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9)이건희 회장과 2라운드
[현명관 칼럼](9)이건희 회장과 2라운드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5.2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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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칼럼, '제1장 얇은 얼음을 밝다'라는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 '제2장 유서를 품고(삼성시계 이야기)'가 하나의 섹션으로 전개됐다. 책에서는 62페이지부터 80페이지까지 무려 18페이지나 그려졌는데 글을 읽다보면 전혀 많은 분량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현명관 회장이 만년 적자인 삼성시계로 발령받아 제조도 중요하지만, 판매가 더 중요한 사실을 알고 브랜드 업하는 대처 방안 등이 흥미롭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직장에서 좌천이나, 강등, 자리 이동 등을 당하면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사직하는 일이 종종 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빌리자면 어느 신발 회사에서 두 직원에게 아프리카에서 신발을 팔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두 직원이 아프리카에 가보니 한 사람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기는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신발을 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낙심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직원은 감격하는 목소리로 "사장님, 여기는 신발을 아무도 안 신어서 불루오션 시장입니다."하고 희망을 전했다는 것.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모든 현상은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방향으로 간다.

현명관 회장이 "누가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있었어?"라는 이건희 회장의 말을 명언으로 여기고 직장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과감하게 드라이브를 건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경영방식을 직접 추구하며 회장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앞으로 밀고 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그냥 월급만 받고 나갈 것인가? 월급을 줄이며 고통을 감수하며 성과를 낼 것인가.
인간은 이익이라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

99개를 가진 사람이 1이라는 것에 욕심을 더해 100을 채우려는 속성이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손해를 볼 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것은 요즘 시대에도 필요한 것이다.

지금은 서로가 살기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 결코 손해를 보려고 안하지만 손해라는 것은 양심이다. 리더이기에 손해를 보는 것이다. '리더는 군자'라는 말이 이익과 손해를 보는 행동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현명관의 자서전 ‘위대한 거래’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이익을 보고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처세술을 말하고 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나타나는 그 다음의 액션이 중요하다.

현명관 회장이 삼성에서 겪은 이야기를 가슴에 박힐 때까지 몇 번 읽다보면 느낄 수 있다. 재벌들은 어떻게 부하직원들을 컨트롤 하는지.

5월이 마무리 되고 있는 지금, 더욱 뜨겁게 다가오는 6월처럼 현명관 칼럼은 스토리가 뜨거워지고 있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삼성 그룹에는 VIP들을 영접하는 승지원이라는 영빈관이 있다. 손님을 맞을 때면 승지원은 이태원 거리처럼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사장단 회의가 열리면 숨 막히는 공포로 승지원의 공기는 싸늘해졌고, 마치 태종이나 세조가 진행하는 공포의 어전회의가 승지원의 화려한 단청 아래 재현되는 듯했다.

"오늘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나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 제발…."

외양은 만찬 형태지만 승지원 회의는 그룹의 대소사와 중요 사안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질문과 계열사 사장의 대답이 오고 가는, 피 튀기는 국문(鞠問) 현장 같았다. 사극에 가끔 등장하는 사헌부의 국문 현장은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고문 현장인데, 그런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니 사장들이 입맛이 돌리 없었다. 누구 하나 체해서 병원에 실려 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오늘은 누가 타깃이 될까? 오늘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식사를 하는 사장들의 머릿속은 똑같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며 엄숙한 침묵이 십여 분간 이어졌다.

드디어 이건희 회장의 가벼운 질문이 시작되었다. 순조롭다. 오늘 회장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다행이다. 사장들이 이런 생각을 하며 차츰 음식 맛을 느껴갈 무렵이었다. 삼성시계 사장인 현명관 차례가 되었다.

“회사의 경영자가 되니 느낌이 어떤가요? 시계에 가 보니 경영하면서 뭐가 가장 어렵던가요?"

