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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관 칼럼](28) 뼈아픈 지적
[현명관 칼럼](28) 뼈아픈 지적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10.09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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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지난 번 칼럼에 이어 이번에도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찬가지로 올해 우리나라 정국도 대선으로 잠식된 것처럼 모든 이유가 대선으로 향하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서로 물리고 물리는 양상으로 매일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국민들은 원하고 있다. 사우지 말고 그냥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는 길만 만들라고.

그러나, 배부르게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누구나 쉽게 경제대통령, 경제도지사라고 외치는 것보다 묵묵하게 동네 거리를 청소하는 게 더 아름답다.

현명관 회장이 선거에 나갔을 때 온라인에 대해 홍보 등 선거운동이 미약함을 느껴 이 쪽으로 많은 할애를 했지만 석패했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선거였다.

선거에 지면 모든 것은 출마자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하나가 귀에 거슬려도 자신이 선수로 나갔기 때문에 골을 넣어 승리를 하지 않는 이상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앞으로 도지사 선거에 나오련느 출마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면서 책임은 자신이 지는 것이다. 자신이 상품이 안되고 참모 등에 탓하면 그 선수는 환영받지 못하고 다음에도 선거에 나가도 같이 일을 못한다.

 

본문 내용이 길다. 많은 관심을 갖고 음미하면서 한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냥 그 사람이 그렇게 선택했다는 것은 그 사람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잊지말고 이번 칼럼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현명관 칼럼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스스로 터득해야 할 것이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국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현명관은 경선을 치를 예정이었던 김태환 현직 지사의 선거 참모를 빼올 결심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2006년 1월 27일 한나라당에서 현명관을 영입하자, 한 달 후 김태환 지사는 한나라당 탈당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었다.

현명관이 멘토 A의 조언을 듣고도 그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불난 집에 부채질할 수 없어서였다. 최소한의 상도의는 지킨다는 순진한 생각에서였지만 실제로 현명관이 오라고 한들, 지지율 1등 후보자의 참모가 3등 후보에게 올 이유도 없었다. 현명관은 사람을 빼오는 대신, 조언을 듣고 그 조언을 실천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전영해 디지털위원장과 조심스럽게 접선을 시도했다.

2월 초 어느 날, 그녀는 초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은사는 오남두 전 제주도 교육감과 친했는데 갑자기 교육감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녀는 교육감 사무실로 들어서며 은사에게 인사하고 교육감에게 명함을 건네다가, 순간 놀라고 말았다. 교육감옆에 현명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언 고슬링, 조지 클루니 주연의 2011년 할리우드 영화 '킹메이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지 클루니 측 참모가 상대 후보선거본부장의 전화를 받고 만나는 장면인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어떠한 거래도 없었음에도 라이언 고슬링은 한 번에 조지 클루니한테 잘린다. 선거판은 이런 곳이다. 한나라당에 입당해서 자신이 모시던 현직 지사가 반발하여 탈당을 고려 중인데, 경쟁 후보자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우리 선거 운동의 문제점이 뭔지 이야기해주심 좋겠습니다.”

현명관은 처음으로 전영해 한나라당 디지털위원장에게 부탁을 했다. 디지털위원장은 당시 뜨고 있던 온라인 홍보와 기존 언론 홍보를 총괄하는 자리였기에, 현명관은 자신의 홍보 문제에 대해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만남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라 판단하고 간단히 몇 가지 사항만 지적하는 선에서 이 만남을 서둘러 정리하고 싶었다.

"언론 대응이 너무 어설퍼요. 계속 다른 후보들이 공격을 하잖아요? 특히 입당 후 오마이뉴스에서 '한나라당 입당이 삼성의 뜻이냐'는 등 공격적으로 나왔는데 오마이가 반론 기회까지 주었는데도 그냥 '절대 아니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삼성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회사다라고 하거든요. 이런 기사를 읽고 누가 회장님 말을 믿겠습니까?” 현명관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삼성은 돌다리도 두드리는 회사고 신중한 회사다. 굳이 나를 한나라당에 입당시켜 현 정권과 척을 둘 일을 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전략이라면 보험으로 열린우리당에도 한 명 집어넣었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도 하면서 영입 대상이었는데, 상대를 약 올리면서까지 무리수를 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뭐이런 인터뷰를 했어야 하지 않나요? 그리고………”

그녀는 현명관이 도지사 후보들 중 한 명이라 쭉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 팀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내친김에 그녀는 보도 자료가 너무 어설프고 미숙하다,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느낌이다 등 잘못된 사례 한두 가지를 더 알려주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현명관은 선거운동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문제점을 전달하고 개선할 것을 지시했다. 자신의 선거운동이 얼마나 아마추어적인지 새삼 깨달으며 앞으로의 대응이 걱정되었다.

