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21)비리의 값- 이기고 돌아오라
[현명관 칼럼](21)비리의 값- 이기고 돌아오라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8.20 2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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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최후의 승자가 진짜 승자다."
"하려고 들면 길은 잇는 법이다."
"연습이 대가를 만든다."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1962년 사시 1차 합격 2차 실패, 63년 사시 2차 낙방, 64년 2차 낙방, 65년 사시 2차 낙방, 고시 낙방을 도합 3회로 밥 먹듯이 했던  현명관 회장이 포기하고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독일어 수업을 하면서 소리내어 읽으면서 가르쳤던 이 표현들이 결국, 자신에게 메아리되어 가슴속으로 느꼈다.

그는 가슴에 피지 못한 꿈에 미련이 남으 상황에서, 이 표현들을 아이들과 말하면서 다시 결심을 하게 된다.

다행히 그는 다시 공부를 해서 결국 합격을 하게 된다. 이후 27살에 첫 부임해서 오래된 공무원 조직의 생리를 알게 된다.

그는 오히려 변함이 없던 그러한 조직에서 지겨운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감사원에 대한 매력을 느껴 그리로 옮겼지만 결국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알게 된다.

다행히 그는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은 다른 장면보다 내용이 길다.

 중요한 것은 도전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그의 인생의 파노라마가 이어진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공무원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과는 생리가 다를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공무원 조직은 계급사회라 할 수 있다.

그 계급사회에서 이기려면 부지런해야 할 것이다. 그 부지런함이 오늘의 현명관 스토리가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 자세한 내용이 있기에 각설하기로 한다.

늦은 8월이지만, 가을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을이 왔다고 말을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게 정답이 될 수 있다. 그게 여론이다.

한사람이 말하는 것보다 10명의 사람들이 말한다면 그것을 정답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 한사람이 정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감사원이 있고 언론이 있고 눈이 있는 것이다.

그 눈을 피해, 언론을 피해, 감사원을 피해 청탁이나 받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유능한 뱃사공은 거친 파도가 만든다고 한다. 오늘도 어려운 코로나정국에 힘내시길 빌면서 많은 필독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편집자 주]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그는 아내와 상의한 후 다시 한번 고시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옷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기로 하고 일단 제주를 떠났다.

부부가 선택한 곳은 판자촌 우글거리는 서울 전농동이었다. 1년 만에 다시 고시 준비를 시작한 현명관은 학생 시절의 자세와 분명 달라진 자신을 발견했다.

아이를 돌보고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되니, 학생 시절에 비해 시간은 부족했다.

그러나 마음 자세와 절박함의 정도가 달라서일까? 공부는 학생 시절보다 훨씬 더 잘 되었고 집중력은 비교할 수 없었다.

잠재의식 속에 고시가 아니어도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던 때와 고시 외에는 길이 없음을 스스로 확인한 사람의 집중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몰입하자 시험에 붙을까 떨어질까 하는 걱정, 조바심 따위로부터 의연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전농동의 이웃 주민들이 현명관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는 가난했지만 어쩌다 생긴 흑백 TV를 갖고 있었다.

1966년 6월 25일 밤 8시, KBS에서 중계하는 김기수 선수의 권투 경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그의 집에 모인 것이다. 현명관도 잠시 고시를 잊고 경기를 지켜봤다.

"말씀드리는 순간 김기수 선수, 레프트, 라이트, 벤베누티 겁먹은 표정.”

아나운서의 한마디 한마디에 주민들은 온 힘을 다해 함께 주먹을 휘두르며 함성을 질렀다.

경기 종료 후 판정 결과가 발표되었다. 2대1 김기수 승, 그 순간 현명관 집은 “와!" 하는 함성이 폭발했다.

주민들의 환호와 얼싸안고 뛰는 사람들 때문에 구들이 꺼질 지경이 되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WBA 세계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김기수 선수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이다.

가난했던 나라가 자존심을 세운 순간이었다. 전국의 다방에 모여 TV를 시청했던 애국 시민과 전농동 주민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고시를 몇 개월 얼마 앞두고 벌어진 사건이지만 현명관은 시간을 빼앗은 이웃 주민들에 대해 불쾌하거나 그 시간 공부를 못해 초초해 하지 않았다.

