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12)이건희 회장의 녹음 파일
[현명관 칼럼](12)이건희 회장의 녹음 파일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6.18 2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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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이번 장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 경영방침을 전세계적으로 선포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건희 회장의 녹음파일이 공표되어 각 사장들에게 전달되지만 이건희 회장이 노발대발 한 이유는 회사의 가치에 있었을 것이다. 승부는 양보다 질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정치인, 경제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신(新)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있던 것을 확 엎어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습관이나 방식, 태도 등 모든 것을 탈바꿈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과정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믿음이다. 확신이다.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고 믿지 않을 때 콜럼버스는 계속 서쪽으로 항해해서 간다고 했을 때 다들 그가 미쳤다고 하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차레의 항해로 인해 결국 새로운 미지의 땅을 발견한다.

이처럼 리더는 가끔 모험심도 있어야 한다. 그 모험심이 없을 때 변화는 결국 오지 않는다.

세상에서 생각의 길은 가장 멀다. 머리와 가슴 사이는 약 30cm 정도의 거리지만 생각의 거리는 너무 멀다. 반면 행동의 거리는 머리와 손, 발의 길이지만 바로 움직인다.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결과로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바로 새로운 미지의 땅을 걸어가 보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가는 그길은 모두 미지의 땅이다. 앞으로 걸어가는 인생이 다 그렇다. 첫 걸음이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와 함께 걸어간다면 믿음이 생기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리더는 눈을 키워야 한다. 다른 말로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상황판단을 빨리 하는 사람이 대처능력이 뛰어나는 것이다. 대처능력을 얼마나 빠르게 하느냐에 따라 경영의 손실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신경영, 새로운 것으로 탈바굼해서 성공하는 것. 이게 경영인에게는 성공인 셈이다. 반면 정치인에게는 새로운 모델이 되어 동참하게 되고 결국 권력의 자리에 앉을 때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다. 아무리 바보라도 보는 눈은 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이 선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현명관 회장이 말미에 말한 그 것, "나의 윗사람이 갑작스러운 호출을 해서 질문하는 경우를 만나면 무조건 솔직하게 말하라. 말의 결과를 예단하여 이익을 보려 하지 말고 회사를 먼저 생각하고 말한다면 당신보다 넓게 보는 윗사람은 당신의 진심을 결국 알게 된다"는 이 말은 진심이 통한다는 말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진심을 다해 자신의 일에 임하자. 그러면 누군가는 보고 있고, 누군가는 말하고 있고,  누군가는 따라하고 있고, 누군가는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보여준 신경영이 지금 우리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는 지 자신을 점검할 때인 것 같다. 6월처럼 뜨거운 날,  현명관 칼럼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건강에 유의를 바라면서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현명관 칼럼
현명관 회장

내일 7일이면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삼성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신경영을 선포한다.

오늘은 오전에 있었던 회장과 비서실장 등의 마지막 녹음 파일을 들으며 각 계열사 별 추진할 중점 사안에 대해 정리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말이 왜곡되거나 전달되지 않는 일을 무수히 겪자, 직접 녹음해서 들려주는 방법을 이용했다. 이날도 녹음은 이루어졌고 비서실에서는 녹음기를 들고 들어와 100여 명의 사장들이 모인 호텔 회의장에서 회장의 음성을 들려주었다.

이수빈 비서실장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무슨 일일까?”

현명관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수빈 실장이 녹음기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건희 회장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장들에게 어서 다시 한 번 강조하시오. 중저가 물량 공세는 절대 안 돼, 적자가 나도 할 수 없어.”

녹음기 속 이건희 회장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시간이 걸려도 질로 승부해야 합니다. 당장 매출이 줄어도 할 수 없어. 도전해야 해!"

그때 여직원이 무언가를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포크를 달그락거리며 과일을 먹는 소리도 들린다. 이수빈 비서실장은 회장이 말을 멈추자 잠시 기다렸다가 한마디를 했다.

