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9)젊은 날의 공부 법
[경제인 칼럼](9)젊은 날의 공부 법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09.27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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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 올린 '젊은 날의 공부 법' 주제는 김택남 회장이 결혼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법과 성공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대부분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고 난 후 직장 생활만 열심히 하고 공부하는 것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공부는 사실 학창시절 보다 직장생활하면서 더 많이 해야만 발전이 있다. 학창시절 공부는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졸업이라는 종착역에 기반을 두고 공부에 대해 마무리된 것처럼 그만두지만 직장생활에서의 공부는 바로 자신의 위치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것이다.

특히, 전문적 직장에서는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직장생활하면서 보고 느끼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글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것은 자신의 꿈을 위해 이루기 위해 잠을 줄이는 김택남 회장의 모습은 대학시험을 보는 고3학생보다 더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처럼 도전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성취감'을 맛보기 위한 것이다. 그 성취감을 맛보면 다음 도전도 주저않고 이뤄진다. 가정에서도 아이들에게 첫 도전 과제로 아이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을 먼저 제시한다면 다음에 도전 과제를 던져줬을 때 주저없이 하려고 한다.

김택남 회장도 어려운 가운데 도전했던 1급자격증을 따니 성취감에 다른 자격증도 도전하게 되고 즐겁게 땄을 것이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경제도 '도전'이라는 강력한 열망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성공을 위해 적어도 며칠만이라도 잠을 3시간 정도만 자는 일도 해 봤으면, 아니면 하루 종일 잠 안자고 공부하는 모습도 경험해 봤으면...그래야 살아가는데 할말이 생기고 인생의 발전도 있는 것이다.

첫 직장 현대에서 배운 정주영 회장의 "해 봤어?"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긴 김택남 회장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며 이 시대 젊은 친구들에게 이 한마디를 새기며 즐거운 도전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 김택남 회장의 '젊은날의 공부법'을 탐독하면서 자신의 꿈을 조금씩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우리 기술로 지은 첫 번째 제철소 광양제철소평택화력발전소 건설과 광양제철소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며 전기쟁이로 전문성을 익혔다. 그 10년의 세월은 내 인생의 귀중한 거름이 되었다.
우리 기술로 지은 첫 번째 제철소 광양제철소평택화력발전소 건설과 광양제철소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며 전기쟁이로 전문성을 익혔다. 그 10년의 세월은 내 인생의 귀중한 거름이 되었다.

경자씨와 결혼을 할 무렵, 나는 내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서 내 신분은 기능직이었다. 맡은 업무에 상관없이 서류상으로는 공장에 소속돼 있어 월급도 적었고 승진에도 제한이 있었다.

안정된 직장이긴 했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이미 결혼을 해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나는 도전을 선택했다. 지금은 포스코로 바뀐 당시 포항제철은 광양제철소 건설을 앞두고 설계업무를 안정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건립하고 경력사원을 모집했다. 당시 설계에 관한 엘리트들이 모두 모인 대규모의 회사였다. 전기설계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지만 내 서류는 그리 번듯하지 못했다.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야간 전문대를 졸업한, 막 병역특례를 마친 스물여섯 살의 청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신반의하며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다.

“해보기는 해 봤어?”

고(故) 정주영 회장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정주영 회장의 말처럼 우리는 지례짐작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산다. 스스로의 능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해보지도 않고 ‘안 될 것’이라며 노력도 하지 않는다. 만약에 내가 능력과 상관없는 ‘경력’을 걱정해서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오늘 날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합격소식에 아내는 반가운 한편 서운한 구석을 드러냈다.

단칸방이었지만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소꿉장난처럼 작지만 소소했던 살림 재미에 빠져있던 아내는 걱정이 앞섰다.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은 광양제철소 건설을 위해서 설립된 회사이기 때문에 광양에서 근무를 해야 했다. 울산 토박이였던 아내는 광양으로 이사 가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더구나 아내는큰 아이, 하나를 막 임신한 후였다. 아내에겐 기대보다 걱정이 많은이직(移職)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아내는 별 말 없이 나의 선택을 믿고 따라주었다.