이것이 고시를 준비하던 학생 시절과는 달라진 점이었다. 개명한 이름이 좋은 영향을 주고 안주고도 이젠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로써 마음이 편해졌다.

1966년, 사법시험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서, 현명관은 가볍게 행정고시도 보기로 하고 시험장을 찾았다.

행시와 사시는 과목이 겹치는 부분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큰 기대 없이 문제를 풀고 집으로 돌아왔다.

1966년 8월 27일 동아일보 1면은 월남으로 파병 가는 백마부대군인에 대한 기사로 장식되었다.

합격자 발표를 보려던 생각도 잊은 채, 현명관은 무심히 기사를 읽은 후 신문을 넘겨갔다.

2면 3면 4면, 합격자 발표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7면에 이르자 역시 파월장병에 대한 헤드라인이 크게 눈에 들어온다.

'이기고 돌아오라.'

천천히 기사를 훑다가 합격자 발표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전국에서 49명을 뽑았는데 서울에서는 23명을 뽑았다. 현명관은 서울지역으로 지원했었다.

'3급 을류 임용고시 합격자를 발표 행정직 서울.

최인기, 최병호, 안영수, 현명관.

첫 줄을 얼마 읽지도 않아 손가락이 딱 멈췄다. 현명관이 3급 사무관이 된 것이다.

당시 행정고시는 2차 시험이 없었고 바로 임용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현명관은 그 즉시 신분이 바뀌었다.

당시 사무관은 지방에 내려가면 군수였다. 현명관은 기사를 보고 또 봤다. 날짜도 다시 확인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합격이었다. 7면의 헤드라인처럼 그는 돌아와서 이겼다.

'아니 이렇게 쉽게, 드디어 합격이란 걸 하다니…

현명관은 생각했다.

비록 사법시험은 아니지만 이것도 엄연한 등과였고 급제였다. 고생한 아내와 제주의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기쁨을 함께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역시 이름대로 살게 되는가?”

마음의 속성은 텅 비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어서 허공 같은 상태가 되면 거기에 의로움과 우주의 이치가 찾아와 머문다.

마음의 속성은 풍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풍족하다면 물욕이 들어오지 못한다.

心不可不虛 虛則義理來居
심불가불허 허즉의리내거
心不可不實 實則物慾不入
심불가불실 실즉물욕불입    (채근담 / 前集 第75章)

채근담의 저자는 도인이었다. 그는 불교의 공(空) 사상과 노자의 사상을 두루두루 책에 펼쳐 놓고 있는데 이 구절은 그가 마음의 속성을 관찰한 대목이다.

우리 마음의 속성은 본래 그 흔적과 위치를 찾지 못하는 텅 비고 허하다.

순간순간 잡념에 물들어 우리가 그 속성을 모를 뿐이지 원래는 진공이며 허한 것이라고 한다.

홍자성 선생은 이 상태가 되면 자연히 우주의 이치와 세상의 의로움이 거(居)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 상태는 이미 스스로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단계라서 세상의 물욕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참으로 위대하며 간결한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내가 고시에 실패하고 온갖 괴로움에 지쳐 있을 때와 재도전 후 합격했을 때 마음을 되돌아보면 위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마음이 본래대로 텅 빈 상태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은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명관(明官)이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는 불신으로, 가정 형편은 더욱 참을 수 없는 굴레로 바뀌며 급기야 출생 자체를 저주하는 방향까지 치닫고 만다.

반대로 허(虛)한 상태로 마음이 차분해지면 우주의 이치[理]에 부합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서 생활의 불만이나 부정적 생각은 줄어들고 작은 행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언제나 진흙탕 길이라 장화를 신지 않으면 다니기 힘들었던 서울 전농동 생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악다구니 치는 윗집 아저씨와 아랫집 아주머니의 풍경에서도, 처자식의 단칸방 고생에도 담담해진다.

그리고 동네 사람과 TV 시청만 함께 해도 행복에 젖어 웃음 짓는다.

죽어라 욕심에 가득 차서 매달렸던 사법시험은 줄줄이 낙방기만 마음을 비운 채 별생각 없이 봤던 행정고시는 단번에 턱 붙었다.