그리고 그 말이 그토록 무서운 소리를 만들어 낼 줄은 그날 독일의 호텔 회의실에 모인 100여 명의 사장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회장님! 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 양적 성장을 통해 삼성은 흑자를 만들고 질로 나아갈 바탕을 만들…”

탕! 쨍그랑.

회장이 과일을 먹던 포크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다. 호텔 방안에 모여 있던 사장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명관도 사장들도 이수빈 비서실장의 논리에 수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답답했고 외로웠다. 그렇게 돈을 많이 들여 독일까지 날아오게 했고 회의를 하고 신경영을 선포하려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비서실장에게조차 자신의 철학이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현명관은 이렇게 회장의 분노를 이해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지금 도박을 하고 있다. 황태자로, 왕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그 모든 자리와 돈을 걸고 도박을 한다. 이건 진심이다. 초인류 삼성을 만들기 위한 진심. 이렇다면 나도 한다. 제대로 해 보자. 신경영!”

박람회장이 된 호텔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이 독일에서 매일 신경영 회의를 주재하며 중저가 물량 위주 경영을 완전히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건만, 사장과 임원들은 긴가민가했다.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도 경영진이 정신을 못 차렸다.”라고 대노하며 포크를 집어던지는 녹음을 들으며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신경영이라고 선언하던 시기에도 이 정도였으니, 초기에는 말할 것도 없이 회장 혼자 열을 내고 사장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 다반사였다.

갑작스러운 LA 호출과 쇼핑도 그런 풍경 중 하나였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약 4개월 전 갑작스러운 호출 명령이 떨어졌었다. 당시 비서팀장 이창렬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당장 LA로 오시오. 회장님의 특별 지시입니다.”

모든 일을 제치고 중요 기업의 사장들이 LA로 모였다. 문제는 내가 거기에 끼었다는 것이다.

왜지? 삼성시계는 그룹의 주력이 아니지 않는가? 호출된 사람의 면면을 듣고 보니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삼성전자 김광호 사장, 삼성항공의 이대원 사장, 삼성코닝 홍석현 부사장, 중앙일보 홍두표 사장 등 LA에 모인 삼성의 사장들은 모두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하나같이 호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에게 떨어진 임무는 느닷없는 쇼핑 명령이었다.

쇼핑을 하라니? 백화점, 가전제품 상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해오라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명령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건희 회장은 미국 출장 중 백화점에 들렀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입구 가장 좋은 자리에는 소니 제품이 전시돼 있고, 삼성전자 제품은 싸구려 제품으로 매장 뒤편에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삼성 제품의 위상을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난다고도 했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대대적인 혁신과 질 경영을 결심했나 보다.

1993년 2월 18일, 삼성의 별들이 모두 모였다.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LA의 센추리 플라자호텔의 연회장은 갑자기 전자 제품 비교 전시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자부문 수출 상품 삼성  미현지 비교회(사진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현명관 당시 삼성시계 사장)
전자부문 수출 상품 삼성 미현지 비교회(사진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현명관 당시 삼성시계 사장)

\당시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센추리 호텔에 마련된 ‘세계 주요 전자제품 비교 전시회’ 라고 소개했으나 이것은 순전히, 이건희 회장이 삼성 그룹의 사장들에게 삼성의 위치를 각인시키려고 기획하고 만들어낸 개인 박람회였다.

5 삼성그룹은 18일 이건희 회장 주재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센츄리 플라자흐텔에서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 비교 평가회의'를 열어 반도체 협상이 결렬 되는 등 한국 전자 제품의 수출이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시점에서 전자 제품 수출 확대책을 논의했다.

삼성 제품은 물론 필립스와 소니, 제너럴 일렉트릭, 월풀 등 전 세계 톱을 달리는 전자 회사의 냉장고, 텔레비전, 카메라 등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분해되어 회로와 배선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어제 쇼핑한 사장들에게 집중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쇼핑을 해보니 어떤가요? 삼성 제품은 어디 있었죠?“

“우리 제품은 많이 팔리던가? 가장 좋은 곳에는 어느 회사의 제품이 전시되어 있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사장들은 말문이 막혔다.