"상대방에는 저런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큰일이군"

현명관은 한번 조언을 듣고 나니 선거 캠프의 약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삼고초려三顧草廬

현명관은 겨울이 끝나가는 줄도 모르고 2월을 보냈다. 당내 경선에 이기기 위해 한나라당 책임 당원을 만나고 지지를 호소하다 보니 3월이 되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당내 경선이 문제였다. 4월12일 체육관에서 치르는 한나라당 후보자로 선출되지 못하면 도지사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

4월 5일, 당내 경선을 위한 후보자 토론회를 벌써부터 준비하느라 현명관은 정신이 없었다. 토론회에 들고나갈 논리와 공약을 그대로 지금부터 언론에 말하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4월 5일열리는 CBS 주최 토론회에서 논리와 입심으로 상대를 압도해야 하는데, 현명관은 대기업 사장 이상의 직급으로 17년을 살아온 터라언쟁보다는 지시가 익숙했다. 사무실에서 각종 인터뷰 자료와 토론자료를 읽으며 고민에 빠져있던 그는, 문득 선거 사무실에서 북적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가 마흔 이상 쉰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자신도 65세였지만 선거 실무를 뛸 사람들이 전부 쉰에 가까운 사람들뿐이라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 현명관과 반말로 대화를 주고받아도 하나도 거북하지 않을, 같이 늙어가는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다음 달 후보자가 되어도 힘들게 생겼군, 이를 어쩌냐…."

현명관은 자료를 덮고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조용히 선거사무장을 불렀다.

“사무장님, 다음 달 경선도 중요하지만 도지사 선거에서 떨어지면 한나라당 후보가 되는 게 무슨 소용입니까? 사무장은 지금부터 토론회나 경선은 신경 쓰지 마시고 내가 12일 이후 후보자로 당선되었다 생각하시고 그때 붐을 크게 일으킬 전략을 짜 주세요. 특히 전영해라는 김태환 지사 참모가 있는데, 우리 선거 캠프에 인맥이 있으니 전략 짜는 일 정도는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아 전영해씨요? 아예 이리로 데려오면 안 되나요?"

“그건 본인도 나도 원치 않습니다. 그냥 전략만 받아오면 됩니다. 그건 인간관계 때문에 안 해 줄 수 없을 겁니다. 현경대 의원 아시죠? 현경대 의원이 그 여성의 멘토라는군.”

“알겠습니다.”

그녀는 제주도당에서 한나라당의 유력 도지사 후보이자 현직 지사인 김태환의 선거를 돕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급하게 문자를 확인한다. "전화가 안 돼서 문자드립니다. 꼭 연락 바람 ^^"

다시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되었다. 딸에게서 1통, 현명관 선거 사무실 지인으로부터 2통, 딸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 몇 시에 들어오냐고 딸이 물었다.

"어쩌지……. 오늘도 좀 늦어. 먼저 밥 먹어. 아냐 오늘은 술 안먹어. 또 연락할게. 딸, 사랑해!"

그녀는 이제 난감한 전화를 해야 한다. 잠시 고민이 밀려왔다. 자칫 여기서 실수를 해서 몸담고 있는 현 선거운동 본부에 오해를 사면, 수년을 벼르고 벼른 도의원 공천은 날아간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지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번호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전화 못 받아 죄송합니다."

"아이고 모시기 힘드네. 전 위원 한 번만 도와줘요. 우리 노인네 선거를 너무 몰라. 현 후보는 성산에서 자란 사람인데, 같은 제주도 사람끼리 한번 도와줘요."

"우리 김태환 지사님은 제주 출신 아닌가요?"

“그런가? 아무튼 지난번 일도 있고 한데, 이럴 때 전 위원이 내 얼굴 한번 살려 줘야지."

그녀는 난감하고 난감했다. 전영해는 제주 출신이다.