결국 텅 빈 허한 마음이 본바탕에 가까워질 때 능력도 나오고 운도 열리고 자연스레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문득 흑백 TV'를 보면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그 옛날 권투 중계를 하던 해설자는 이렇게 달했다.

“아...... 어깨에 힘을 다야 합니다. 가볍게 칠 때 KO도 나와요”

이것은 분명 진리다.

설국열차

2013년 5월 1일 개봉한 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우리 세상이 계급 사회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꼬리 칸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 특등실에서 귀족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대비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살아온 인생이야말로 꼬리 칸에서 계속 전진하며 특등실을 향해 달려간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서울 전농동은 꼬리 칸이었다. 거기서 행시에 합격하며 나는 고리 칸에서 한 칸 앞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오직 출세만을 위해 달려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몹시도 가난했고 어떻게 하면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사회 전체가 노력하던 시기였다.

고시에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뿐 아니라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뭔가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고시에 합격한 젊은이들은 엄청난 자부심과 도전정신으로 나라의 발전을 이끌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나 역시 그랬었다.

“우리가 경제 개발을 이룩하자 청렴하고 깨끗한 공무원이 되자“

행시 합격 후 연수를 함께 받은 동료들의 생각이 다 이러했다.

스물일곱 살에 벅찬 꿈을 안고 처음 부임한 곳은 부산시청 인사과 고과 계장이었다.

1년의 수습 기간을 마치고 처음 직책을 얻어 본격적인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연수 때 품었던 뜻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바로 알게 되었다.

또한 공무원이 생각보다. 멋지지 않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여 믿음과 불신을 수없이 오간다. 희망과 좌절도 그렇고 자부심과 자괴감도 그렇다.

나라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은 곧바로 “이런 한심한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하는 낙담으로 바뀌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방자치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내무부가 정하고 지방 관청에 하달하면 그 정책이 현지에 맞는지 안 맞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실천하기 바빴다.

얼마나 불합리한 지시가 많았겠는가? 게다가 27살 어린 나이에 높은 직위를 얻었으니, 하급 공무원부터 시작해서 잔뼈가 굵은 10살 위 시청 터줏대감 공무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분들과 화합하며 지휘 책임이 있는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하려니 매일 서류를 보자기에 싸 들고 집에 와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결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시는 끝났으나 3급 공무원의 일상은 고시생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다행히 직급과 나이의 괴리에서 오는 불협화음은 노력으로 하나 둘 좋아졌고, 바쁜 일상은 꿈틀대는 불만을 잠재우며 1년이라는 시간을 후딱 지나가게 했다.

그러나 부산 시청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시험'에 들게 되면서 큰 갈등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가 직장을 다니며 성장하는 이유는 이런저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소신을 시험받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찾아온 공무원 생활의 첫 번째 시험은 윗사람의 청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임시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일은 한 사람의 평생 직업을 좌우하고, 나아가 한 가정의 운명을 가르는 일이기에 청탁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는 고과 계장이었기 때문에 비정규직 공무원의 정규직 전환 필기시험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일을 했다.

일에 충실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빗나갔고 수없는 청탁이 상사를 통해 쏟아졌다.

"현계장! 김○○씨 있죠? 그 사람은 꼭 합격시키세요.

"네?"

“아 이 사람... 참, 뭔 얘긴지 몰라요."

“이런 식의 청탁으로 공무원을 뽑으면 뭐 하러 시험을 치나요? 원리 원칙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청탁이라니… 현계장! 말 함부로 하지 마소. 당신 고시 출신이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우습게 보이나 본데, 현계장보다 수십 년 더 공무원 생활한 사람들이고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야!"

이런 식의 압박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밀려들어 왔다.

국장님, 시장님의 친척, 국회의원 처가댁, 경찰청장의 누구, 중앙정보부에서 내려온 특급 청탁, 심지어 방송이나 신문사에서도 압력이 들어왔다.

비정규직 공무원들은 직급 전환 시험을 치기 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빽을 동원하여 내게 압력을 넣었다.

꼬리 칸에만 있었으면 몰랐을,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연양갱을 보자 입맛이 떨어졌고, 공무원 생활에 회의가 몰려왔다.

