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2)식게떡과 만년필
[경제인 칼럼](2)식게떡과 만년필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08.09 18: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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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지난 첫 편에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을 게재하며 본격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 첫 글을  몇 자 옮기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제주인들에게 누구나 배고팠던 시절, 식게는 희망이었다. 그 식게날은 새로운 음식을 맛보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으면서 김회장은 그러한 식게의 기억으로 인해 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만년필 사건으로 인해 성격까지 변했다는 것을 보면서 사람에게 낙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로 인해 더 강한 에너지를 발휘해 김 회장이 성공이란 목표가 뚜렸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어려운 상황을 포기하지 않고 이겨낸 김택남 회장의 도전과 집념과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 가난한 시기에 가졌던 기억으로 인해 그가 왜 텃밭에 대해 애정을 갖고 가꾸고 있는 지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오늘 '식게떡과 만년필'의 사연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헤쳐왔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편집자 주]

가난한 내 고향 제주, 바람 많은 제주
가난한 내 고향 제주, 바람 많은 제주

 

◆식게떡과 만년필

얼마 전, 아내가 하나와 두나, 두 딸을 데리고 서울에 일을 보러 올라가자, 집안에 남은 사람은 막내아들 태호와 나 단 둘뿐이었다.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엄마가 없으니 아빠 사정을 좀 살펴줬으면 좋으련만, 태호 녀석은 아빠의 사정은 아랑곳도 없이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먹을 것을 찾았다. 쇠도 씹어 먹을 수 있는 나이니 자율학습을 끝내고 오죽 배가 고플까하는 마음에 아내가 준비해 둔 밑반찬에 밥을 차려줬지만 서툰 아빠의 식탁이 아들 녀석 입맛에는 맞지 않아보였다.

“오늘은 대충 먹고 자.”

익숙지 않은 부엌일에 아들 눈치가 보인 나는 아들에게 되레 큰소리를 쳤다. 그 때 나를 구원해 준 초인종이 울렸다.

하얀 곤밥을 실컷 먹고 싶었던 우리들의 꿈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제사 지낸 음식인데요, 맛 좀 보시라고.”

이웃이 건네 준 접시에는 제사를 지낸 고기며 떡이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그게 뭐야, 아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현관문을 닫기도 전에 태호가 달려와 물었다.

“이게 식게떡이라는 거다.”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육지에서 나고 자라 제주도의 풍습이 아직은 낯선 태호에게 제주의 제사와 제사음식을 나누는 풍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지만 아들의 관심은 먹을 것에만 향해 있었다. 밥상에 이웃이 건네 준 접시를 올려주자, 태호는 그 음식을 맛나게 먹기 시작했다. 제사음식을 먹고 있는 아들을 보자 내 마음은 어린 시절 한림으로 향했다. 맛이 좋다며 그릇을 싹싹 비우는 아들을 보고 난 한마디 던졌다.

“이게 다 아버지가 성공해서 얻어먹는 줄 알아라.”

개상어(존다니)를 한 입 물고 있던 아들은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였다. 하긴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아본 적이 없는 요즘 아이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식게떡만 보면 서운해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가난했다. 막 전쟁의 상처를 벗어난 1960년대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지만 우리집의 가난은 남들보다 깊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부쳐 먹을 밭 한 뼘 물려받은 것이 없었으니 아버지에게 가난이 대물림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우리 밭이 없으니 부모님은 남의 밭에서 일을 해야 했다.

해 뜨기 전부터 해진 후까지 부모님은 부지런히 김을 매고 밭을 가꿨지만 바람 많은 제주에서 밭농사도 시원치 않았고 더구나 남의 밭에서 일하는 품삯은 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머니 아버지 손에 남는 것으로 자식 여섯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언제나 빠듯했고 우리는 늘 굶주렸다.

어린 시절 나의 놀이는 늘 배고픈 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바다에 나가 작살로 고기를 잡고, 들에 나가 촐(꼴)을 베어 소를 먹였다. 오름에 올라 바위를 일궈 지네를 잡기도 했다. 마을에는 지네를 사가는 할망들이 있었고 그 할망들에게 산에서 잡은 지네를 파는 것이 우리들의 유일한 용돈벌이였다. 그러나 지네를 잡는 아이들은 언제나 넘쳤고 할망들은 언제나 인색했다. 하루 온종일 열심히 지네를 잡아도 풀빵 하나 사먹기 힘든 날도 많았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 일 년 내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은 곤밥을 먹을 수 있는 제사 때였다. 제주의 다른 집들처럼 우리 어머니도 명절날이나 제사 때면 아끼고 아꼈던 쌀로 밥을 지었다. 비록 보리쌀이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제사와 명절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귀한 곤밥이었다. 그러나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몫을 덜어내고 나면 남아 있는 곤밥은 넉넉지 않았고 그 하얀 곤밥을 실컷 먹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의 꿈은 좀처럼 이루기 힘들었다.

바람 많은 제주, 농사를 지으려면 육지보다 서너 배의 사람 품이 필요하지만 육지와 같은 수확량을 기대하기 어렵다.

당시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은 우리집의 제사뿐이 아니었다. 이웃의 제사도 떡을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육지에서도 제사음식을 나누는 풍습이 있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친척이 되는 제주에서 제사음식을 나누는 것은 특별한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모두 어렵고 힘들었지만 제사 때만 되면 넉넉히 음식을 장만하고 서로 나눠 먹으며 친목을 쌓는 것은 제주의 끈끈한 풍습이었다.