그녀는 제주인의 특징 중 어려운 부탁을 아주 쉽게 하고, 또 상대도 쉽게 들어주는 점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그 특징이 몹시 싫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 상대 후보를 위해 선거 전략을 짜 달라고 하다니……. 기가 막혔지만 10여 초라는 그녀에겐 장고의 시간이 흐른 후 제주인답게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 대신 일정 한 개만 짜 주는 거예요? 메일 주소 불러주시면 그리로 문서 작성해서 보낼 테니 읽어보시고 해보세요.”

전화를 끊고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제주에 사는 사람은 인맥이 동원되는 부탁을 피할 수 없다. 풍랑이 쳐 부모를 잃거나 집이 없어지면 이웃집을 찾아가 비바람을 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제주인에게 나와 남의 경계는 모호했다. 외지인을 향해 쳐진 울타리는 만리장성처럼 견고하고 끝이 없었으나 그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족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그녀는 신세 진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김태환 지사의 선거 사무소 한편에서 보도 자료를 작성하는 척하면서, 현명관의 첫 일정을 무엇으로 잡을지 5분 동안 고민하고 대충 휘갈겨 타이핑을 했다. 그리고 메일을 보냈다. 메일 말미에는 자신의 이름도 넣지 않았다.

민생의 현장을 가지만 정책 투어라고 이름 붙여 홍보한다.
상대 후보보다 공약의 깊이와 전문성이 돋보이므로
철저히 정책 투어로 포장
첫 번째 현장은….

현명관은 선거사무장이 이 출력해 온 문서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아주 제주 구석구석을 도는 스케줄이군, 사무장 이거 좋은데? 바로 이대로 합시다. 근데 전영해씨는 더는 어렵다는 거죠?"

"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동원해서 겨우 얻어 왔습니다.”

"근데 여기 현장은 전부 전영해씨 인맥들인 거 같은데 우리 쪽에서 안내해 줄 사람은 있나?"

“없죠. 어디 보자….

총 일곱 군데인데 아는 사람이라곤, 1명 정도네요.”

그녀는 자신에게 다시 전화가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전화가 민생투어 현장에 동행해서 안내를 해 달라는 부탁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도지사 후보를 놔두고 경쟁 후보의 일정을 수행까지 해 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정말 아니죠. 날 죽이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내가 이떻게 인내를 해요!"

"아니 전 위원, 그 스케줄을 소화하려면 현지인과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전 위원 말고 우리 쪽에서는 현지인과 아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가본 적도 없는 곳이란 말이야. 이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해 준 것만도 못 한 거지. 그냥 딱 하루만 내 얼굴을 봐서 조용히 안내만 해줘요. 딱 하루야, 하루, 누가 그걸 알아? 따지고 보면 같은 한나라당이잖아요. 딱 하루도 안 돼?"

"어휴 참.…나 이러다 정말 큰일 나요!"

"아니 언제부터 천하의 전영해가 간이 이렇게 쪼그라들었나? 아 그냥 해 줘~."

이럴 때 그녀는 얽히고설킨 지방 생활을 떠나고 싶었다. 특히 좁디좁은 제주는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고 아무도 모르는 도시의 빌딩 숲으로, 이 편한 세상 같은 아파트에서 숨어 살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거부했건만, 3일 후 그녀는 제주시 인력 시장에서 현명관을 안내하고 있었다. 경쟁 후보자인 현명관을 이롭게 하는 일은 자칫 그녀의 입지를 좁힐 수도 있었지만 행사 하루 연결하는 게 뭔 대수겠냐라는 그녀 특유의 낙천적인 배짱이 덜컥 안내까지 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오전 내내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전영해는 무심코 인터넷을 열어 보았다. 어제 민생투어가 어떻게 보도되었는지 직업 정신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잘 나왔네."

비록 상대 후보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 마음에 들어, 피로를 날려버리는 잔잔한 만족감이 기분 좋았다. 그러나 클릭을 몇 개 더 하면서 관련 기사를 보던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사 중 하나가 '한나라당 전영해 디지털 위원장'이 동행했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도저히 견디기 힘든, 배신자라는 원망의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지금 달려가 해명을 하겠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전달되지도 못한 채.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자신이 일하는 김태환 지사 선거사무실로 달려갔다. 사무실 사람들은 싸늘하게 그녀를 쏘아 보았다. 그녀의 책상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 그녀가 작성한 문서와 서류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선거판에서 중책을 맡은 사람이 배신을 하면, 혹시 후보자가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감옥에 갈 수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절대로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며, 차기 도의원 공천을 따 놓은 중요한 참모는 더욱 그랬다.