이런 부정한 방법과 타협하기 위해 내가 엉덩이에 못이 박히도록 공부를 하고, 물질하는 어머니의 등골을 뽑아서 시험 준비를 했단 말인가?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고 속에선 열불이 올라왔다. 며칠 고민을 한끝에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상사와의 인간관계, 승진 등을 포기하고 소신대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예정대로 직급 전환 대상자들은 필기시험을 치렀다. 직급 전환필기시험을 마치자마자 나는 시험지를 걷으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시험지 상단의 수험번호와 이름을 잘라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시험지 채점자 전원을 부산의 한 호텔에 감금시키고 채점을 한 후, 오직 필기시험 점수를 기준으로 합격자를 전격 발표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고시 출신자의 자존심일 수도 있었겠으나 아마도 원리원칙을 지켰던 이유는 청탁을 받아들여 윗사람들의 뜻대로 해주었을 때 그 불편한 마음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스물여덟 살 피도 안 마른 젊은 계장의 돌발 행동은 부산 시청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권력 기관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공정한 단 한 번의 합격자 발표는 신문, 방송, 중앙정보부, 경찰 등을 모두 적으로 만들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가 싫어 힘들게 육지로 나왔는데, 또 다른 장벽이 나를 외딴섬에 가두고 말았다. 나는 왕따가 되었다.

점점 부산 시청에 정이 떨어졌다.

뜻밖의 행운은 불행으로…

가뜩이나 공무원 생활이 진취적이지 못하고 따분하다고 느끼던 차에, 상사는 물론 각종 기관들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고 욕까지 먹으니,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렵게 붙은 시험이고 가정이 있으며 무엇보다 제주에서는 생계 때문에 아직도 노동을 감수하는 노모가 있다. 경솔한 행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제주의 친인척과 이웃들은 아들이 서울법대 나오고 고시까지 했으니 “이제 살림이 확 피겠구나!” 짐작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중노동을 감당할 수 없어서 해녀 일이 생선 장사로 바뀌었을 뿐, 수입이 변변치 않은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여전히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공무원이 좀 살만 하지만 1967년, 1968년 당시는 그야말로 박봉 그 자체였다.

이런저런 사정에 그만두지도 못하고 억지로 공무원 생활을 이어가던 차, 고시 1년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이 날아왔다.

"현 계장? 납니다."

"아이고 어쩐 일이십니까? 전화를 다 주시고?"

현 계장 혹시 서울에 올라와서 감사관 해 볼 생각 없어요?

여기 중앙부서에서 대대적으로 고시 출신자들을 모아 조직을 쇄신하려나 본데, 지금 감사원에도 사람을 뽑고 있어요. 한번 지원해 보지 그래요?"

이게 웬일인가. 감사원이라니, 가슴이 뛰는 이야기였다. 처음 행시에 합격하고 연수를 받으며 부산 중구청에 배속되어 일을 배울 때였다.

감사원의 감사관들이 들이닥쳐서 직급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감사하고 잘잘못을 밝혀내 문제를 바로잡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때 감사원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원한다고 갈 수 있는 부서가 아니었기에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드렸었다.

그런데 동경했던 그곳에 갈 기회를 하늘이 주시다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즉시 감사원에 지원을 했고 곧바로 서울 감사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고시파들이 모여 있으니 동료의식이 생기고 외롭지 않았다.

의기투합도 할 수 있고 진취적이며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매일 이어지는 야근도, 머리 터지게 법을 공부하는 시간도 견딜 만했다.

그러나 감사원에 왔다는 행운의 기쁨도 잠시, 의욕 넘치던 나를 점점 옥죄는 답답함이 엄습해 왔다. 감사원은 내가 생각하던 '부정'을 바로잡는 곳이 아니었다.

소위 큰 사건을 밝혀내고도 권력 기관들 눈치 보기에 급급한 나머지, 비리의 근본은 손도 못 댄 채 힘없는 하급직들만 쳐내는 나약한 곳이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당시 감사원은 부정을 눈감아주고 나아가 부당함을 합리화시켜주며, 또 그런 일에 능숙해지면 개인의 이득까지 취할 수 있는 기회의 관청이었다. 당시 감사원의 문화나 의식은 그랬다.

게다가 적당히 눈치나 보면서 승진하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것은 혈기 넘치는 우리 고시파들이 꿈꾸던 정의로운 조직 문화가 아니었다.