“아 이것을 위해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 모았구나”

나를 비롯한 사장들은 물론, 특히 삼성전자 사장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리모컨 보이시죠? 우리는 왜 버튼이 여기에 있습니까?"

누구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다..

"리모컨에서 가장 많이 쓰는 버튼은 뭡니까?"

“온 오프 버튼입니다."

"그럼 왜 필립스는 중앙에 두는데 우리는 이렇게 찾기 어려운 곳에 버튼을 둡니까? 여기 삼성 TV를 보세요. 배선은 또 왜 이렇게 복잡한가요? 반면, 소니 것은 딱 봐도 아주 단순한데, 사장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삼성전자 김광호 사장은 할 말이 없었다. 이때 어떤 임원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현실 안주형 대답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회장으로부터 “너 나가!”라는 불벼락을 맞으며 쫓겨났다.

누가 이건희 회장을 “감에만 의지한다”라고 말했던가.

지금은 만두를 분해시킨 이병철 회장 보다 더 지독하게 LA 호텔 연회장을 통째로 빌려 모든 가전제품을 분해시켰다. 전자 제품 비교 전시장을 만들면서까지 계열사 사장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라고 설파한다.

나는 이건희 회장과 사장들의 문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삼성에는 이건희 회장의 입지가 약하기 때문에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에 이회장이 구상하는 신경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만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까이서 본 이건희 회장의 모습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완전히 몸이 달아 있는 청년이었으며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군인이었다.

“아 진심이구나. 그리고 그는 도박을 하고 있구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금 도박을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스스로 변화하고 삼성의 혁명에 몸을 담가 제대로 개혁에 앞장서자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날 참석했던 사장들도 이 회장의 열성을 보면서 변화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은밀한 첫 번째 호출

셋째 날,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며 충격적인 LA 출장을 마치고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회장 숙소로부터 수행비서의 연락이 왔다.

오라는 장소는 LA 외곽에 위치한 회장이 머물고 있는 가정집이었다. 차까지 보내 줘서 타고 갔더니 그곳에는 홍석현부사장, 홍두표 사장, 이건희 회장, 이렇게 세 명만 있었다.

“이런 자리에 내가 있어도 되는가?”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감사원 시절은 어땠습니까?"

감사원은 내가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전주제지로 직장을 옮기기 전, 10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던 곳이다.

“우리나라 공직사회는 참 문제가 많습니다. 만일에 어떤 사고가 났다, 그럴 때 일반 직장에서는 사고를 처리하고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공무원은 그게 아닙니다. 감사원은 보고하기 바빴습니다. 청와대, 총리실, 각 부처,정보부까지.… 기본이 5군데 이상 보고하고 설명하다가 시간이 다갑니다. 이런 형식주의 관료주의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열심히 듣던 이건희 회장이 바로 치고 들어왔다. "그럼 삼성의 문제는 뭔 거 같나?"

"감사원이 상명하복 문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삼성에 와보니 삼성이 감사원 보다 더 엄격했습니다. 혹자는 그게 삼성의 강점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문화가 아닌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이 회장은 이후 거침없이 나에 대한 사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그동안 내가 회장으로부터 받았던 질문들은 하나같이 경영과 관련된 심각한 이야기들뿐이었는데 그날은 개인사에 관한 것이 많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망해가는 삼성시계로 좌천시켜 놓고 나와는 상관도 없는 출장에 부르질 않나, 심지어 주요 인물들만 부른 사석에까지 초대했을까?

바른 말을 한 승지원 사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룹 공채 출신도 아니었으며 주력 기업을 경영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왜 나를 관찰할까?

두 번째 긴급 호출

1993년 2월, 이건희 회장의 호출로 LA에 다녀오고 나서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났을 즈음, 삼성그룹에 최악의 불운이 닥쳤다.

