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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관 칼럼](18)출세할 사주
[현명관 칼럼](18)출세할 사주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7.31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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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00'야!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에세 자신을 소개한다. 이 모든 행위가 이름이 등장한다.

이름이란 무엇일까?

이름이란 유형·무형의 사물의 개념을 말하며 각 사물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각 사물을 구별하는 칭호인 셈이다.

다른 것과 구별짓기 위하여 삼라만상(森羅萬象)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독립적인 존재로 군림된다. 특히, 사람의 이름[姓名(성명)]은 단순한 호칭의 수단이 아니라 명예와 인격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의 종류는 정식명(木名) 이외에 가명(假名)과 필명(筆名), 경칭(敬稱)과 비칭(卑稱), 애칭(愛稱)과 별명(別名)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에는 실명을 삼가는 것이 일반적인 세계적인 경향이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모독이라 생각하여 금기시하는 풍습이 생겨 다양하게 애칭, 별명 등을 사용해 왔다.

한국에서의 이름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이름이 아직도 많이 보이는데 최근에는 국어순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곱고 아름다운 글자를 사용한 이름과 순한글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현대에는 부르기 쉽고 부드러운 것을 좋은 이름으로 본다.

그만큼 이름이 이쁘면 자신감이 생긴다.

현명관 회장의 이전의 이름은 지난 주에 설명했지만 '수남'으로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늘 마음이 거슬렸던 것이다. 과거에는 한번 이름을 짓고 나면 바꾸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쉽게 개명이 이뤄지고 있다.

본문에서 나왔지만 이름에는 의미가 있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내용을 음미해볼 때 누구나 멋지고 아름다운 내용이 숨겨져 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아버지가 이름까지 바꾸고 자신의 성공을 바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현명관 회장이 아버지가 개명한 이름을 보고 자신감을 가진 대목에서 우리는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느낄 수 있다. 멋지다고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는 대목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자식이 제대로 기를 못 편다면 '이름'을 개명해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왜냐하면 친구나 주위에서 놀림감이 된다면 부모가 개명해 주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한다. 아이의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무슨 회사를 하거나 장사를 하더라도 상호를 멋지고 쉽게 부르기 쉬운 것을 원한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편하게 불러주기를 우리는 원하는 것이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인격까지 담겨 있다.

그래서 소중한 이름을 함부로 변질해서 부르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아버지는 자식이 걷고 있는 미래의 길에 탄탄대로를 만들려고 한다. 인간이 마음이 그렇다. 그러한 첫 과정이 좋은 이름, 멋진 이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7월의 마지막, 점점 뜨거워지는 여름, 아버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출세할 사주야.” "네?"

"38세부터는 막치고 나가는데… 이런 돈도 많네. 걱정할 거 없어. 편관(偏官) 사주라 아주 질기고 독하거든. 죽 관을 타고 높은 자리에 오를 사주지.”

현명관의 아버지 현여방씨는 아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제주에서용하다는 작명가를 찾아갔다. 작명가는 이름을 짓기 전에 사주부터 풀었다.

사람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부족한 오행이나 성향을 보완하려면 사주 감정이 먼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명가는 사주를 풀자마자 좋은 이야기를 쏟아 내었고 아버지는 기뻤다.

"아 그렇군요. 이름을 어떻게 지으면 좋을까요?"

“이 친구는 물이 태과(太過)한 사주요, 너무 강하다는 뜻이지. 이럴 경우 물을 발산하거나 눌러야 해, 이 경우는 관성(官星)으로 눌러야 하는데 사주에 하나밖에 없거든. 그러니 그 관성을 이름에 넣어주는 게 좋겠는데…… 그리고 서울법대 생이고 사법시험 본다면서? 그럼 관청 관(官), 벼슬 관 자를 이름에 넣는 게 좋겠어. 잠시 기다리시오”

작명가는 1시간 넘게 고민하며 옥편을 뒤지더니 새 이름을 내놓았다.

