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3)"나는 이 집에 안 들어갈 거다"
[경제인 칼럼](3)"나는 이 집에 안 들어갈 거다"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08.16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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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본문 두 번째인 "나는 이 집에 안 들어갈 거다"라는 내용은 고향 한림에 부모님을 위해 주택을 지어 드리고 난 뒤 어머니와의 심리 관계를 서술했다. 자식들은 이다음에 성공하면 제일 먼저 고향에 부모님을 위해 반듯한 집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렇게 마음은 앞서지만 실제로 집을 지어서 부모님께 효도하기가 쉽지 않다.

김택남 회장은 이글에서 자신이 목표한 것은 꼭 하고야마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어릴 적 어머니가 보여준 배고프고, 가난할지언정 남한테서 물자나 물품을 받는 것은 쉽게 수용하지 않았던 그 어머니의 선비정신 같은 것을 물려받은 느낌이다.

그래서 어느덧 성장하면서 부모님께 성공이라는 희열을 만끽할 수 있도록 부모님이 계신 고향에 집을 짓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믿음으로 자식을 키운 것이다.

그것이 미신이든 아랑곳 하지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관철 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완수하는 부모님의 그 정신, 마음을 아들은 알고 그 뜻에 따르게 되는 것이다.

직장이든 국가의 지도자는 자신이 정한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성 혼란으로 시간만 헛되게 소비되고 남은 것은 분열뿐이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들의 마음도 포용과 이해라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된다. 어머니가 웃으면 아이는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된다. 어머니는 가정에 가장 큰 안식처이고 자랑인 것이다. 어머니의 주름살을 펴게 하는 것, 그게 자식의 도리인 것이다.

오늘 "나는 이 집에 안 들어갈 거다" 라는 사연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수용했는지 아니면  내 생각을 관철시켰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편집자 주]

무뚝뚝한 어머니와 자상하신 아버지...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늘 떨어져 지내셨지만그 시간을 아쉬워하시며 지금은 어디든지 두 분이 꼭 함께 다니신다
한림 부모님댁 전경...시골집치고는 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부모님을 모시는 정성에 과한 것은 없다

10여 년 전쯤 육지에서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되자, 나는 고향 한림에 부모님을 위한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내 욕심껏 집을 설계하다보니 건설에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고 주변에서 촌에 짓는 집치고는 과하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모든 성현이 말씀하시길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기길 다 하여라’ 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큰돈이 들더라도 당시 여든이 바라보시는 부모님께 최고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은 것이 아들의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 지독했던 가난이 벤 돌 벽이 허물어지고, 대신 번듯한 벽돌로 단장된 집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이 한림까지 닿는 것이 자랑스러웠는지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으셨다.

주위 이웃 어른들도 두어 분씩 짝을 지어 우리집이 지어지는 광경을 구경하시곤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뭐가 못마땅하셨는지 집이 지어지는 내내 시무룩한 표정이셨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시냐고 여쭤도 묵묵부답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은 집이 다 지어진 후였다.

“나는 이 집에 안 들어갈 거다.”

벌써 새 집에 이삿짐을 풀고 있는데 어머니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니 나와 형제들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머니, 왜 새 집이 마음에 안 드세요?”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겨우겨우 그 이유를 털어놓으셨다. 새 집에 굿도 하지 않고 들어가 살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신을 모시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 결혼을 할 때도 흔히 보는 궁합도 한번 본 적이 없고 하다못해 이사할 때도 ‘손 없는 날’을 찾지 않는다.
그런 것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나쁜 말을 들으면 불안해지고 좋은 말을 들으면 자만해지기 쉽다.

미신에 얽매여 내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되면 결정을 미루게 되고, 결정이 늦어지면 기회를 잃게 된다.

평생을 살아오며 나는 언제나 나의 판단을 믿었고 그에 따른 결과도 내가 책임지려 노력했다. 그런 아들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는 집이 지어지는 내내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 계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자 죄송스러운 마음이 몰려들었다. 부모님을 위해 지은 집 때문에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 드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굿을 하면 들어가 사실 거예요?” 굿을 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금세 표정이 밝아지셨다.

내가 미신을 믿든 말든 상관없이 나는 어머니를 위해서 꽤 큰 성주풀이 굿을 벌였다. 좋은 집을 지어드리는 것보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효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굿 덕분인지 다행히 아버지는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다.
그렇지만 큰일에도 작은 일에도 걱정부터 앞서는 우리 어머니 마음을 바꾸는 굿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모양이다.