"아니 뭔가 큰일을 할 것처럼 전국에서 고시파를 모아 놓더니 이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요. 자, 한잔 받아요.” 울분을 토하는 동기 고시파 한 명을 위로하며 나는 반주를 따라 주었다.

"현명관씨가 그랬다면서요? 지난번 국세청 건 주의 조치는 너무 가볍다. 이건 징계감이라고 메모 올렸다면서요?

"네, 그랬죠. 아무 이상 없다고 하더군요."

“나 참, 그린 인간이 승진을 하고 장을 하니 감사원이 이 꼴입니다. 그건 명관씨 말이 맞죠. 이건 뭔가 있어 있다고, 반대로, 주의 줄 사람은 과하게 징계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감사 결과는 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큰 문제에요. 이런 조직을 정부 어느 부처가 신뢰하겠어요?"

다른 동료도 말을 거들었다. 신정 연휴에 나와서 고시파들이, 쌓이고 쌓인 울분을 풀자고 만든 회식 자리였다.

술이 들어가고 성토가 시작되자, 30대 초반의 고시파 청년들은 당장 조직을 뜯어고쳐야한다며 과격한 혁명가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이게 다, 물러터진 원장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감사원장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오! 그거 멋진 생각이오. 원장이고 뭐고 할 말은 해야지, 구분 자꾸 조직을 물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혁명을 주창하던 고시파들은 술도 한두 잔 했겠다. 끝내 결의를 실천에 옮기고 말았다.

명절 인사를 핑계로 소주 한 병을 사서 후암동 감사원장 집으로 향하며 원장 비서에게 미팅을 신청했다.

그러나 신정 연휴 대낮에 갑자기 미팅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미팅은 보기 좋게 거절당하자, 의기 높은 고시파 청년들은 감사원장 집대문을 발로 차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원장님! 쪽팔린 감사원의 문제점을 알긴 아십니까? 나와서 저희 얘기, 들어나 보시죠!"

그러나, 감사원 고시파들의 피 끓는 객기로 결성된 혁명 원정대는 의로운 뜻을 전달하기는커녕 감사원장 그림자도 구경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문제는 연휴가 끝나고 터졌다.

사무총장이 난동부린 사람들을 적발하라는 지시를 각국 국장들에게 하달했다.

또한 이런 하극상이 벌어진 것에 대해 공무원 기강 확립을 위해서라도 관련자들을 강력히 문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고시파들이 술 먹고 한실수니 한 번은 봐주자는 쪽으로 내부 의견이 모아지면서 사건은 시말서를 받는 것으로 겨우 일단락되었다.

나를 포함한 그날 객기를 부린 고시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경하던 곳에 와서도 여전히 마음은 불행했고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분명 과거보다 좋은 위치임에도 불만은 커져만 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자신이 꿈꾸던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는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보다 더 불행해 지나 보다.

도대체, 언제 제대로 감사관 역할을 하며 국가 개혁의 선봉에 설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보람 있고 폼 나는 시절은 올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자 부산시청 때 가슴을 짓눌렀던 갑갑함이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

개혁은 피를 부르고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 갑갑함을 희망으로 바꿔주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출근해서 신문을 뒤적이다 눈이 번쩍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동아일보 1971.7.27

평북 삭주 출신 육사8기 대구 법대 졸업 46살 젊은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법학도이기도 한 그는 육사 8기로 5.16 혁명에 가담한 혁명 주체세력의 핵심멤버이며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 내각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중략)지난 총선 때 전국구 물망에도 올랐던 그는 “국회의원보다는 행정부 쪽이 더 적격”이라는 고위층의 배려 때문에 벌써부터 감사원장에 내정되어 있었다는 애기.

1971년 7월, 나는 실세 감사원장의 내정 소식을 읽으며 마음속에서 의욕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군사정권 시절이라 육사 출신이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육사 8기인 사람이 감사원장으로 온다니, 이것은 감사원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대통령의 의지였다.

'이제는 뭔가 달라질 거야.'

7월 30일, 국회 동의를 얻어 이석제 감사원장이 임명되었다. 감사원 내부에서는 신임 원장은 전과 다른 강력한 감사원을 만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역시 부임하자마자 새로운 감사원장은 놀라운 선언을 하며 조직을 새롭게 만들었고 나 역시 다시 의욕적인 공무원으로 돌변했다.