“회사 경영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방향을 제시하고 전략을 세우고 실천은 임직원들이 하는 건데, 이걸 서로 공감하고 이해시켜야 하고……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이것이 제일 고민이됩니다.”

사장들이 식사를 하다 말고 현명관을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조용히 넘어가지……."

"엉뚱한 말을 하네."

그런 표정으로 사장들은 현명관을 바라보았다.

"회장 말에 걸고 넘어지다니. 오늘 편하게 넘어가긴 다 틀렸군."

여기저기서 보이지 않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경영을 사장이 하지 임원이 합니까? 거 뭔 소리를 하는 거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설득이 필요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설득이라니… 뭘 누구를?"

신라호텔에서 삼성시계로 좌천된 현명관이 사장들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삼성시계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는 바로 세이코와의 원활한 기술 이전과 불공정거래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금기. 역린, 불경죄. 항명. 이 모든 것을 합친 말을 지금 현명관이 했다. 삼성시계 설립은 이건희 회장의 작품이었다.

초정밀 기술 습득을 위해 세이코와 합작하고 일본인을 부사장에 앉혔다. 이건희 회장은 사장과 부사장이 경영에 이견이 생길 때마다 일본인 부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때론 삼성시계 사장의 목을 날렸다. 그러길 수차례, 이제 어떤 임원이나 새로 온 사장도 일본 세이코와 관련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현명관이 세이코의 기술 이전과 거래 관계에 문제가 많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답이 없다고, 신성한 궁궐의 어전회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역린을 건드린 놈은 용에게 물려 죽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사표 품고 다닌다더니 진짠가 봐?"

"이로써 현명관 아웃!"

사장들은 마음속으로 수천 마디 욕설과 불평을 말하고 있었지만 승지원의 큰 홀은 음식 먹는 소리도 사라진 채 이건희 회장의 반응을 기다렸다. 약 30 초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3분 이상으로 느껴지는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이건희 회장의 둥그런 눈, 굳은 표정, 식사를 하다 말고 멈춘 숟가락, 그 다음은 불호령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있었어?"

회장의 반응은 너무도 의외였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고 현명관은 이로써 완전히 찍혔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비서실장 전화를 받았을 때까지도 현명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글쎄요. 제 느낌은 그게 아니던데요. 현사장님을 좋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수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부나 위로의 말은 아니었다. 비서실장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할 자리도 아니고 성격도 못되었다.

"그런가요?"

전화를 끊고 현명관은 생각에 잠겼다.

"세이코와의 관계를 정상화시키자."

앞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뒤로 물러설 것을 생각하라.
그리하면 꼼짝 못하고 당하는 재난을 거의 피할 것이요.
일을 시작할 때는 먼저 손을 떼는 상황도 그려보라.
그리하면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위기(기호지위)를
조금은 멀리할 수 있다.

진보처 변사퇴보 서면촉번지화
進步處 便思退步 庶免觸藩之禍
착수시 선도방수 재탈기호지위
著手時 先圖放手 纔脫騎虎之危

             -. 채근담 / 後集 第 29章

희망에 부풀어 사업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채근담은 말한다. 모든 사업과 도전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기호지위(騎虎之危)가 그것인데 이런 위험을 조금은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시작할 때 다 던진다는 생각으로 담담해져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삼성시계 경영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직장인에게 사표는 유서다. 나는 사표를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회사를 다녔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

평소와 똑같이 신라호텔에 출근했던 어느 날 나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호텔 신라에서 보여줬던 그 능력으로 삼성시계를 살려 보쇼.”

이건희 회장의 통보라며 비서실장이 내게 전화를 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보다. 1991년 3월 호텔 신라를 상장시키며 인생 성공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 시기에 삼성시계로 가다니…...

삼성시계는 신라호텔과 비교도 안 되는 그룹 내 서자 같은 존재였다. 사장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명백한 좌천이었다. 매출액, 영업이익, 자산 등도 초라했지만 무엇보다 삼성시계는 만년 적자 기업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도 살아날 방법이 없는 곳에 발령이 난 것이다.