대한민국의 선출지 공무원은 딱 두 종류, 선거법으로 전과자가 되기나 아직 걸리지 않아서 전과자가 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 운명의 갈림길은 내부자의 고발 혹은 배신이 있거나 없거나로 결정된다. 지금 자신이 조금 전까지 몸담고 있던 선거 사무실은, 대단히 합리적인 결정을 한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런 불문율을 9년 동안 몸으로 배워온 그녀였기에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그대로 가벼운 목례만 한 채 정든 사무실을 나왔다.

제주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눈물은 어떤 힘도 없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이어도에 나가 풍랑으로 죽어 돌아오지 않아도, 제주 아낙들은 바위섬에 올라 쓴 소주를 눈물과 함께 삼킬 뿐, 가족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쫓겨난 날, 전영해도 딸에게 밥을 차려주고 재운 후, 홀로 바닷가로 나가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파도와 함께 삼켰다.

"아… 왜 이다지도 되는 일이 없는가."

그녀는 방파제 삼바리 돌 위에 올라가 휘몰아치는 제주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삼바리 밑은 바닥까지 족히 10미터가 넘었고 모래바닥은 관광객들이 흘리고 버린 모자며 빈병이 뒹굴고 있었다. 모두 자신처럼 버려진 물건들이고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그런 충동과 싸우며 1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마지막 한 모금의 소주를 비우고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 옆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3일 동안 휴대폰을 꺼둔 채 집에만 있었다.

현명관은 감사한 마음에 전영해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현명관 측 사무실에서는 3일 동안 연락을 했지만 허사였다. 그렇다고 상대 후보 사무실에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겨우 그녀와 연락이 되어 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다.

식사하는 내내, 그녀는 표정이 어두웠고 특유의 밝은 목소리도 묵직이 가라앉아 있었다. 여자의 마음을 알아채는데 지독하게 숙맥인 현명관조차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감지할 만한 분위기였다.

“전 위원장님? 무슨 일 있어요?"

잠시, 밥 먹던 그녀의 숟가락이 멈추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5초 간 현명관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금방 특유의 환한 표정이 되어 현명관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짤렸어요. 저 어떻게 하죠?"

현명관은 전영해가 디지털 위원장에서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그녀가 우려했던 일은 현실로 나타났고 현명관은 정치가 이런 곳이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수년을 공들이며 선소리꾼처럼, 도지사가 행차할 때마다 굽실거리며 “게 물렀거라."를 외치고 명함을 수 만장 뿌리며 충성했던 곳에서 잘린 것이다. 당연히 그녀가 꿈꾸던 도의원 공천도 날아갔겠다는 생각이 들자, 현명관은 죄인처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현명관은 그녀의 해맑은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좌절과 절망을 보았다. 수 십 년 전에 자신도 겪었던 좌절과 절망을,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담담한 처신에 현명관은 묘한 감동을 느꼈다.

“전 위원장님,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죠."
"네?"

"나랑 이번 선거 함께 합시다."

선거를 3개월 정도 남겨 둔 2006년 2월, 본격적으로 선거 운동이 개시된 것도 아니고 단순한 민생투어 하루 한 것뿐인데, 첫 번째 실업자가 탄생했다. 위 에피소드에 소개된 한나라당 전영해 디지털 위원장은 나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당장 직업을 잃어버리고 도의원 공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전영해 위원장은 한나라당 당적을 갖고 있는 당원이다.

원래 같은 당원이면 한나라당 후보에 도전하는 나를 딱 하루 도운 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데, 현실 정치는 그렇게 너그럽지 않았다. 순전히 나 때문에누군가는 직업을 잃고 또 꿈마저 잃어버리는 일을 눈앞에서 보니,이것이 정치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니 후보 등록을 하고 본격적인 출마에 돌입하면, 얼마나 많은 읍면 동 단위의 지역 인사들에게 신세를 질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진흙 밭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 싸워 반드시이기자. 이겨서 제주도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만이 이 모든 더러운싸움을 할 만한 일이라 떳떳이 말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 않고 패배한다면 날 도와준 많은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지고, 우리 모두는 진흙 묻은 개가 되어 초라하게 길바닥을 뒹굴어야 할지 모른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반드시 이기자!"

이것이 도지사에 출마하게 된 두 번째 이유였다.