7월 29일 이석제 신임 감사원장에 대한 국회 임명 동의안 통과

8월 17일 동아일보 인터뷰 “송사리만 잡는 감사 탈피” 이석제 감사원장과의 인터뷰는 공화당 정권이 들어선 후 비록 사람은 달라졌지만 감사원장으로선 8년만의 기자회견이다. 전임 이주일 원장은 재임 칠년이 넘도록 단독이건 공동이건 한 번도 기자회견을 갖지 않았었다. 원장실 문에 항상 회의 중'아니면 '부재'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중략) 신임 이원장에게 소감과 앞으로의 감사 방침을 물었다. “이제 겨우 업무를 파악하고 있는 중이라서…, 당장 무슨 대 개혁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론 산발적인 감사보다 감사역량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렵니다. 동시에 주변만 긁는 소극적인 태도보다 계통적인 감사를 단행하겠습니다. 계통적이란 부정의 연루자를 밑에서부터 위까지 꿰뚫어 모조리 적발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송사리만 잡는 말단지엽 감사는 탈피해야지요. 과감하게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겠습니다.(중략)작년만 해도 청와대비서실, 중앙정보부, 감사원 등의 위법부당사항은 적발된 게 없었다. 끝으로 특수권력기관에 대한 감사강화책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원장은 안경 유리알 너머로 조용히 미소를 머금으며 “앞으로 두고 연구해 보지요”라고 대답했다. -조강환 기자

청와대 비서실, 중앙정보부에 대한 감사까지도 “앞으로 연구해보겠다” 말하는 기사를 읽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까지 건드릴 수 있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는 나를 비롯한 고시파들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젊은 동료들은 세상의 개혁은 반드시 피를 부른다는 것을 몰랐었다.

이석제 신임 원장의 강력한 사정의 칼은 제일 먼저 감사원'으로 향했다.

조직원 300여 명 중 30~40명의 감사관이 옷을 벗고 말았다. 어제까지 웃으며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선후배 동료가 갑자기 짐을 싸고 파직당하고 해임되어 집으로 가야 했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피감 기관으로부터 향응을 받고 관례로 챙겨 오던 용돈이 전부 개혁 대상이 되었고 그중 사안이 중하다고 판단되는 공무원은 그대로 잘리고 말았다.

나는 공무원 생활은 교도소 담장을 걸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광주 농협통계소 감사를 하면서 지금 돈 2천만 원 정도의 횡령 사건을 적발한 적이 있었다.

해당 공무원을 파면 조치했는데 알고 보니 그 공무원의 횡령 이유는 수년간 병원에 입원 중인 어머니의 병수발 때문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그의 아내까지 입원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이었다. 나는 감사 반장으로서 내 일을 했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였다면 과연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돈을 마련했을까? 여기에 갑작스러운 동료들의 징계를 보며 공무원 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공무원은 한 발 잘 못 디디면 바로 교도소로 들어가는 생활이다. 공무원의 월급은 그저 용돈이라 생각하고 다녀야지, 이것을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오직 여기에만 매달리면 결국, 숨통을 터주는 뇌물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나도 월급이 생계 수단의 전부였으니 문제였다. 공무원은 돈 있는 사람이 폼 잡고 하면 좋은 직업이지만 돈 없는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후 집 못 사면 바보

감사관으로서 어느덧 3년을 보내자, 나는 감사 업무에 베테랑이 되어 갔다.

이제 서류를 들추어 보면 어디에 문제가 있고 어디서 돈이 빠져나갔는지 바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쌓은 노하우가신라호텔에서도 요긴하게 쓰였던 것이다. 지방 출장을 가서는 외출이나 외박도 자제하며 최대한 업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한 번은 지방의 토석 채취 관련 부정을 밝혀냈었다. 일종의 특종이었다.

당시는 업자들이 허가된 구역 이상을 함부로 훼손하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 과정에서관계 공무원에 대한 향응과 접대, 뇌물이 살포된 것은 물론이다.

