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제목과 첫 행이 시 짓기의 절반 이상 차지"
이어산 "제목과 첫 행이 시 짓기의 절반 이상 차지"
  • 뉴스N제주
  • 승인 2019.09.0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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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51) 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 토요 시 창작 강좌(51)

□우상 버리기와 시 짓기

잠한 파도(사진=이어산)
잠한 파도(사진=이어산)

우리에겐 각자의 우상이 있다. 너무 흔한 이야기지만 돈이나 명예, 사랑과 삶, 또는 종교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영국의 철학자)의 유명한 ‘4대 우상론’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학설이기도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이 참고해야할 내용이므로 혹 잘 모르는 분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오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베이컨의 학설대로 ‘선입견과 권위’를 버리지 않으면 진리에 다다르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시를 쓴다는 사람이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저것은 ~~이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얽매이는 확신이나 고집, 편견이 우상이란 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시는 고집 버리기, 편견에서의 탈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 본질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시 쓰기의 핵심이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서술이거나 직유, 또는 묘사인데 시(詩) 이전의 비시(非詩)일 가능성이 많다.

묘사만으로도 시를 쓸 수는 있지만 묘사엔 시인의 이야기가 들어갈 여백이 없으므로 시인의 진술(시인의 생각, 철학)을 시적대상과 연결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시가 우리의 사람살이에 기여할 수 있다.

아래 시는 시사모 8월의 작품상에 당선된 시다.

   푹푹 마음이 빠지는 일이네

   지키고 넘어야 할 곳이
   어디까지인지
   의문부호만 뒹구는 일이네

   나체로 앉혀 놓고 그려보지만
   적정선은 아이러니

   그렁그렁 차오른 선
   지난여름 얼어 버렸어도
   오늘도 그 선을 넘나들며
   선착장에 닻을 내리는 일은

   그윽하던 그대의 품속
   가만히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듣던
   그대의 등이 무연히
   과거형으로 돌아서는 것을

   외로움이, 그리움이
   가난한 끼니처럼 찾아들기 전
   물안개 너머 아스라이 평행선 그어
   등을 돌리게 하는 일

   목화꽃, 찔레꽃 순정이
   굽은 허리 펴는 일
   휘어진 어둠이 떨어진
   선 하나 줍는 일인 것을

   미처 모양을 정하지 않은 구름이
   다르랑다르랑 나에게 그려주었네

      - 박문희, <바람을 그리는 일> 전문

쇼펜하우는 “감성은 예술이다.”라고 했다. ‘감성’이란 진술과 연결되어 있다. 감성의 능력이 시 속의 화자가 제대로 말하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감성은 예술이고 예술은 진술이다”는 말이 성립된다.

위의 시는 ‘A는 B다’ 라는 등가의 원칙(유사성의 선택)을 통해 진술(시인의 감성이나 철학)로의 이미지즘 확장이 대체적으로 잘 됐다. 첫 행의 ‘푹푹 마음이 빠지는 일이네’라고 궁금증을 유발한 시작은 현대시에서 적극 권장되는 시 작법이다.

필자는 “제목과 첫 행이 시 짓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요한 사항이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위 시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의 답을 찾는 일을 ‘바람을 그리는 일’같이 모양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는 진술이다.

계속 변해가는 현실에 대해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일단 제목과 첫 행에서 성공하고 있고 시의 완성도도 갖추고 있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철학적 사고는 진술을 설명할 때 많이 인용되는 문구이다. 시인의 생각이 없는 묘사만의 시는 엄밀하게 말하면 사진이나 정물화 같은 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시를 잘 쓰는 시인들도 있다. 묘사는 직유에 가깝고 은유는 진술이다. 이 둘은 결합을 했을 때 더 큰 시적 완성도를 갖는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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