내게는 "그만두고 애나 봐라." 이렇게 들렸다.

잠시 방황의 시간이 찾아왔다. 직장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순간이었다. 좀체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명예롭게 사표를 던지고 나갈까?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회사에 몸 바친 대가가 이건가? 정치력이 없으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란 말인가?"

삼성시계 첫 출근하던 날,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태평로 사무실을 찾았다. 마음은 복잡했다. 직원들을 만나고, 나보다 복잡한 그들의 눈빛을 보면서 회사의 문제를 하나 둘 느끼기 시작했다.

"저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

직원들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바닥난 의욕과 사기가 느껴졌다. 매번 바뀌는 사장, 끝없는 적자, 구조적으로 세이코에게 지속적으로 로열티를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 한국인 사장보다 일본인 부사장의 권력이 커서 직원들은 거기에 줄을 서고 있었다.

형편없는 매출과 적자에도 불구하고 그룹 공채로 들어온 직원들의 월급은 몇 백만 원짜리 물건을 파는 타 계열사와 같았다. 몇 만원짜리 시계를 팔면서 사장실 크기도 똑같았다.

설립된 지 3년, 삼성 시계는 자본 잠식이 다 되어서 이미 부도가 났어야 할 상황이었다. 실제로 업무 보고를 받으며 이런 사실들을 접하니 마음이 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겹겹이 산적한 문제들을 보니 경영자로서 오기도 발동했다.

"어차피 그만둘 거, 벼랑 끝에 섰으니 본때는 보여주고 그만두겠어, 2년만 죽도록 해보자!"

상기 본인은 원에 의하여

내가 삼성시계에 부임하는 날 사무실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작성한 서류는 사직서였다. 사직서는 직장인의 유서다. 죽을 각오를 했다.


이름: 현명관
주민등록번호 : 1941XXXX-1XXXXXX주소: 서울 마포구 상수동OO-O 근무부서 : 사장실 직책 : 사장
상기 본인은 원에 의하여 사직을 하고자 합니다.
1991년 12월 15일 현명관 인


몇 자 되지 않는 글자에 12년 삼성 생활이 허무하게 표현되었다.

전날 마신 소주의 영향으로 글씨가 삐뚤거렸다. 몇 장을 망치고 3장 째 좀 맘에 드는 글씨가 나왔다.

돈을 찾고 결재를 할 때 찍던 소중한 도장을 꺼내, 인주를 평소보다 많이, 그리고 정성스럽게 묻혀 선명하게 내 이름 옆에 도장을 찍었다.

부조금 넣듯 사직서를 봉투에 넣고, 그 봉투는 그 순간부터 삼성시계를 퇴사하는 날까지 내 양복 안주머니에 있었다. 한 번은 봉투가 들어있는 걸 깜박하고 양복을 드라이클리닝에 맡겼던 적이 있었다.

집무실에서 주머니에 봉투가 없는 것을 알아챈 후 급하게 전화를 걸어 세탁소 주인에게 봉투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세탁소 주인은 고맙게도 사직서를 챙겨두었고 그 후 그 세탁소는 집을 이사하는 날까지 나의 단골이 되었다.

사직서가 들어있는 양복 외투를 입고 창밖을 보니 착잡하고 복잡한 심경이 몰려왔다.

"이렇게 삼성에서의 인연이 끝나는구나. 그냥 공무원이나 할 걸 고시까지 패스해 놓고 민간 기업에 와서 뭔 고생인지….… 최선은 다하자. 그러나 그 뜻이 어긋나면 언제고 사표를 던지고 나오자."

이런 생각으로 부임 후 첫 임원 회의를 소집했다.

일단 사직서를 마음에 품고 실제로 들고 다니게 되자 평소보다 더, 내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삼성시계의 실세 세이코 측 일본인 부사장을 대하거나 그 외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는 할 말을 하고 눈치를 보지 않았다.