새벽, 삼성시계로 출근해서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고 대한민국에 안타까운 사고가 터진 줄로만 알았으나, 기사를 읽어가면서 이 사고가 삼성건설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는 것을 알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전자부문 수출 상품 삼성 미현지 비교회(사진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 현명관 당시 삼성시계 사장)

 1993년 3월 29일 동아일보 1면

“삼성건설의 잘못 때문에 열차가 탈선해서 75명이 죽고 198명이 다치다니….”

삼성종합건설이 맡은 지하 전력구 공사 중 일부 구간을 한진건설에 하청을 주었는데 한진건설이 철로를 횡단하는 34m 구간에 지하 전력구 공사를 철도청과 협의도 없이 진행하다, 지반이 꺼지면서 벌어진 참사였다.

삼성종합건설 대표이사, 관련 임원 등이 전원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일이 터지면 직장인은 회사에 나가기 싫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지금 삼성건설의 직원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업무를 시작할 즈음, 갑자기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수빈 비서실장이었다.

“현 사장, 당신이 삼성건설 뒤처리를 해야겠습니다. 사고처리를 할 임원도 사장도 전부 감옥에 갔습니다.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이 일을 내가 맡게 되다니....”

모든 일을 뒤로하고 부산 구포로 내려갔다.

우선, 긴급 구속된 사장과 임원들을 면회했다.

함께 그룹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삼성인이 감옥에 있는 모습을 보고 큰 슬픔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사람이 죽었고 회사에 큰 짐을 지워 힘들게 했다고 무척 괴로워했다.

직장인은 매 순간 얇은 얼음 밟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도 이런 일은 불가항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을 하면서 생긴 부작용이 터져 나오던 시기였기에 안전 불감증으로 벌어지는 사고와 관련자의 불운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로도 대한민국은 큰 홍역을 치렀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면서 대한민국은 시스템을 바꾸고 효율보다 사람의 안전을 생각하는 나라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그 사이 크고 작은 안전사고와 관련된 직장인들은 파국은 맞았다.

나도 그 위치에 있었다면 저 구치소 안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있을 때 소화기 유효기간을 살피며 포스트잇을 붙이곤 했던 나였지만 안전 관리가 제대로 안될 때 엄청난 참사가 벌어질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한 번 더 각성하면서 사고 수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가슴 아픈 사건을 처리하느라 3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이건희 회장의 LA 호출도 삼성의 품질 위주의 경영도 머리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을 즈음, 다시 한 번 이건희 회장은 그룹의 모든 사장들을 호출했다.

LA 출장은 서막에 불과했다. 전 그룹 계열사 사장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서 본격적으로 신경영에 관한 회의를 했다. 나도 삼성건설의 모든 일을 미뤄두고 회의에 참석했다. 이건희 회장이 새벽부터 밤까지 이야기를 하면 그다음 날은 분임 토의를 하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오너와 사장들의 시각차는 생각보다 컸고 보이지 않는 충돌을 하고 있었다.

주군과 신하의 충돌

2018년 영국의 브랜드 평가 회사인 브랜드파이낸스는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아마존 애플 구글 다음인 전 세계 4위라고 발표했다. 그 가치는 100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26년 전 꿈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최근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조치와 최순실 사태의 후폭풍으로 삼성은 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건희 회장은 6년째 병실에 누워있다.

삼성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자, 위기가 온 것이다. 지금 서울 강남 삼성 병원에 누워있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을 보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꿈같은 것이 인생인가 보다.

꿈같았던 1993년 독일, 26년 전 이건희 회장은 크게 솟아오르던 나무였다. 그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죽음도 두렵지 않은 51살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랬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다. 이건희 회장이 42년 1월생이고 나는 41년 9월 생으로 5개월 차이가 나는 동갑이다. 우리는, 처음에는 다른 꿈을 꾸었으나 나중에는 같은 꿈을 꾸었다.

신경영을 외치던 이 회장은 넘치는 젊음과 에너지로 18만 삼성인을 향해 포효했다. 1993년 6월 24일, 25일 이틀 동안 인공위성을 이용해 프랑크푸르트 사장단 마라톤 회의 내용을 삼성 그룹의 모든 임직원이 시청했다.