"밝을 명자, 벼슬 관자. 명관(明官). 이 이름을 쓰면 순풍에 돛 단 듯 승승장구할 거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현여방은 붓글씨로 쓴 아들의 새 이름이 적힌 종이를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서울에 출장 온 아버지는 서울대학교를 찾아 아들을 만났다. 가슴에 고이 품어 온 종이를 꺼내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수남아. 아니지 이제부터 너는 명관이다. 이 이름으로 살면 크게 출세하고 성공한단다."

"오~ 멋진데요!”

붓글씨로 쓴 새 이름이 낯설었지만 아들은 곧 자신의 새 이름이 익숙하게 되었고 정이 갔다.

“그런데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법원에서 모든 가족의 개명은 안 된다고 한다. 한 명만 해 주겠대, 그래서 네 이름만 새로 지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감이 어느 정도인지 깨달았다.

그때가 1962년 1월이었다. 대학 입학은 현수남으로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산더미 같은 행정 절차가 뒤따라야 했다.

법원 결정도 기다려야 했다. 하는 수없이 1962년 사법시험은 현수남으로 치러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들이 새 이름 명관을 불러주기 시작하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샘솟았다.

“정말 관을 쓰는 사주라 이 이름이 나한테 딱인가? 아버지, 고맙습니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현명관은 종이를 품고 온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들의 출세를 철석같이 믿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아들에 대한 완전한 신뢰는 이후로도 현명관이 삶의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용기를 주었다.

공무원에서 농부로

아버지는 6남 1녀 중 둘째 아들인 나의 성공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을 쏟아부었던 것 같았다.

요즘 말로 몰빵을 한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 있을 수 없지만 살기 어려운 시절, 복에 겨울 정도로 아버지는 나를 위해 특별한 일을 많이 했다.

작명가를 찾아가 이름을 지어 준 자식은 내가 유일했다.

다른 형제들의 개명을 포기하고 법원에서 허락하는 단 1명을 둘째 아들인 나로 정해서 복잡한 행정 절차를 진행한 것도 아버지였다.

5.16 이후 갑작스럽게 실직하고 간절히 돈이 필요했던 이유도, 나의 서울 유학과 대학 등록금, 사법시험 준비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 때문에 평생 농축산일을 해 본 적이 없는 분이 산속에 목장을 차릴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공무원이 사업을 하면 망한다는데 아무 경험도 없던 분이 실패의 두려움을 딛고,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목장을 만들었다. 트랙터를 빌려 초지를 개간하고 축사를 손수 짓고 축사 옆에 살림집까지 지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내가 공무원이 되어 감사원에서 일할 때,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알게 되었다. 모두 자식 하나 잘 되라는 마음으로 이겨내셨나 보다.

목장이 형태를 갖추면서 아버지의 손과 얼굴은 완전히 노동자처럼 변했다. 하지만 소들이 무럭무럭 자라면, 문제없이 가족을 건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노동의 고통을 이겨냈었다. 실제로 소 30마리, 돼지 5마리, 말 5마리는 아버지의 보물이 되어 해마다 나의 등록금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1964년 1월, 소 값 파동이 일어났다. 1년 전 암소 한 마리는 당시 돈 2만원 정도였으나 64년에 들어서며 값이 폭락해서 마리당 1만 6천원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각종 사료 등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 밑지는 장사가 되었다.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은 8천800원, 국립대인 서울대는 훨씬 쌌으나 역시 등골 휘는 금액이 아닐 수 없었고, 거기에 각종 법 공부에 필요한 책값은 상당히 비쌌다

아버지는 이제 소를 3~4마리 팔아야 겨우 고시 공부하는 아들의 학비와 가족의 생계비를 댈 상황에 처했다.

해녀인 어머니도 돈을 벌기 위해 더욱더 강한 노동을 감내해야 했고 독한 진통제인 '뇌신'을 매일 먹어 가며 잠수병을 견뎠다.

고생하는 아내를 매일 봐야 하고 생산 원가보다 낮아진 소들을 한심스럽게 지켜보며 아버지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어쩌면 갑자기 찾아온 11월의 심장마비는 1년동안 경제적인 고통을 받으며 생긴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사면초가 상황에서 아버지는 서울 상경을 결심했다. 돈을 꾸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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