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7)士爲知己死(사위지기사)
[경제인 칼럼](7)士爲知己死(사위지기사)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09.12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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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육지로 떠나던 날 부모님으로 부터 3500원이라는 돈을 받아든 택남은 결국 사업을 통해 3500억원 이상가는 가치를 만드는 성공을 이뤘다.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에 '士爲知己死(사위지기사)' 제목은 누나가 유일한 재산(?)을 동생을 위해 처분한 반지를 통해 책을 사서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따고 육지에 나가 첫 직장을 얻고 처음으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며 배려와 관심을 준 이재영 상무와의 스토리를 그렸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라는 '사위지기사'라는 제목을 쓴 것은 자신이 스무살의 청년일 때 자신을 믿고 응원해 준 상사의 은혜에 감명 받고 잊을 수 없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또한 제주의 '촌놈'이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라도 밤낮으로 설계도면을 보면서 자신의 실력을 연마하는 모습에서 제주섬 출신의 끈질김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제주인들은 육지 어느곳에 가도 마음을 먹으면 특출한 성과를 많이 낸다. 거기에는 다른 지역 출신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성실감, 예의바른 행동으로 신뢰를 쌓기 때문이다.

하나의 성과가 성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전기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로서 자신의 실력을 연마하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 만약에 그 성공이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김택남 청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은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첫 사업에서 성공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만약 실패로 끝날 경우 사람의 마음도 약해지고 조바심까지 생겨 더욱 더 넓은 시야를 보고 미래를 보는 눈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자신의 실력을 연마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다. 특히 기술직 같은 경우는 완벽할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겸비해야만 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밤에는 학구파가 되어 잠을 3시간 정도만 자면서 자신의 꿈을 이룬 청년 김택남, 더 큰 도전을 위해서 이직을 결심한 그의 행보는 어찌되는지 다음편이 궁금해진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말 설고 물 다른 울산 현대중공업 시절,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다. 늘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곳을 향해 쉼 없이 노력했다.
말 설고 물 다른 울산 현대중공업 시절,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다. 늘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곳을 향해 쉼 없이 노력했다.

내가 육지로 떠나는 날, 아버지께서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겼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천 원짜리 석 장. 그러나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며칠 전, 장에 나가 깨를 팔아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묵묵히 그 돈을 받아 들었다.

“가서 잘 해라!”

그 날, 아버지는 사업에 대한 말씀은 없었다. 육지에 터를 잡기위해 떠나는 열아홉 살 아들에게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말뿐이었다. 짐을 들고 공항으로 나서는데 어머니가 나를 세워 부엌으로 불렀다. 그리고 찬장에서 5백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비행기 타고 갈 때 배고프면 밥이라도 사 먹어.”

(*79년 당시 4인 기준 근로자 가구의 소득은 한 달 평균 약 19만원이었다. 버스요금과 라면 값은 60원에 불과했고, 자장면은 지역에 따라서 2~300원이었다. 당시 화폐가치는 지금의 20배 정도.)

평생 모든 살림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비상금 한 푼 없는 어머니셨는데, 아마도 형이나 누이가 주고 간 용돈을 아끼셨던 모양이다.

“힘들면 와도 돼. 너는 공부를 많이 해서, 제주에서도 일할 데는 많아.”

나까지 4명의 자식을 떠나보내면서도 우리 어머니는 이별이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눈가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준 돈 5백 원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먼저 눈물을 흘리기 전에 서둘러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함께 취업을 할 친구들이 기다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18년을 품어준 제주와 부모님을 떠나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릴 육지를 향해 날개를 펼쳤다.

전기기기 기능사 자격증을 손에 쥔 나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취업이 결정됐다.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 현대중공업에서 기숙사 생활은 물론 병역특례혜택까지 받는, 꽤 후한 조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조건으로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추천, 자격증 취득, 내 실습점수가 주효하긴 했지만 ‘때’를 잘 만난 것도 한몫했다.

1970년대 말,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했고 기업은 더 많은 일꾼이 필요했다.

우리 선배들은 실력이 있어도 가질 수 없던 기회가 다행히 우리 때에는 제주까지 닿았다. 나는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았다. 육지에 가야 큰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우리 아버지의 말을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터라, 육지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육지에 올라가기만 하면 얼른 실력을 인정받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자신도 실력도 내게 충분하다고 믿었다.