유튜브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라 인공위성이 아니면 계열사 전체에 방송할 방법이 없었다. 오전 8시 30분부터 40분 동안 삼성의 모든 직원은 이건희 회장이 품질 위주의 경영으로 바꾸라는 말을 들으며 삼성이 크게 변하려고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은 불량품을 만드는 일은 ‘경영의 범죄'라고까지 했다.

방송이 나가기 2일 전 계열사 사장들은 녹초가 되어 독일에서 귀국한 상태였고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실행하기 위해 긴급 임원 회의를 소집했었다. 드디어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삼성 신경영 선언은 실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당시 임직원들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섭섭함도 자리 잡고 있었다.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도 알지 못했다. 삼성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엄청난 업무를 소화해야 하는 조직이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전투하듯 일을 해서 승진한 많은 간부들은 지금까지 한 것은 다 잘 못되었으니 바꿔야 한다는 말이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아침 7시 출근하고 4시 퇴근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게다가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그 결과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기존의 고객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품질 경영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다.

일본산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경쟁력을 지켜 왔던 삼성이 품질 제일주의로 나가면서 일본산과 비슷하거나 같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물건이 팔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당장 브랜드 레벨이 다른데, 같은 품질에 같은 가격이면 소비자들은 소니를 선택하지 삼성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이 그룹 전체에 나타나면 개혁하기 전에 망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 모든 것을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이 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완전한 도박이었다.

아마존, 구글, 애플 그리고 삼성을 꼽을 정도로 성공한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장밋빛 낙관은 잠꼬대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이회장 주도로 신경영 회의를 하던 사장들은 고민이 많았고 나도 그랬었다.

반면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회장은 열정적으로 끝없이 개혁을 주문했다.

“지금은 잘해보자고 할 때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있는 때다. 마누라, 자식만 빼놓고 다 바꿔봐!”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 머물며 계속 회장 주재 사장단회의를 하던 어느 날, 나는 점심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매일 서양식 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신라호텔의 음식이 그리워졌었다. 짜장면도 먹고 싶었고 불도장 국물도 먹고 싶었다. 그러면서 신라호텔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신라호텔에서 사장으로 있을 때 인류호텔이 되기 위해 새로운 메뉴를 계속 개발하라고 했다. 그때 탄생한 것이 후덕죽의 불도장이었다.

불도장의 맛은 기가 막혔지만 예기치 않은 불교계의 원성을 샀었다.

음식 메뉴 하나를 새로 넣는 일도 이렇게 예기치 않은 위험을 초래하는데 하물며 그룹 전체가 개혁을 실행하다 뭔가 크게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걱정에 독일 소시지와 바게트로 때우는 점심 식사는 더욱 느끼했다.

비서실장이 오전에 희장님과 나눈 대화 녹음을 가져올 테니 들어보고 다시 생각하자. 이런 생각을 하며 사장들이 모여 있는 호텔연회장으로 올라갔고 앞서 소개한 과일을 먹다 말고 포크를 던지며대 노한 이건희 회장의 목소리를 녹음기로 들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나를 비롯한 그 자리에 도여 있던 사장들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어찌 보면 다분히, 좀 과하다 싶은 해의 출장 회의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삼성이 지금처럼 세계 브랜드 가치 4위를 달성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용인 연수원에 모아 놓고 사장들에게 아무리 이야기 한들 사장들이 이건희 회장만큼 뼈저리게 위기감을 느끼고 결단하고 신경영을 실천했을까?

아마도 과일을 먹다 포크를 던지는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비서실장조차 자신의 뜻이 전달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본 순간, 이건희 회장은 역시 이렇게 독일에 모여서 전체 회의를 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회장은 집요했다. 프랑크푸르트 회의가 끝이 아니었다. 런던, 도교, 오시가로 도시를 옮겨가며 삼성의 신경영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 그룹 전체가 개혁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리자 사장들도 이건희 회장의 도박을 받아들이고 하나 둘 개희의 강물로 뛰이 들기 시작했다.