개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많이 안 드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뜯어고치는 지시를 내렸고 실천했다.

"부도 상황인데 왜 이렇게 사장실이 큽니까? 우리가 태평로 본관에 있는게거 맞나요?"

임원 회의에 모인 간부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사장님, 그룹 공채로 들어은 직원들의 사기도 있고 이건희님이 그렇게 시작을 했던 겁니다. 초일류를 추구하는 삼성의 자존심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당히 대답하는 간부에게 나는 다시 질문했다.

“직원 월급도 그래서 똑같이 주는 건가요?"

"삼성 그룹은 단일 임금 체계를 갖고 있고 그것 때문에 어느 열사로 발령이 나도, 직원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닐까요? 삼성 시계도 마찬가지죠."

“허허 그럼 이렇게 계속 자본을 잠식하자는 말이요?"

나의 마지막 질문에 임원들은 말이 없었다.

2, 3만 원짜리 시계를 파는 곳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직원들의 임금이 같고, 사장 월급도 잘나가는 제일모직 등 다른 그룹과 동일하다니… 구멍도 이런 구멍이 없었다.

우리말에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정말 싫어한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전임 사장들도 다 알고 있었으나 철벽같은 시스템을 건드리지를 못하고 순응했으며 순응의 결과는 해고였다. 어차피 사표를 품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뻔히 보이는 불명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사장실을 성남으로 옮길 준비를 하시오. 공장도 창원에서 성남으로 옮기겠습니다. 나가는 돈을 줄여야 돈을 벌지…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당시 삼성시계 본사는 태평로, 공장은 창원이었다. 한마디로 새는 돈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이것부터 고쳤다.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한 것이고 이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일이었다.

재고가 쌓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월 만개 생산에서 3천 개로 줄이며 공장도 창원에서 성남으로 옮겼다.

성남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직원은 퇴직금에 위로금을 추가로 지급하여 명예퇴직 시키거나 판매 사원으로 전환했다. 생산보다 판매에 주력해야 삼성시계는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하지 않았었다.

이런 특단의 조치로 임직원들은 난리가 났다.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신라호텔에서 들은 욕의 열 배를 개혁 한 달 만에 듣고 살았다.

그러나 전과 달리 외롭거나 두렵지 않았다. 내 양복에는 늘 사직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채근담이 말하는 손 뗄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 어떤 최악도 두렵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용감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용기는 서서히 보상을 받았다. 쓰디쓴 풀뿌리를 씹는 심정으로 나 스스로도 성남 공장 옆으로 사장실을 옮겨 임대료를 줄였다. 사장의 이런 모습을 보자, 마음을 여는 직원들도 차츰 생겨났다.

두 번째 마른하늘의 날벼락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발령을 받은 나였지만 내가 삼성시계에서 한 구조 조정은 임직원들에게 두 번째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되었다. 충격의 불꽃이 튀었고 그것은 회사 회생의 빛이 되었다. 그러나 날벼락 같은 개혁을 용감하게 진행했어도 진정으로 큰 개혁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바로 세이코와의 관계였다.

삼성시계의 적자 원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이코와의 불공정한 거래였다. 시계 무브먼트도 불합리한 가격에 구입했고 생산도 우리가 하는데 기술료다 뭐다 해서 세이코에 지급하는 돈이 너무 컸다.

세이코와 기술제휴를 하게 된 계기는 이건희 회장이 초정밀 가공 기술을 삼성이 빨리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였다. 일본인 기술자가 하라는 대로 해라, 일본인 부사장의 이야기는 가능한 한 수용해라 등 사훈처럼 회장의 지시가 삼성시계와 세이코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세이코 출신 삼성시계 일본인 부사장의 파워는 한명회를 능가했었다.

물론 사업 초기 세이코를 끌어들인 회장의 판단은 빠르고 정확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세이코와의 구체적인 기술도입 계약이나 부품(무브먼트) 구입 계약 등에 있어서 불평등하고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이 있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상황이었으나 누구도 이 말을 회장에게 할 수 없었다.