키가 큰 나는 여럿이 모여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다.늘 가장 키가 큰 청년이 바로 나다.그러나 나는 키뿐 아니라 꿈도 가장 컸다.
키가 큰 나는 여럿이 모여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다.늘 가장 키가 큰 청년이 바로 나다.그러나 나는 키뿐 아니라 꿈도 가장 컸다.

철없던 나의 설익은 기대는 육지생활 일주일도 못돼 처절하게 깨졌다. 현장에서 하는 일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나 실습할 때 했던 것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선배들에게 일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는데, 나는 울산 말이 서툴렀다. 평생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내가 하루아침에 경상도 사투리를 익히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언제나 두 번, 세 번씩 물어야 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물어보자, 선배들은 나를 ‘덜 떨어진 섬 촌놈’으로 여겼고 보이지 않는 장벽을 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어수룩한 현장 막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구 하나 살갑게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공장에 가면 내가 투명인간이 된 듯했다.

‘이런 게 객지생활이구나!’

외로움이 뼈 속까지 밀려들었다. 아버지가, 형님이 겪은, 그리고 나의 후배들이 겪을 ‘차별’을 나 역시도 겪어야 했다. 그렇다고 장벽에 갇혀 속절없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열아홉 살 청년의 가슴에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그래, 어수룩한 섬 촌놈이 어떤 놈인지 보여주리라."

나는 앞으로는 절대 제주 사람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 다짐했다. 차별을 이겨내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고,실력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도 일을 가르쳐주지않으니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고 기숙사에 들어가면 오늘 조립한 제품의 설계도를 그려보았다.

끊임없이 익히고 부지런히 따라하자 조금씩 일하는 요령이 붙기 시작했다. 특히 제품의 설계도를 그려 버릇하자 제품의 원리를 쉽게 이해하게 됐다.

제품을 이해하게 될수록 빨리 조립을 할 수도 있었고 불량률도 낮아졌다. 내가 한 사람의 몫을 하게 되자, 내게 드리워진 장벽이 천천히 허물어 지기 시작했고, 내게 조립요령을 묻는 동료들도 생겼다.

그렇게 조금씩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될 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바로 현대중공업의 이재영 상무님이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현대중공업의 주요사업은 평택화력발전소 건설이었다. 당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서 전기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며 화력발전 붐이 일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평택화력발전소’는 특별했다. 지금이야 외국에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을 수출할 정도로 발전소 건설에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1980년대 초, 한국의 발전소 건설기술 수준은 미비했다.

평택화력발전소 이전의 화력발전소는 대부분의 부품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조립하는 수준에서 건설을 했다면 평택화력발전소는 부품의 절반 가까이 국산화를 통해서 건설하는 큰 도전이었다. 내가 조립을 담당했던 ‘전기 제어컨트롤 박스’도 국산화 부품 중에 하나였다.

컨트롤 박스는 인체에 비유하면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심장이 온 몸에 피를 보내 듯, 발전소에 생산된 거대한 에너지를 필요에 맞게 분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의 ‘히타치’, 미국의 ‘아이티’와 같은 해외기업의 기술을 이전받아, 설계부서에서 평택발전소에 맞게 컨트롤 박스를 설계했다. 그 설계도에 맞춰서 컨트롤 박스를 조립하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그런데 평택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발전소 시운전 시에 전기가 제대로 제어되지 않았다. 고압의 전기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자, 큰 화재가 발생했고 재산피해는 물론 사람까지 다쳤다. 첫 국산화 시도니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설계부의 부장님부터 하나 둘씩 평택으로 불려갔다. 그러나 제대로 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고 급기야 현장 막내였던 나까지 호출됐다. 현장에서 제법 일을 잘한다고 선배들이 추천해준 모양이었다.

서울대학교 출신의 설계부 사람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현장 막내인 내가 어떻게 하냐며 기대도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설계도면을 이해했고 직접 조립도 했기 때문에 문제점을 누구보다 빨리 짚어낼 수가 있었다. 컨트롤 박스에 전기가 흐르는 소리만으로도 문제를 알았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밤을 밝혀 공부하던 시절, 공부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지치지 않는 힘을 얻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밤을 밝혀 공부하던 시절, 공부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지치지 않는 힘을 얻었다.

