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12)포항시 남구 상도동 '태평양기전'
[경제인 칼럼](12)포항시 남구 상도동 '태평양기전'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10.17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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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김택남 회장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김택남 회장이 다녔던 판포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에 올린 '포항시 남구 상도동 태평양기전' 제목은 김택남 회장이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자신의 첫 기업으로 포항시에 설립한 전기회사 상호명이다.

이제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온갖 감정들, 간판을 보면서 다짐을 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제주의 청년이 외지에서 회사를 차리고 첫 출발을 했다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가슴이 뜨거웠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목표가 뚜렷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제주를 떠나며 성공하고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했던 결심을 한 번 더 머릿속으로 스치는 부모와 친구들과의 모습을 통해 굳건하게 다졌을 것이다.   

월급쟁이의 새희망, 김 회장이 "월급쟁이는 기업의 우산 밑에서 일을 배운다"라는 말을 음미해보면 이끌어주는 선배도 있고 일을 가르쳐주는 상사도 있고 동료들도 있기에 안정적이라서 쉽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게 어렵다.

왜냐하면 사업은 스스로 하는 것으로 모든 외로움과 두려움을 혼자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회장은 여기서 중요한 '선택'을 한 것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새로운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모험적이다.

이 선택은 다른 말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익숙한 환경에서 새로운 환경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그러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달콤한 결과인 성공을 누릴 수 있다.  '변화'를 다른 말로는 '용기'라고 할 수 있다.

변화하려고 생각해도 용기가 없기에 주춤거리는 것이다. 김회장의 고심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용기있게 주사위를 던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이 탄탄하게 마련이 안됐다면 100% 실패하는 사업으로 이어질 것이다. 자신의 실력이 최고의 상태, 최적의 상태일 때 어떤 상황(위기나 사업 수주 등)이 와도 혼자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사업은 외로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월급쟁이는 세월이 빨리 안 간다고 투덜거리고, 사업가는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고 애를 탄다는 말을 했다.

직원들의 월급을 주는 날이 엄청 빠르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그 직원들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사업가는 목숨을 거는 것이다.

여기서 김 회장은 실력이외에 인간관계를 잘 이어졌기에 관련 회사에서 수주들이 들어 왔던 것이다.

본문에서도 나온 얘기지만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인간성이 나쁘면 일을 맡길 수가 없다.

30대의 김회장은 태평양기전의 사장으로서 열심히, 직장에서 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고 짐작된다. 

자신의 실력을 믿기에 실패해도 돌아가서 월급쟁이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그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사업을 해야 된다는 말, 그 말을 되새기며 성공해야지 생각은 안했더라도 그 말이 인간 김택남 회장의 인생에는 큰 지침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부모(리더)는 자식(직원)들에게 큰 꿈을 심어줘야 한다.

안이하게 "여기서 밥만 먹고 살다 부르면 가야지" 하는 소박한 꿈은 좋은 말도 되겠지만 결코 큰 성장을 이룰 수가 없다.

김택남 회장이 보여준 모습은 제주도 남자의 자존심을 갖고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첫 사업에 대한 성공으로 맛을 보았기에 더 자신감을 갖고 열정적인 사업을 펼쳤을 것이다.

첫 성공이 굉장히 중요하다.

가족을 살리는 일,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직도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글을 보면서 오늘 새로운 선택을 위해, 새로운 변화를 위해, 새로운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새로운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자네는 월급쟁이의 희망이야.”라는 말을 실현한 김택남 회장이 바라보는 제주원도심
"자네는 월급쟁이의 희망이야.”라는 말을 실현한 김택남 회장이 바라보는 제주원도심 풍경 (2017년)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1초에 60번을 깜박이며 세상 어디에나 흘러간다. 그 전기를 필요에 따라서 길을 터주는 사람이 나와 같은 전기쟁이들이다. 화력발전소나 제철소 같은 거대한 공장만 전기의 길을 터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기는 우리 생활 곳곳에 필요하다. 이 책을 보기 위해 등을 밝힌 여러분의 집에서도 필요하고 거리의 가로등에도 필요하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소중한 것들 중에 하나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기통론 수업을 들으며 전기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고 내가 배운 전기는 평생 나에게 큰 힘이 돼주었다.