내가 대여섯 살, 채 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무릇 배고픈 아이들 눈치는 쏜살보다 빠른 법이다. 어느 집에서 돼지비계에 메밀떡 지지는 소리가 돌담에서 새어 나오면 평소보다 배가 더 고팠다.

그런 날은 바다나 들, 오름에도 나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정낭 앞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제나 저제나 떡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올레 길 끄트머리에 대나무 쟁반에 떡을 든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우리집이다."

떡을 든 아주머니가 가까워질수록 허기가 심해졌다. 나는 까치발을 더 높이 들어 돌담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떡을 든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내 눈에는 쟁반에 든 떡에 대한 염원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내 눈을 피하고 나를 지나쳐 건너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루 온종일의 기다림이 허망하게 끝나버렸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건넛집 정낭 앞에서 아주머니가 나오기를 서성거렸지만 건넛집에서 나온 아주머니는 빈손이었다.

그런데도 희망은 나를 괴롭혔다. 혹시나 내가 아주머니를 따라 나온 틈에 다른 사람이 집에 떡을 가져다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지만, 우리집 부엌도, 마루도 썰렁하기만 했다.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사라지자 눈물이 새어나왔다. 놀다 들어온 형님이 왜 우냐고, 누가 때렸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해가 지고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올 무렵, 외할머니가 떡을 들고 집으로 찾아오셨다. 우리집을 빗겨간 떡이 외할머니 댁에는 나눠진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남겨준 떡을 먹으면서도 내 울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할망네는 주면서 우리집은 왜 안 줘?”

어린 나는 우리집만 빼놓고 떡을 돌린 아주머니에 대한 원망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았다. 이유를 설명해주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주지 않은 떡을 기다린 서운함을 어머니가 달래주길 바랐던 것 뿐이다. 어머니는 잠시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내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내 녀석이 왜 이리 말이 많아, 어서 떡 먹고 자!”

사실 남들보다 더 어려운 형편이었던 우리집은 제사를 지내도 이웃들에게 떡을 돌리지 못했다. 외할머니네와 사촌들과 조금 나누고 나면 우리 형제 먹을 것도 부족했으니 이웃들과 나누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간 떡이 없으니 들어올 떡도 없다는 것을 어머니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당신의 막내아들이 하루 종일 그 떡을 기다렸을 생각을 하니 먹먹해지셨을 테고 그 안타까움을 불호령으로 푸셨다.

제사음식을 나누며 이웃과 정을 돈독히 하는 ‘의식’에 끼지 못할 만큼 우리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기엔 내가 어렸고, 우리 어머니의 자존심은 강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나기도 하고 서운해지기도 한다.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불편한 것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에게 가난은 외면이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메밀떡 하나 받지 못할만큼 다른 이들 관심 밖에서 서성이는 것. 서운함과 외로움이 자꾸 마음속에 쌓이는 것. 나에게 가난은 배만 고프게 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까지도 허기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끔 가난은 나에게 부당한 대우까지 참게 만들었다.

판포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이 된다. 초등학교 무렵,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야무진 학생도 아니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평범한 학생들 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내가 잠시 학교에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우리 반 급장은 양왕국이라는 친구였다. 공부도 잘했고 집 안 형편도 근방에서는 꽤 넉넉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누나가 선물해줬다는 만년필을 가지고 있었다.

4학년밖에 되지 않는 초등학생이 만년필이 뭐가 필요했을까마는, 당시 만년필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고가품이었고 왕국은 만년필을 자랑하기 위해 학교에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체육시간 당번은 하필 내 차례였다. 친구들이 운동장으로 나간 한 시간 오롯이 혼자서 교실을 지킨 후, 왕국이 돌아오자 교실은 난리가 났다. 왕국의 만년필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왕국은 범인으로 체육시간에 당번을 선 나를 지목했다. 선생님도 급장인 왕국의 편에 서서 나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다그쳤다.

내가 가져간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나는 만년필을 가져간 범인이 돼서 수업시간 내내 복도에서 손을 들고 꿇어앉아 있어야 했다. 쉬는 시간 사이사이 나를 두고 키득거리며 손가락질하는 친구들의 시선도 참아야 했다.

내 결백이 증명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쉰이 넘어 고향에 내려와 다시 찾은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나를 범인으로 몰아세운 당시 급장 왕국을 만났다. 그 때를 기억하냐는 말에 왕국은 깜짝 놀랬다.

“지금이라도 사과해!”

나의 농담 반, 진담 반 사과 요구에 왕국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아직까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몰랐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비록 결백이 증명되기는 했지만 그 때의 사건은 나를 크게 바꿔놓았다. 활발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나는 그 사건 이후에 조용한 학생이 되었다.

가난하다는 것은 멍에가 돼서 너무나 쉽게 다른 이의 편견 한가운데 서게 만들었고 사람들의 삐딱한 시선을 참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인 것이 편했다. 그리고 본래 내 성격을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빠의 어린 시절, 먹을 쌀이 없어 늘 배가 고팠다면 태연한 표정으로 “그럼 라면을 드시죠?”라고 말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가난이 배만 곯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허기지게 만들었다“고 아무리 말로 이야기하고 글로 쓴다고 한들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모습

나의 어린 시절을 공감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내 삶은, 그리고 나와 같은 세대의 아버지들은 마음까지 허기지게 만들었던 가난을 떨쳐내기 위한 투쟁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겪었던 그 절대빈곤을 대물림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심히 살았던 우리네의 성과일 것이다. 나는 얻어먹지 못한 식게떡을 맛있게 먹는 태호를 보며 내 삶의 열매를 먹는 듯해 왠지 모를 뿌듯함이 몰려왔다. (See You at the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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