지금은 아버지와 자식에 대한 걱정이 마를 날이 없지만 젊은 시절 우리 어머니는 억척꾼이었다. ‘ᄄᆞᆯ나민 도새기 잡앙 잔치ᄒᆞ고 아덜 나민 조름팍 팍 찬다’는 제주 속담이 있듯이 생활력 강하기로 문난 어멍들 사이에서 우리 어머니의 부지런함은 근방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집을 지키는 성주신께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를 할 때 올리는 굿이 성주풀이 굿이다. 어머니는 큰 집을 짓는 것보다 큰 굿을 하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하셨다
집을 지키는 성주신께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를 할 때 올리는 굿이 성주풀이 굿이다. 어머니는 큰 집을 짓는 것보다 큰 굿을 하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하셨다

여섯 자매의 맏언니로 철이 들기 전부터 동생을 돌봐야했던 우리 어머니는 등을 바닥에 대고 쉴 짬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결혼해서도 어머니의 삶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밭 한 뼘 물려받지 못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 기댈 곳은 두 분의 노동력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제주 어머니들이 물질로 집안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물질에는 영 소질이 없으셨던 모양이다. 물질을 못하는 대신 잠을 줄이고 먹는 것을 덜어내며 악착스럽게 부지런을 덜었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집을 지키는 성주신께 집을 새로 짓거나 이사를 할 때 올리는 굿이 성주풀이 굿이다. 어머니는 큰 집을 짓는 것보다 큰 굿을 하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하셨다.

1950년 6·25전쟁이 반발하자, 아버지는 자원해 참전하셨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나서자 당시 3살이던 내 큰형님과 가족들의 생계는 모두 어머니 몫이 되었다. 남편을 전쟁 통에 내보내고 마음 편한 아낙이 어디에 있을까? 어머니는 해뜨기 전, 남들보다 두어 시간 빨리 밭으로 나가면서도 어머니가 알고 있는 모든 신께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중에 휴가 나오는 사람들에게 아버지 소식을 묻고 무사하다는 소식에 졸인 마음을 잠시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총상을 입으셨다는 소식이 제주도로 전해졌다.

그렇지만 전쟁 통에 아버지가 누워계신 육지에 올라갈 방법이 없었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신께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것뿐이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아버지는 큰 후유증 없이 제주도로 돌아오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고 살림이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육지에 돈 벌러 올라가셨고 제주에 홀로 남은 어머니가 먹여 살려야 할 입은 하나 둘씩 늘었다. 어머니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억척이 된 것은 모두 배급 쌀 때문이었다.

전쟁 후 해외에서 원조 받은 쌀과 밀가루가 배급되기 시작했다. 그리 넉넉한 양은 아니었고 모두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나라에서 배급된 곡식에 손을 대지 않으셨다. 배고프다고 형님과 누이의 원성에도 어머니는 곡식을 아끼고 또 아꼈다.

아버지의 가장 큰 자랑은 당신이 국가유공자가 되신 것이다. 6·25 참전으로 총상을 입으셨지만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치셨다는 것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아버지의 긍지가 되었다.
아버지의 가장 큰 자랑은 당신이 국가유공자가 되신 것이다. 6·25 참전으로 총상을 입으셨지만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치셨다는 것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아버지의 긍지가 되었다.

어린 자식의 배를 곪게 만들며 모은 곡식으로 집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육지에 올라가 연락 없는 아버지 대신 어린 자식들을 이고 안고 업은 채로 다섯 번의 이사를 거쳐 내가 태어난, 그 집을 장만하실 수가 있었다. 우리 형님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모질고 강한 제주 어멍 그 자체였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도 형님들의 기억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머니는 나와 내 누이를 데리고 밭일에 나가셨다.

손이 야무진 누이는 어머니께 꽤 도움이 되는 일꾼이었지만 고작 아홉 살이 된 내가 한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서툰 밭일에 싫증이 났고 꾀를 부렸다. 일에 몰두하는 어머니의 눈을 피
해 언덕 위 솔밭으로 향했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깨어나 보니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이었다.