1992년, 광양제철소 건설을 마쳤다. `1985년부터 시작해 7년이 넘는 세월을 우리나라 최대 제철소건설에 플랜트를 설계했다는 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자 행운이었다. 광양제철소가 준공되자 나에게 포항 전근명령이 떨어졌다.

포항발령을 가장 반기는 사람은 아내였다. 고향인 울산을 떠나 객지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것, 거기다가 늘 공부에, 아르바이트에 바빠서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과 산다는 것은 아내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빈틈을 메워준 동료이자 이웃들도 함께 포항으로 발령이 났으니 아내에게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광양이랑, 포항이랑 바다 냄새부터가 달라.”

아내는 고향이 가까워오자 설레기 시작했다. 결혼하자마자 낯선 광양에서 7년을 살고 두 아이의 엄마가 돼, 돌아오는 고향이니 설레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내 결심도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렇지만 달라진 내 눈치를 알아채지 못할 아내가 아니었다.

“당신 무슨 일 있어요?”

아내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내 결심을 털어놓았다.

“나 회사 그만 둘까 봐.”

아내는 놀란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왜요?”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이야기하자,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아내와 같은 반응이었다.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에서 나는 상사와 동료, 후배에게까지 인정받은 직원이었고 남들보다 빠른 승진을 하는 이른바 ‘엘리트’사원이었다. 거기다가 ‘신성엔지니어링’의 설계 아르바이트까지, 월급쟁이치고는 적잖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니 주변의 걱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꿈은 안정적인 월급쟁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인정받는다고 하지만 나의 학벌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승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끝이 보이는 자리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가 되었다.

설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 혼자 사업을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나의 설계는 주변에 꼼꼼하기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나에게 설계를 의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현대중공업 시절에는 설계뿐만 아니라 제작도 직접 해봤기에 내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사업을 시작해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용기와 패기를 잃기 전, 내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들었던 사업타령 때문이었는지 육지로 떠나오면서 나는 늘 내 사업을 일구고 싶었다. 미래는 늘 알 수 없고 성공은 미지수였지만 서른 두 살, 아직 젊음의 열정이 사라지기 전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1990년대 초, 우리나라에는 건설 붐이 불었고 모든 건설에는 전기공사가 빠지지 않았다. 발전소와 제철소의 전기설계를 해 봤기에 어떤 전기공사 설계라도 자신이 있었다. 설령 사업에 실패한다고 해도 어디든 쉽게 재취업이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나의 꿈과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아내는 걱정을 거두고 나를 믿어주었다. 부지런한 나의 성품을 옆에서 지켜봤던 아내였기에 크게 성공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낭패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표를 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문이 나자 상사들은 돌아가며 나를 잡았다. 무슨 일이냐, 대우가 부족하냐, 지금까지 같이 고생해놓고 왜 그만두느냐며 사표수리가 늦어졌다.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나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 이제 인사드립니다. 다음 주부터는 회사 밖에서 뵙겠습니다.”

사표가 수리되기 전날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근무했다. 나에게 전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준 회사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었다. 근무시간이 끝나고 떠나는 나를 위한 환송회가 벌어졌다. 못 마시는 술이지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돌아오는 술잔을 마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환송회 자리에서 동료들은 회사에서는 하지 못했던 속내들을 하나 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 과장님 용기가 부럽습니다.”

후배들은 안정된 회사를 그만두고 떠나는 나의 용기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러자 부장님이 한마디 던지셨다.

“그게 용기만 가지고 되는 줄 알아? 김 과장은 그만한 능력이 되니까, 사업을 시작하는 거지.”

후배들의 막연한 기대에 부장님은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주었다.

“사업이 능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많을 거야. 힘든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와.”

오랫동안 같이 고생했던 동료를 떠나는 내게 예상외의 격려가 쏟아졌다.

“자네는 엔지니어들의 자존심이야, 월급쟁이들의 희망이라고. 자리 잡고 사업 잘해야 해!!”

늘 쳇바퀴처럼 변함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나에게 동료들은 자신의 꿈을 담아 있는 힘껏 응원을 해주었다.