"나카무라가(가명) 뭐라 하던 이거 회장님께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이잖아요?"

"사장님, 지금까지 저희들은 사장님의 개혁을 지켜보며 힘들지만 따랐습니다. 맞는 말씀이지만 이번은 참으셨으면 합니다. 세이코 측과 회장님은 일본어로 사담을 나누는 사이고, 이건희 회장님이 시계 산업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의욕적으로 추진해 오신 사업이니까요. 사실 세이코가 없었으면 지금의 삼성시계는 없었겠죠.”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회장님도 알아야죠.” 나는 화가 났다.

승지원에서 사장단 회의가 있던 날 나는 소신을 말했다. 품속의 사직서가 있어서 그런 용기가 났었나 보다. 이건희 회장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누가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있었어?"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명언이다. 분명 기분이 상했을 터인데, 그 많은 사장들이 다 알고 있는, 자신의 업적을 폄훼한다고 볼 수도 있는 발언을 듣고도, 그는 짧은 순간 현명하고도 냉정한 판단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해 주는 사장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추진한 일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달라졌으면 바꿔야 하는데, 왕이 한번 내린 명령을 스스로 뒤엎기는 어렵다. 그룹 전체를 이끌어 가는 입장에서 손바닥 뒤집는 잦은 명령의 수정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누군가 강하게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로 고언을 해주면 왕은 그 핑계를 대고 지시를 수정할 수 있다. 이것이 승지원에서 벌어진 그날의 진실이 아닌가 한다.

두 번째 날벼락은 세이코와 관계를 청산하고 적자 구조를 탈피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제는 고객 서비스로 옮겨갈 차례였다.

K.A.P.P. A 카파!

최진실, 이상우 커플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당시 최고의 가수 이상우와 최고의 배우가 데이트를 통해 만난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최진실 때문에 화가 난 이상우, 그러나 '진실'을 보자 이내 마음이 풀리고 두 청춘은 데이트를 한다.

그렇게 데이트를 하더니 결혼까지 한다. 이것이 당시 1992년 삼성시계 카파의 광고 시리즈였다. K.A.P.P.A 카파!를 외치며 졸업 및 입학 선물용 학생 시계를 팔았다. 히트한 광고, 아름다운 슬로건, 소비자들에게 삼성시계는 멋지게 소구하고 비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삼성시계의 첫 고객은 학생이나 학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삼성시계의 첫 번째 고객은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백화점에서 우리 시계를 매입하고 판매하는 판매상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소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쌓은 고객 서비스의 개념을 접목하기 위해 내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그래서 백화점이었다.

“삼성시계는요, 솔직히 하품이에요. 하급품. 그런데 여기 물건을 대주는 직원들은 삼성시계가 최곤 줄 알아요. 어떤 땐 확 물건을 때 버릴까 생각도 하지만 광고가 좋으니까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냥 둡니다. 근데 누구세요?"

신세계 백화점 1층에서 시계를 파는 판매상의 말이었다. 충격을 받았다.

"이거 안 되겠다. 전부 호텔 서비스센터에 집어넣고 교육을 시킬 수도 없고……. 왜 이런 고객 반응을 들으려 하지 않을까?"

나는 내 신분을 밝히고 우리의 부족함을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우리 삼성 시계를 위해 고쳐야 할 점에 대해 강연해 줄 것을 부탁했다.

처음 손사래를 치던 주인은 나의 진심에 마음을 열고 1주일후 삼성시계를 방문했다. 직원들은 고리타분한 특별 교육 시간을 인내심으로 때우자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사장의 훈화가 아닌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가감 없이 강의실에 퍼져나가자 한두 명씩 간부들부터 자세를 고쳐 앉으며 경청하기 시작했다. 신라호텔 만두 사건처럼 우리 자신의 위치를 뼈아프게 지적하는 판매상의 말은 그대로 메스가 되어 직원들의 자존심을 해부해 버렸을 것이다. 디자인, 성능 등 처절한 현실이 그날 모두 까발려졌다.

