘제대로 된 독자는 어설픈 시인 열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필자도 함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어왔다.

그러면서 기능적 시인이 아니라 시의 본질인 정신성과 서정성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결국 시가 추구하는 시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생명시 운동’이라는 주제로 이제껏 달려왔다.

필자는 “시를 잘 쓴 사람은 문학사에 남겠지만 시를 알고, 뜨겁게 시인의 삶을 산 사람은 우리의 영혼 속에 살아남는다‘는 시론을 실천해 보려고 한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이 일을 하려니 힘에 버거울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개발도상국의 위치에서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런 평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외국의 앞선 기술을 모방하며 축적하였고 결국 그 기술을 따라잡거나 뛰어넘는 여러 분야가 생겼다. 많은 노력과 공을 들여서 일단 비슷하게 만들어 봐야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이것을 ‘따라 하기’, 혹은 ‘모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방법만으로는 자기의 기술이 되기 힘들다. 그것을 참고로 하되 다른 것을 만들어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모든 예술은 모방에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란 모방에서 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실제로 따라해 보는 것이 백 마디 말 보다는 낫다.

좋은 시를 따라서 써보기를 먼저하고 그것을 참고하되 나의 생각을 끼워 넣는 페로디 작업을 하다보면 자기만의 시풍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을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런 연습을 통하여 나만의 시를 쓰게 된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에 잘못 길들여지면 베끼기가 될 수 있으므로 자기만의 시로 승화 되었을 때에만 시를 발표해야 한다.

또한 시는 전사(前事)가 아니라 후사(後事)다. 즉 표면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이야기를 시인만의 해석으로, 시속의 화자가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에 상상력은 중요한 부분이다.

그 상상력은 창조와 직결되는데 조심해야 될 것은 시인이 문장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의 화자가 이야기를 창조하고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시인이 주인공이 되면 교조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의 주인공은 화자(話者)다.

화자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지만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를 쓴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속의 화자가 시를 쓴다는 생각으로 시작(詩作)을 해야 한다. 시인이 빠져야 시가 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천안행 버스를 타고
   이내 잠에 든다 허름한 시외버스가
   제공하는 단잠
   망향휴게소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딸칵딸칵
   마침내 떠나는 플라타너스 이파리
   좌석벨트 푸는 소리가 빠르게
   풍경을 버린다

   한기寒氣 든 당신 손 닿는 곳 마다
   불콰하게 돌던 취기
   몇 순배가 돌았을까 시시껄렁한 농담도
   지쳐갈 무렵 구겨진 꽃방석 두고
   겨울로 간다 우리는

   담배연기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골목
   키 작은 간판들의 퀭한 눈빛
   얼마나 더 가야 당신과 내가 이 서늘한
   이별 앞에 담담해질 수 있을까

   어젯밤 파올로 코넬료의 불륜과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진자 앞에 서 있었다
   중고서점에서 사다 나른 책들
   등짐같이 쌓이는 나무의 유전자
   숲이 보내는 은밀한 추파에 영면에 든
   추가 흔들린다

   떠나든 보내주든 헤어져야 할 시간
   툭툭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바라보다, 차츰 무게 없이 가라앉는 그림자
   찬 바닥에 누워 잊히기 위해 부서진다

   - 구수영, <풍경을 버리다> 전문

천안행 허름한 시외버스가 제공하는 단잠,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딸칵딸칵/마침내 떠나는 플라타너스 이파리/좌석벨트 푸는 소리가 빠르게/풍경을 버린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시의 수준을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누군가와의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담배연기’가 나오고 ‘서늘한 이별’이 언급된다. 그 이별의 기억은 아직도 절절하고 차갑다.

‘얼마나 더 가야 당신과 내가 이 서늘한/이별 앞에 담담해질 수 있을까’ 가난한 시외버스는 우리의 지난 세월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쯤이면 이별의 대상이 아버지대(代)로 치환 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니라 사랑했던 사람이어도 좋다. 그러고는 파올로 코넬료의 ‘불륜’과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시의 열쇠로 걸어 두었다.

두 작품의 내용을 인용하면 말이 길어지기에 여러분의 일독에 맡기고, 이 시는 ‘묘사+진술+통할’을 제대로 해 놨기에 음미할수록 맛이 있다.

그리고 시인이 시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 속의 화자가 시를 잘 끌고 왔다.

이처럼 시인은 상상력의 걸신이 들어야 한다. 차를 타고 가다가 앞서 가는 차량의 번호도 자세히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길가의 소화전도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시적 대상과의 자리바꿈을 부단히 연습하라.

좋은 시를 많이 읽어보고 그 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비로소 나의 시를 제대로 쓸 수 있다.

그리스 철학자 데메트리오스(Demetrius)는 “시의 언어란 먹이를 덮치기 직전에 몸을 최대한 웅크린 야수와도 같다”고 설파 했는데 참으로 절묘한 해석이며

지금도 시 창작의 중심에 놓여있는 말이다. 시의 언어란 이렇게 최대한 웅크렸다가 폭발적으로 펼쳐지는 힘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된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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