바꾸는 건 당신이 잘하잖아

나도 귀국해시 삼성 건설의 개혁을 위해 임원 회의를 소집하고 전략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 갑자기 한남동회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또 무슨 일일까?"

한남동 응접실에서 10분 정도 기다리니, 이건희 회장이 들어왔고 예측하지 못한 질문이 시작됐다.

"그동안 삼성그룹 운영에 있어서 평소 고처야 될 게 있다면 뭐라 생각합니까? 생각했던 바를 한번 말해보시구려.”

"삼성 그룹은 이러 업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업종별로 특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특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경영 방향이나 방침을 적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고있습니다. 전자업이민 전자업종, 금융업이면 금융업종, 서비스업은서비스 업종으로 나뉘시 소그룹 별로 경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친김에 내 생각을 더 말하기로 했다.

“저는 서비스 업종에 있다가 왔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품을 사주는 것이 고객이기 때문에 고객만족 경영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신경영이 바로 그걸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듣고 있던 이회장은 갑자기 한마디를 던졌다.

"현사장, 비서실장 하세요!"

순간 놀랐다. 얼핏 보면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선대 회장보다 편한 사람처럼 보인다. 감각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고 300억 이상 돈을 더 쓴 입찰도 눈감아 주는 배포가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이 편해 보일 수도 있다. 반도체 산업의 경우가 그의 과단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반도체 불모지인 한국이 막대한 투자를 하면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전 세계에 아무도 없었다.

반도체 때문에 삼성은 곧 망할 거라는 예측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었다. 모두가 우려했던 상황에서 부천에 있던 '한국 반도체와 통신 회사를 인수하며 '우리가 갈 길은 이 길이다'를 외치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으로 밀어붙인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다.

큰 게임을 하는 사람이기에 듬성듬성한 부분도 있지만 한 가지에 빠지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이병철 회장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논쟁도 있었다. 어느 날 이건희 회장이 임원 회의에서 물었다.

“왜 물은 차가운가?”
답 “얼음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얼음은 왜 찬가?“

답 “0도 이하에서 얼기 때문에 차갑습니다.”

“그럼 왜 0도 이하에서 얼음이 되는가?“

보통 사람이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조차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던져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즐기며 탐구했다.

한마디로 문제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집념과 노력이 대단했다. 자동차, 반도체 등 그가 관심을 한 번 갖게 되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그 분야를 물고 늘어졌다.

반도체에서 전기오븐까지 구체적인 디자인과 기술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를 모시는 사람도 그런 열성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 그는, 나에게 그런 자리로 오라고 하는 것이다. 부담감이 밀려왔다. 또한 그룹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비서실장은 삼성의 2인자나 다름없는 자리인데 그런 높은 자리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저는 정말 자격이 없습니다.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는 회장님을대신해서 그룹의 전반적인 것을 살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저는 삼성그룹 공채도 아니고 중간에 들어온 사람 아닙니까? 저는 자격이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얘기입니다. 다른 걸 다 주물러 본 사람은 오히려 그것이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룹에 과거부터 오랫동안 몸을 담지 않아서 오히려 변화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게 현사장의 장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라는 거니까 다른 소리 마세요. 그룹의 명령으로 알고 그냥 해주세요. 바꾸는 건 당신이 잘하잖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회장은 나에게 몇 가지 서류를 건네주었다. 비서실 조직개편과 관련된 계획안이었다.

“차장 두 사람과 비서팀장, 그 외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바꾸시오."

200명 비서실 직원을 100명으로 줄이는 혁신안이었다. 큰 부담을 느끼며 한남동을 나왔다.

며칠 후 삼성그룹의 대대적인 비서실개편 기사가 떴다. 6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이후 4개월이 지난, 1993년 10월 23일부터 나는 삼성 혁명 한복판에 서게 됐다.