하와이보다 제주도, 가 본 사람은 안다

30대 초반의 젊은 선거 전문가가 우리 팀에 들어오자, 사무실은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초한지에 나오는 한신은 항우에게 인정받지못하고 마구간이나 지키다가 유방의 휘하로 들어가 대장군이 되어분풀이하듯 항우의 모든 영토를 빼앗았는데 바로 그 한신처럼, 전영해 위원장은 갑자기 실직자가 된 분풀이를 하듯 열과 성을 다하여 직원들을 독려하고 꾸짖고 칭찬하며 지역 속으로 들어가 상대편의 텃밭을 하나둘씩 빼잇아 오기 시작했다.

천군만마도 이런 천군만마가 없었다. 지역으로 파고들어가 직접 사람들을 만나는 선거전이 취약했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조직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알게 되자나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처음 그녀가 싸준 '민생투어'를 마치고 전영해 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기억이 난다.

"이런 식의 선거 운동이라면, 난 제대로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그렇게 말한 이유는 그날 행사가 좋았던 것도 있지만 부족한 부분이 완성되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정책과 유권자 대면이 선거라는 게임의 두 축이라면, 후자를 전영해 위원장이 들어오면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머지 한 축은 진즉에 우리가 월등했고 월등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바로 공약과 정책 부분이다. 나의 중요한 출마 사유 중 하나였던 제주도를 공무원에게 맡기면 안 된다'라는 결기는 나로 하여금 최고의 브레인들을 모아 놓고 제주도 발전 방향에 대한 멋진 공약을 만들게 했다. 그 결과물이 오른쪽 신문기사에 간략히 정리된 공약 도표다.

미국인을 만나 봐도 그렇고 실제로 내가 비교해 봐도, 하와이보다 제주도가 더 멋진 곳이다. 그러나 세계의 손꼽히는 관광지 순위에 제주는 없다.

제주도의 지정학적 조건은 금수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인구 1천만이 넘는 도시가 세 곳이나 된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보다 면적도 넓고 경관도 훨씬 훌륭하며 자체 생산하는 농산물도 많다. 그런데도 제주는 여전히 세계적인 관광지도 아니며 돈이 궁한 섬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제주를 하와이 이상의 일류 관광지로 재탄생시키고 부자 섬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공약을, 전문가들과 치밀하게 만들고 끝없이 계속 다듬었다.

맹렬한 추격

2006년 5월 14일, 선거를 보름 앞둔 시기에 나온 여론 조사를 보면 유권자들은 나에 대한 호감의 이유로 54.4%가 공약이 좋아서라고 답한다. 유권자들도 공약만큼은 현명관이 타 후보들보다 월등히훌륭하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 만들었던 공약을 읽어보면 다시 출마를 해서 제주를 최고의 관광지로 만들어 우리 제주도민들을 잘 살게 해주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다.

항공요금 50% 인하, 제주 인터넷 산업특구 프로젝트, 삼다수 증산으로 에비앙 능가하기, 동북아 의료 허브 구축, 제주교육시장 개방으로 해외 유학생 유치 등 당시 나의 공약에는 굵직굵직한 제주 발전전략이 담겨 있었다. 타 후보들이 지역민들의 환심을 사는데 급급하거나 일상생활의 소소한 불편을 해소하고 위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나는 치고 나가서 1등 하자는 비전을 제시했다.

모두 공무원 출신 후보자들이었기에 도지사직을 행정의 연장선으로 생각한 반면, 나는 제주라는 브랜드를 살려 1등이 되자는 목표를 제주 도민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만년 글로벌 2~10위 기업을 1위 기업으로 도약시키는데 함께 했던 사람의 자존심이었으며, 내 고향 제주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처음 3위의 충격을 딛고 한나라당의 경선을 거쳐 후보가 되자 곧바로 지지율 2위로 올라서며 오차 범위 내 추격을 시작했다. 선거사무실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적극 투표 의향자를 상대로 한 조사에서는 0.6%로 이겼다.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보수당이 여론 조사에서 4.4% 뒤진 것은 실제로는 1~2% 뒤진 것으로 봐야 한다. 보수층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의사를 드러내길 꺼려한다. 젊은 사람들의 말이 모두 맞기 때문이다. 사회는 정의로워야 하고 공평해야 하며,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선뜻 그게 아니라고 말할 강심장은 많지 않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움직이고 더 잘 살게 만들려면 지혜가 필요하고 현명한 실행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보수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