해가 지고 서늘한 바다 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주위 솔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다. 추위는 핑계였을 뿐 심심하고 무료했던 어린 시절의 불장난이었다. 장난삼아 붙인 불이 삽시간에 번졌고 어느새 어린 내가 혼자 끄기 벅찬 불로 커졌다. 언덕 위에서 나는 어머니와 누이를 애타게 불렀다.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어머니는 일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지만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으셨다.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던 누이도 어머니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겁에 질린 나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불을 끄기 위해 허둥대며 어머니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머니는 꾀나 피우고 말썽이나 부리는 내가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나를 홀로 내버려두셨다. 그리고 내가 다시는 불장난을 치지 않겠다고 반성하자 누이와 함께 언덕 위로 올라와 불을 끄는 것을 도와주셨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어머니의 속살을 본 것은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속을 불편해하시던 어머니가 읍내 병원에 다녀오시자 방 한구석에서 소리
죽여 우셨다.

외할머니가 달려오시고 이모들도 몰려왔다. 어머니가 큰 탈이 난 것은 눈치가 둔했던 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식 먹는 것까지도 아끼며 집을 사신 양반이니 아마도 어머니는 그때까지 평생 제대로 된 끼니를 드신 적이 없었을 거다. 먹는 것 없이 쉬지 않고 일만 했으니 몸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병원에서 어머니께 위암을 선고했다는 것을 이모들의 속닥거림에서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소리 죽여 우셨던 이유는 바람 앞에 촛불이었던 자신의 삶보다 당시 걸음마를 시작한 막내 동생 미숙의 걱정 때문이었다는 것도 이모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무뚝뚝한 어머니와 자상하신 아버지...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늘 떨어져 지내셨지만그 시간을 아쉬워하시며 지금은 어디든지 두 분이 꼭 함께 다니신다
무뚝뚝한 어머니와 자상하신 아버지...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늘 떨어져 지내셨지만그 시간을 아쉬워하시며 지금은 어디든지 두 분이 꼭 함께 다니신다

어머니가 몸져 누우시자 아버지는 어디서 흑염소를 한 마리 사오셨다. 어머니는 결혼 후 처음으로 두어 달 밭일을 쉬시며 아버지가 다려 오신 흑염소를 약처럼 받아 드셨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어머니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당시 부족한 의술은 어머니의 심한 위궤양을 위암으로 오진했고 어머니는 생애 처음 맞은 휴식과 기름진 음식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위암 선고는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이 났지만 그 사건을 통해서 나도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했다. 평생을 부지런히 일하고 아껴도 우리집에 드리운 가난은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가족 곁을 떠나서 돈을 벌기 위해 육지로 나가셨고 어머니는 채 어른이 되기 전의 자식들을 육지로, 일본으로 떠나보내셔야 했다. 가족들이 눈앞에 없으니 어머니의 걱정은 멀어진 거리만큼 느셨다.

그렇지만 떠난 가족들을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신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빌었듯이 제주의 모든 신께 당신 품을 떠난 자식의 안녕과 성공을 기원한 밖에는.

절대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나지만 내가 육지에 나가서 큰탈없이 사업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늘 자식을 위해 기도하신 어머니 정성 덕인지도 모르겠다.

평생 큰 욕심 없이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제사상을 푸짐하게 받는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 제사상을 차리는 어머니 곁에서 내가 입바른 소리를 한 까닭이다.

“돌아가신 후에 제사상 차리면 무슨 소용이 있나, 나는 어머니 아버지 살아계실 때 효도 다하고 제사상은 차리지 않을 거야.”

어머니는 그 소리에 나를 흘끔 보시고 마셨지만 진심을 이야기하신 것은 아주 오랜 후였다. 어머니는 제사를 위해서 육지에서 내려온 나에게 ‘얘는 내가 죽어도 제사상을 차리지 않을 녀석’ 이라며 10년도 지난 서운함을 털어놓으셨다.

어머니의 타박에 어린 날의 잘못을 깨달은 나는 어머니께 어머니의 제사상은 제주에서 가장 푸짐하게 차리겠노라 약속했고 어머니는 그제야 희미하게 웃으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제사상을 차리는 날이 되도록 더디 오기를 바라는 것은 머리가 희끗해진 아들이 부모님께 드리는 마지막 소망일 것이다. [See You at the Top]

초로의 아들이 부모님께 바라는 마지막 욕심은건강하고 다정한 두 분을 하루라도 더 모시는 것이다.
초로의 아들이 부모님께 바라는 마지막 욕심은건강하고 다정한 두 분을 하루라도 더 모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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