허가된 사항 보다 더 많은 토석을 채취하게 한 담당 공무원을 징계 시키고 원칙대로 처리한다고 통보하자, 해당 관청은 지금 돈 2백만 원 정도를 여관으로 가져와서 통사정을 했다.

징계 감을 무마하고 감사관이 눈 감아 주려면 그 정도의 돈이 들던 시대였다. 물론 거절하고 원칙대로 처리했다. 이후 모든 지방의 골재 채취 인허가 관행은 바뀌었다.

관세청의 큰 비리를 밝혔을 때는 뇌물도 끈질겼다. 현장에서 거절하니 집까지 찾아와서 돈을 주려 했다.

1주일을 그렇게 봐달라고 사정을 하고 그마저도 거절하니, 야밤에 담 너머로 돈뭉치를 던지고 갔다.

지금 돈 1천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거절하고 원칙대로 해당 공무원을 징계 조치시켰다. 내가 이렇게 포청천처럼 활동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겠다.

살벌한 원칙주의자 감사관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니, 자연히 이석제 신임 감사원장은 나에게 기동반(특별반) 반장의 직책을 맡겼다.

신임 원장은 그동안의 감사원 감사에다 새로운 임무를 추가했다. 각종 기관으로부터 취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타깃 감사에 나선 것이다.

이석제 신임 원장은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당사자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주변과 해당 기관의 정보를 집중적으로 수집하여 비리를 발본색원하겠다는, 아주 무시무시한 감사 원칙을 정하고 실천했다.

당장 5개 국으로 이루어진 감사원에 각국의 국장 직속으로 특별반을 신설하고 그 임무를 맡겼다.

3국의 특별반 반장이 되면서 나는 이제야 “이 사회에 뭔가 의미 있는 일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하는 자부심을, 공무원이 된 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1970년대 거리에는 바이크를 탄 교통순경이 많았다. 그들은 교통위반자를 쏜살같이 추격해서 딱지를 떼었다. 문제는 이들이 딱지를 떼기보다, 눈 감아 달라며 건네는 교통 위반자들의 돈을 더 많이 챙겼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길 교통순경 1년하고 집을 못 사면 바보'라고 할 정도였으니 밥벌이 하는 운전자들 원성이 오죽했겠는가?

이런 소문이 감사원에도 들렸고 원장은 특별 명령을 내려 돈 뜯어 가는 교통경찰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별반 반장인 나는 즉각 출동하여 교통경찰들이 많이 모인다는, 소위 목 좋은 곳으로 달려가 잠복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우리말 속담은 진리다. 그날따라 3~4시간이 지나도 교통 위반 차량이 없었고 근처에 있던 바이크 교통순경도 허탕을 치고 있었다.

날은 더운데 땡 볕을 받으며, 육교 위에서 사거리 한 귀퉁이에 숨어 있는 교통경찰을 감시하는 일은 고욕이었다.

땀이 줄기차게 겨드랑이를 타고 흘러 양복까지 적시는 지경이 되었을 때 트럭 한 대가 신호를 위반하고 사거리를 통과했다.

경관은 곧바로 사이렌을 울리고 바이크를 몰고 달려갔고, 나와 특별반원도 육교를 내려와 교통순경을 뒤쫓았다.

멀리서 경관과 운전수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때만큼 경찰이 돈을 받아주길 바라던 때가 없었다.

예상대로 운전수는 경관에게 지폐를 꺼내 주었고 경관은 주변을 살피더니 지폐를 받자마자 긴 가죽 장화윗부분에 넣는 것이 아닌가!

현장을 확인한 우리들은 죽어라 경관에게 달려갔다. 우리는 감사원 특별반 신분증을 교통경찰에게 마패처럼 보여주고 경관의 신분증을 요구했다.

교통경찰은 처음에 돈 받은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지만 내가 왼쪽 장화 윗부분을 보자고 하자 급하게 태도를 바꾸어 한 번만 봐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우리 특별반은 그렇게 교통경찰의 비리 몇 건을 보기 좋게 잡아내면서 함부로 돈 뜯다가는 낭패 본다는 것을 을지로 일대의 교통경찰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제보가 감사원으로 들어왔고 나와 특별반원은 상사로부터 긴급 명령서를 받은 채 무작정 열차에 몸을 싣고 경상도로 향했다. 특별기동반의 출동은 늘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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