삼성 비서실장의 최후

삼성 그룹 비서실장의 역사를 보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좌천을 당하거나 곤욕을 치르는 등 말년에 좋지 않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떠날 때 그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만을 염원하며 업무를 했다.

다른 그룹의 비서실장이라 하면, 그야말로 비서업무 그 자체지만 삼성그룹은 달랐다. 비서업무는 기본이요, 회장을 대신해 그룹 전체의 인사나 관리, 운영 등을 책임져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 경영자들이나 외국 고위 인사, 국내 인사들 중 이건희 회장을 만나고 싶어 하고 또 만나야 할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상대가 어떤 이력과 경력을 갖고 있으며 좋아하는 음식, 기호는 무엇인지 미리 파악해서 미팅을 준비해야 했다.

당연히 상대의 미팅 목적, 예상되는 결론의 준비는 물론 미팅 후에는 내용을 정리하고 기록했다. 회장의 면담에선 대부분 비서실장인 내가 배석했기 때문에 언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몰라 사전에 공부를 많이 해야만 했다. 미팅 준비는 늘 정신적 부담이 컸다.

신경영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이건희 회장은 평소 자신의 소신대로 거침없이 치고 나갔고 1사 1품 운동 등으로 세계 넘버원 상품을 하나둘씩 탄생시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비서실 전체도 밤낮없이 새벽 2~3시를 넘기며 삼성 신경영의 실현을 위해 뛰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1996년이 되자 더 하다가는 그대로 몸져누울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태로 이건희 회장은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삼성 역사상 처음으로 총수가 재판장에 서고 말았다. 회장을 직접 모시는 비서실장으로서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나는 책임을 통감하고 물러날 결심을 했다.

“이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데 책임지는 풍토를 만들지 않으면 책임 경영을 할 수 없습니다.

공장에 불이 났다면 공장장이 책임을 지는데 그룹 회장이 검찰에 출두하고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이건희 회장에게 말했다. 책임도 져야 했지만 3년 동안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기진맥진 상태가 된 것도 중요 이유였다.

“사건에 연루되고 검찰에 기소되고 한 것이 어떻게 현실장 책임인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이건희 회장은 만류를 했다.

“무슨 일이든 3년이 지나면 효율이 떨어지고 기력이 빠집니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건희 회장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현실장 피골이 상접했어….”

이건희 회장은 나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후임 비서실장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로써 나는 삼성그룹 비서실장의 중책에서 3년 만에 벗어나게 되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며,
마음에 흡족하다 기뻐하지 말라.
오랫동안 무사하기를 믿지 말고,
처음이 어렵다고 꺼리지 말라.

무우불의 무희쾌심
毋憂拂意 毋喜快心
무시구안 무탄초난
毋恃久安 毋憚初難

채근담 / 前集 第202章

이제 와 되돌아보니 이건희 회장과 나의 인연은 질기고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호텔 근무 당시 새벽 2시 호출을 당해 이건희 회장의 질책을 받았고, 삼성시계에 가서는 사장단 회의 때 이건희 회장과 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 LA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몇몇 임원만 부른 미팅에 나를 불러 신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비서실장이 됐고 난 존경심과 책임감으로 이건희 회장이 능력을 펼칠 수 있게 도왔다. 어느 순간 내가 지치고 힘들었을 때, 이건희 회장은 내 건강을 걱정해주며 진심 어린 위로를 해주었다.

채근담의 글귀처럼 만약, 내가 이건희 회장과의 첫 만남이 어려워 꺼리고 피했다면 이 같은 관계는 없었으리라. 나는 소신을 다해 거침없이 말했고 그 진심을 이건희 회장은 알아주었다.

현명관의 21세기 채근담菜根譚

나의 윗사람이 갑작스러운 호출을 해서 질문하는 경우를 만나면 무조건 솔직하게 말하라.
말의 결과를 예단하여 이익을 보려 하지 말고 회사를 먼저 생각하고 말한다면 당신보다 넓게 보는 윗사람은 당신의 진심을 결국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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