접점이 잘못 물려있는지, 접점이 잘못 붙어있는지 단박에 찾아냈다. 내가 불량품을 찾아내고 잘못 물려진 접점을 고쳐 내자, 당시 총괄 설계를 맡고 있던 이재영 부장님은 내 소속과 이름을 물었다.

“조립부의 김택남입니다.”

“이 사람, 설계부로 발령 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재영 부장님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시 나는 병역특례혜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가진 자격증 외에 다른 부서에서 근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서류상에 서는 조립부에 있었지만 출근은 설계부로 했다. 그곳에서 해외에서 오는 도면을 수정하거나, 조립된 제어판의 A/S를 맡았다.

하나 둘씩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고 마침내 평택화력발전소는 부품의 45%이상 국산화기술로 대체하며 완공할 수가 있었다. 오랜 동안의 평택근무를 마치고 울산으로 돌아오자 나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모범사원 표창장’을 수여했다.

모든 사원이 모인 강당에서 그 표창장을 받으며 내가 가졌던 목표 하나는 이뤘다. ‘어수룩한 제주 촌놈의 힘’이 뭔지 그들에게 똑똑히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별을 떨치고 내 능력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설계실 근무는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됐고 훗날 사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지멘스’(siemens)나 ‘지이’(GE)와 같은 수준 높은 해외기업의 기술이 막 이전되는 시기였고 나는 새로운 기술을 남보다 먼저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현대’라는 대기업 울타리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작업방식을 배울 수가 있었던 것도 나에게 큰 힘이 됐다. 무엇보다도 평택발전소 근무를 통해 나는 성취(成就)의 힘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평택발전소가 시운전하는 날을 잊지 못한다. 발전이 시작되면 생명을 얻은 듯이 뻗어가는 전기의 힘은 나를 가슴 뛰게 만들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만드는데 내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 무언가를 만들어 이뤄냈다는 것이 스무 살 청년의 가슴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내가 울산의 조립현장에서 절대로 깨닫지 못할 기쁨을 나는 평택에서 얻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회를 준 사람은 이재영 상무(그후 진급)님이다.

이재영 상무님은 이후에도 나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 말씀 드리자, 함께 대학을 알아봐주셨고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은 단축근무를 허락해주셨다.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 상무님의 배려만 받을 수는 없었다. 단축근무를 하는 대신에 쉬는 날에도 회사에 나가, 내가 끝내지 못한 일을 마쳤다. 그런 내가 대견했는지 상무님은 작은 것 하나라도 챙겨주려 노력하셨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밤을 밝혀 공부하던 시절, 공부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지치지 않는 힘을 얻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밤을 밝혀 공부하던 시절, 공부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지치지 않는 힘을 얻었다.

나를 알아주시고 중용해주신 이재영 상무님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병역특례를 마치고 기능부에서 기술부로 옮기려는 내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상무님이 꽤 애를 써주셨는데 회사규율에 어긋난다며 불가(不可)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더 큰 도전을 위해서 이직을 결심했고 사표를 썼다. 내 사표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상무님은 밥이나 먹자며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큰 손님을 대접하듯 사모님이 직접 차려주신 푸짐한 상을 받았다. 상무님은 배은망덕한 부하 직원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셨다.

“미안하네. 나도 애써봤는데…, 회사에서 자꾸 안 된다고만 하니….”

나의 이직에 상무님은 당신이 더 미안해하셨다. 송구스러운 마음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자네는 성실하고 머리도 좋고 야무져서, 어디 가서도 잘할 거야.”

떠나는 나에게 상무님은 격려와 축복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상무님을 뒤로 하고 오는 길,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士爲知己死)는데 나는 그런 선비는 못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돌이켜보면 나의 성공은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홀로 거둔 성공도 없다. 모든 사람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이뤄지는 법이고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갚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은혜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아래로 흐른다고 믿는다. 불안한 청춘, 나에게 등불을 밝혀준 이재영 상무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당시의 나와 같은 젊은이들에게 길을 밝혀줄 등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 닦은 길을 걸어왔듯이 누군가 내가 닦은 길로 걸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안한 것은 이재영 상무님이 밝혀준 빛처럼 나도 환한 빛을 비출 수 있는지 한번쯤 나를 돌아볼 시간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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