어떤 보수당 후보가 여론 조사에서 3% 뒤진 결과가 나왔다면, 그는 거의 박빙의 승부를 하고 있는 것이며 2% 뒤졌다면, 그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보수층의 3%는 솔직하게 자신이 보수 지지자임을 잘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4.4% 뒤졌다는 조사 결과에 우리 선거 사무실이 환호한 것은 당연했다. 우리 모두는 진짜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 상승 추세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15일동안 충분히 역전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충격 그리고 큰 깨달음

하늘을 돌리고 땅을 바꿀 만한 큰 경륜은 깊은 물에 이르러
얇은 얼음을 밟고 힘을 조절하는 데서 나온다.
旋乾轉坤的經輪 自臨深履薄處操出
선곤전곤적경륜 자림심리박처조출

1장에서 소개한 이 교훈을 그때 알았어야 하는데 나는 자만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이 4470표 패배였다. 1.63% 차이였다.

열린우리당 진철훈  44,334(16.15%) 한나라당 현명관 112,774(41.10%) 무소속 김태환계117,244(42.73%)  합계 274,352

큰 실패는 큰 깨달음을 준다. 절대 떨어질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개표 방송을 지켜봤지만, 끝내 표차를 줄이지 못하고 패배가 확정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암흑 감옥에 갇힌 기분이 밀려왔다.

그게 수개원을 보내고 나의 산곳을 무기한 후에야 기우 깨다았다. 나는 정치 생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었다. 어떤 분야는 그 분야의 법칙이 있는데 정치 분야를 너무 우습게 생각했던 것이다. 유권자들을 잘 살게 해 줄 좋은 공약을 보여주고 누가 보더라도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인 내가 떨어진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만, 정치에서는 그런 것이 가능한 곳이었다. 기업의 세계는 이성이 지배하지만 정치는 감성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후보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유권자들에게 밉상이었나 보다. 국민은 자신을 잘 살게 해 준다고 해도 밉상이면표를 주지 않는다. 수십 년 발전이 되지 않고 다 같이 못 사는 한이 있더라도 비호감 후보를 위해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이 정치인데, 나는 이걸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세빅 부둣가의 경매 현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는 분들과 악수하고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닝은 채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행사 후 진영해씨가 조용히 다가와, 큰일 날 일이라고 지직을 해 주이 기우 잔못을 알았을 정도였다.

비록 제주도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삼성의 시장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와 비린 것이다. 상위 1%의 삶을 오랜 시간 살다 보니 이럽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을 잘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가해보민 나는 수심 닌을 단 한 번도 말단에서 일해본 지이 있었다. 신기 진까지, 나는 늘 지시하고 의사결정을 하미 지휘봉 흔들었을 뿐, 단 한 번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걱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혹시 지 사람이 나에게 뭔가 숨기는 것은 없는지, 최고경영인으로서 늘 긴장하고 경직된 표정으로 사람들을 경계했다. 그러다 보니 굳은 표정에 찬바람이 부는 이미지를 바꾸지 못한 채 선기 운동을 이이갔다. 늘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공손히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도우리는 자세로 사람들을 만났어야 하는데, 난 그렇지 못했다.

한 번은 한림 부둣가 식당에 들어가서 명함을 주고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는데 식당에 있던 어떤 어부가, 나는 한나라당을 싫어한다며 명함을 눈앞에서 찢어버렸다. 난생처음 당한 모욕이었고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었다. 자신을 낮춰 유권자에게 다가갈 준비가 덜 된 초짜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내 자신의 실상을 유권자는 알아봤고 나를 찍어 주지 않은 것이다. 혹자는 대중을 우매하다고 하지만, 결코 대중을 속일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내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선거를 치르지 않았다면 평생 경험하지 못했을 성찰이 찾아왔다. 인생에서 제대로 된 실패를 처음 겪고 나자, 사람을 만날 때 목에 깁스를 풀고 엄숙함과 경계심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웃을 줄도 알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줄 알았던 나는, 실패를 겪으며 내 추악한 오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오만을 던져 버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깨닫고 4년을 기다려 와신상담 재도전한 2010년 6월 2일, 이때 치러진 제주도지사 선거에서도 실패했다. 2005년보다 더 완벽한 공약을 만들고 다듬었으며 후보자로서 몸에 밴 겸양과 친절도 자연스러웠다. 연초부터 나온 여론 조사는 압도적 1위였다. 현역 김태환 지사가 불법선거 혐의로 재판을 받는 통에 지지율이 하락한 반사 이익 때문이었다. 이대로만 별일 없으면 2010년 6월에 지사가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같았다.