동료들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받았고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이제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의 그늘 없이 스스로 내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나는 포항시 남구 상도동에 ‘태평양기전’이란 이름으로 회사를 건립했다. 말이 건립이지 당시 내 손에 든 돈은 퇴직금 300만 원이 전부였다. 가진 돈이 크지 않으니 처음부터 번듯한 공장을 짓거나 기술자를 채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설계와 제작을 나 혼자 담당하는 아주 작은 소기업에 불과했다.

사무실도 사업을 하는 지인의 회사 한 편에서 더부살이로 시작했고 울산에 있던 처남에게 도움을 구했고 경리를 맡아 할 여직원, 그렇게 단 셋이서 시작했다. 사업초기 성적은 내 기대와 달리 저조했다.

전기설계에 관한 내 실력이 회사 안팎에서 차이가 날 리가 없는데 내게 주어지는 일은 작은 일뿐이었다. 자본과 실적이 검증되지 않았으니 누구하나 선뜻 일을 맡겨주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다. 자본과 실적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겼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아이들을 재운 아내가 슬그머니 내 옆에 앉았다. 설계와 제작을 나 혼자 담당했기 때문에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집에 들고 와 작업할 때가 많았다.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아내는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태평양기전으로 제주에 꿈을 이룬 천마그룹 직원들 체육대회 모습

손이 작고 야물었던 아내는 내가 시키는 대로 전선을 물리고 접점을 찾으며 제작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내게 무엇보다도 고마웠던 것은 아내가 나와 함께 같은 꿈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몰려오는 잠을 쫓아가며 아내와 나는 수·배전반을 제작하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곳에 우리들의 미래가 있었다. 그렇게 아내의 손을 빌려도 직원 둘 월급을 주기도 빠듯한 시간을 견디자,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거 포스코에 들어갈 컨트롤 박스인데 태평양기전에서 설계· 제작 가능해요?”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에서 일할 때 얼굴을 보았던 업체 사장의 연락이었다. 전기 컨트롤 박스 제작에 환했던 나는 보자마자 견적을 낼 수가 있었다. 클레임 없이 일을 끝낸다면 적잖은 수익이 날 수주였다. 설계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신생 회사에 맡기기엔 수주 금액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큰 수준데 저희한테 맡겨도 괜찮으시겠어요?”

이렇게 빨리 큰 기회가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업체 사장은 그제야 사실을 꺼냈다.

“우리가 설계 제작하기는 좀 어렵고, 포스코에 들어갔더니 태평양기전에 일을 맡기면 아주 좋을 거라고 하도 칭찬을 해서…”

나의 행운이 동료들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동료들의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잠을 줄여 설계를 끝내고 자재를 발주했다. 자재를 기다리면서 설렘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곧 내가 설계·제작한 컨트롤 박스가 ‘태평양기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건네진다는 것이 행복했다. 늘 가는 시간은 아쉬운 법이지만 그때처럼 쉬이, 아쉽게 흘러간 적이 없었다.

무사히 납품을 마치고 동료들의 선물과 같은 일이 끝나자, 내 손에 주어진 돈은 자그마치 6000만 원이었다. 나 혼자 설계와 제작을 담당했기 때문에 다른 회사보다는 남는 이익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6000만 원은 나의 예상보다도 많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산을 아무리 다시해도 남은 돈은 같았다. 겁이 덜컥 났다. 아무리 능력있는 사원으로 인정받아도, 아르바이트로 가욋돈을 벌어도, 벌기 힘든 돈을 여섯 달 만에 번 것이었다. 남자가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머리에 스쳤다. 그리고 부장님의 마지막 격려가 생각났다.

“자네는 월급쟁이의 희망이야.”

월급쟁이는 기업의 우산 밑에서 일을 배운다. 이끌어주는 선배도 있고 일을 가르쳐주는 상사도 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동료들도 있다. 그래서 안정적이긴 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스스로 하는 사업은 다르다. 모든 외로움과 두려움을 혼자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성공의 열매는 크고 달았다. 다만 성공에 이르는 길이 멀고 험할 뿐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들의 희망이 되었다. 그들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현실로 이루어 가는 나를 동료들은 자기 일처럼 성원하고 있었다. 그 멀고 험한 길을 같이 갈수 없어도 조금 질러 갈 방법을 나에게 찾아 주었다. 처음 맛본 성공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은 그들이 나에게 준 희망의 무게를 실감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See you at the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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