제조업에는 잘못된 관행이 하나 있다. 전주 제지 때도 느낀 점인데, 열심히 물건은 만들지만 팔리는 것엔 관심이 없는 악습이었다.

"우리 임무는 제품 출하로 끝난다."

아니, 팔리지 않는 물건을 열심히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홍콩산 저가 브랜드에도 밀리는 카파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국내 최고라는 자부심은 매장만 가면 깨지는 상황인데 최진실이 무슨 힘을 발휘하는가? 고객 지향적 경영 마인드를 갖추고 현재 삼성 시계의 수준에 자극을 받으라고 마련한 강연은 제2의 만두 해부 사건이 되어 직원들을 자극시켰다. 자존심 강한 삼성맨들의 가슴에 불이 붙자 한판 붙어 보자는 분위기가 생겼다.

9시를 알려 드립니다

개혁을 하는 사람은 미움만 받는 것이 아니다. 직원들은 '사령탑이 오직 조직의 성과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각종 좋은 아이디어를 눈치 보지 않고 직보한다.

MBC 뉴스데스크 시보 광고를 하자는 아이디어도 그 중 하나였다.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1990년 대 평균 시청률 20%를 육박하는 9시 뉴스 시보는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시보는 1년 단위로 판매하기 때문에 억 단위 돈이 들어가는 광고다. 내가 오기 전에도 삼성 시계 시보는 있었으나 파란 화면에 단순히 시간을 알리는 정도였는데, 1993년 8월 30일 화려한 그래픽을 추가하고 한 편의 광고처럼 만들게 되었다.

[첨단 기술과 시계 예술의 만남.
삼성시계 돌체가 9시를 알려드립니다.
띄리리 띠리 디리 디- 뛰~’]

하며 9시를 알렸던 뉴스데스크 시보를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이는 삼성시계 브랜드를 알리는데 큰 공을 세웠고 예물시계 시장에서 돌체 붐을 일으키는 공을 세웠다.

시보를 광고처럼 만들자는 한 직원의 아이디어가 임원에게까지 올라가고 나에게 보고되어 결정된 마케팅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현장에 서 있는 직원의 판단이 옳다고 믿고 결행했다.

각종 구조조정을 통해 생긴 자금으로 집행했고 매출 향상에 큰 공을 세운 시도가 되었다. 론진 시보를 그대로 집행해 버리자, 현명관은 돈 아끼는 데만 열심인 째째한 사장인 줄 알았던 임직원들이, 각종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 시장 장악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표를 품고 시작한 경영에 재미가 붙었다.

기호지세 -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

신 경영을 선언했던 1993년까지 이건희 회장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해 골 아픈 임무 하나를 주면서 나를 삼성건설 사장으로 보냈다. 그 일을 처리하고 4개월 후 나는 그룹 비서실로 들어가 신경영의 선봉에 섰다. 승지원에서 바른말을 하고 난 지 4년이 지나서였다.

승지원부터 그룹 비서실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간은 기호지위였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얼마나 위험했던가. 물리거나 떨어지면 바로 죽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사표를 품고 살았으니 사실은 스스로 위험스러운 상향을 자초한 것이지만, 그것이 나를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먼저, 소중한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는 상황을 그려 본다면, 떨어리는 위기를 조금은 피할 수 있다는 채근담의 말 그대로였다. 그러면 기호지위(騎虎之危)는 기호지세(騎虎之勢)가 된다.

◆현명관의 21세기 채근담果根譚

한번쯤 직장인의 유서, 사직서를 품고 다녀 보아라.
용감해지고 담백해진다.
그것은 호랑이를 올라타는 행위지만
사람들은 당신을 호랑이로 바라보고 굴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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