내가 수 십 년 회사를 다니고 살아 본 경험으로 볼 때 너무 쉽게 된다 싶은 것 중, 끝이 좋은 것을 보지 못했다. 역시나 5월이 되자 내 친동생이 불법선거운동으로 수사를 받고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5월 11일 한나라당 공천권을 박탈당하고 나는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고 완주했다. 결과는 2259표 차로 지고 말았다. 0.85% 차이였다. 그래도 2006년 선거보다 2211표가 줄어든 숫자였다.

무소속 현명관 108,344 (40.55)   무소속 우근민계 110,603 (41.40)    계 267,133

놀라운 것은 불법선거 운동이라는 엄청난 악재가 있었음에도 나를 믿어주고 10만 표 이상을 준 제주 유권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분들 한 분 한 분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만큼 도민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인데, 끝내 운명은 내가 도지사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패배는 역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돈도 많이 사라지고, 가족이 구속되는 등 첫번째 선거보다 상처는 더 컸다.

인간은 늘 쓰디쓴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하는 것인지, 그렇게 또한 번의 지옥을 경험하고 나서야 세상이 새롭게 보였고 기쁨이 찾아왔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순간의 꽃> 중에서 -고은

그 꽃


고은 씨가 미투 운동으로 각종 문제가 드러나 과거와 다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위 시만큼은 헐뜯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정신없이 산을 오른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 풍경이나 꽃들은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산을 다 오르거나 정상 등반을 포기하고 산을 내려오다 보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주변의 풍경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내 주변의 소소한 행복들, 삶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선거 패배 후 그런 시간이 찾아왔다.

오직 꿈을 위해 전투적으로 살면서, 수년 동안 내 옆에 있던 전영해라는 사람은 내게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 그녀의 충격은 나보다. 훨씬 더 컸다. 나와 달리 도의원의 꿈도 날아갔고 후보자가 패배하면서 직업도 사라졌다. 좌절할 시간도 없이 함께 살아갈 두 자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선거 패배 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조촐한 위로의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전영해 위원장에게 연락했다. 식사를 하면서 나와 함께 일한 사람이 여성이었고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리고 수 십 년 만에, 좋아하는 여성을 만났을 때 울렁대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당시 나의 가정은 망가진 지, 2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 사는 인생인지 나의 개인사는 엉망이었다. 신라호텔 때부터 나와 아내는 아래층 위층으로 각자의 공간을 유지하며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살았다.

나는 물질도 우리의 감정을 읽고 느끼며 반응한다고 생각한다. 퇴근해서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보일러를 때도 벽과 마루와 가구들은 냉랭한 한기를 뿜으며 네가 여길 왜 왔냐고 따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차갑고 서러운 가정생활을 하는, 이 땅의 모든 주부와 남편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돈과 명예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며 실질적 행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삼성그룹의 사장이 되고 비서실장이 되고 나아가 삼성 물산의 회장이 되어서는, 그놈의 이목 때문에 더욱 이혼할 수 없었다. 아침에 식탁에 앉아서 묵언 수행하듯 밥과 반찬을 위장에 밀어 넣고 집을 나서면 그때부터 위선은 시작되었다.

수행기사가 운전하는 멋진 리무진을 타고 출근해서, 사람들에게 혁신이 어떻고 도전이 어떻고 설교를 한다. 직함은 회장이라 만나는 사람마다 우러러 보고 어려워하면 나는 으스댄다.

그러나 해가 지고 집에 들어가면 차가운 냉골같은 마루와 벽을 마주하며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주말이었다. 이번엔 어디 가서 시간을 때워야 하는지가 금요일 밤마다 찾아오는 고민이었다.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이 모든 불행은 나의 부족함과 잘못에 의해 시작된 일이었다. 자업자득이었지만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가정이 더 고통스러웠다. 가정이 망가진다는 것은 그냥 지옥이다. 그렇게 아무 행복감 없이 일에서 오는 성취감을 대체재 삼아 이제껏 살아온 22년 세월이, 지금 전영해 위원장과 식사를 하면서 몹시도 억울하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까짓 남의 시선과 이목이 뭐라고 그렇게 위선적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양 살았을까. 왜 솔직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지 못했을까. 후회되고 분한 마음에 먹지도 못하는 술이 마구 목을 타고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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