우려와 달리, 아내는 광양생활에 쉽게 적응했다. 나와 같이 입사한 젊은 직원들이 광양제철소 건설을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고 아내도 또래의 젊은 아내들과 어울려 친분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내가 광양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나도 업무에 적응했다. 평택발전소가 우리 기술을 가지고 건설한 발전소였다면 광양제철소는 우리 기술을 통해 지은 첫 번째 제철소였다.

나의 업무는 이미 현대중공업에서 배운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비록 더 커지고 복잡한 전기설계를 담당했지만 기본을 제대로 배웠기에 어렵지 않았다.

백 리를 가고 천 리를 가도 모두 첫걸음부터 시작한다. 모든 일에 기본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몇 백 개의 전선을 배선해도 하나의 전선이 잘못 물리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설계부서의 김택남이란 사원이 꼼꼼하고 야무지게 일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사나 주변의 평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것은 아니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도면을 풀어내서 제철소에 맞게 설계하는 것이 좋았다. 주변 평가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택남씨는 토플시험 준비 안 해요?”

광양생활이 안정될 무렵 인사부의 동료가 나에게 물었다.

“토플이요?”

안 그래도 몇몇 선배들이 영어공부를 위해서 학원에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왜, 승진할 때 영어 점수가 필수잖아요. 토플 400점은 넘어야 승진돼요.”

승진이라는 말보다 ‘영어’라는 말에 솔깃했다. 현대중공업 시절부터 영어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해외에서 기술이전을 위해 자료를 보내올 때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었다. 물론 총무부에서 번역을 해주긴 했지만 전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총무부의 번역은 가끔 엉뚱할 때가 있었다. 영어를 배워두면 쓸모가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울산시절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승진’까지 걸려 있으니 더 이상 미루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영어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모든 공부가 그렇겠지만 특히 영어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우듯이 세상의 모든 단어를 새로 배워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학원에 다닐 여유가 없었다. 결혼하면서부터 제주 집뿐만 아니라 울산 처가에도 생활비를 보탰고 나의 첫 번째 보물 ‘하나’가 태어나 식구도 늘었다. 크게 부족하지 않았지만 학원에 등록하는 돈이 조금 아까웠던 것도 사실이다.

노력하면 요령이 따라온다는 생각으로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서 노력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열 손가락에 각각 단어를 적어 출근을 했다. 단어를 외우는 시간을 따로 낸 것이 아니라 업무시간 사이사이 단어를 외웠다. 하루에 10개의 단어일 뿐이지만 일 년이면 4천 개의 단어를 외울 수 있었다. 출퇴근하는 버스길은 나만의 독서실이 되어 책을 보거나 문제를 풀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열 손가락 하나하나 단어를 적어 외운 시간은 나를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의 최연소 계장으로 만들어주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열 손가락 하나하나 단어를 적어 외운 시간은 나를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의 최연소 계장으로 만들어주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출근버스였지만 그 시간도 허투루 버릴 수가 없었다. 부서회식이라도 있는 날에는 동료들의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지만 그때는 맥주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숙맥이었다.

술자리가 불편한 나는 밥만 먹고 집에 돌아와 다시 또 책을 폈다.

선배와 동료들은 ‘어린 녀석이 승진에 목을 맸다’고 수군거렸지만 꼭 승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향해가는 그 과정이 나는 좋았다.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영어에 빠진 몇 달, 나는 토플 성적표를 받아 들고 깜짝 놀랐다. 승진 자격요건이 되는 400점을 단박에 넘겼다.

선배들이 몇 번의 시도에도 실패했던 점수를 나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얻었다.

시험성적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승진을 했다는 것이다. 승진 후보자들 가운데 자격증과 인사고과 점수, 외국어 점수까지 요건을 충족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선배들은 토플의 벽을 넘지 못했고 동료들은 인사고과를 채우지 못했다. 설계부에서 계장을 단 것은 입사 2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고작 스물일곱 살에 나는 포항종합제철엔지니어링의 최연소 계장이 되었다.

승진했다는 나의 연락에 아내는 놀리지 말라며 믿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다.

승진은 했지만 승진 때문에 시작한 공부가 아니기에 나의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 영어에 이어서 내가 도전한 것은 소방설비 1급 자격증이다. 제철소 건설업무를 하면서 자격증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한정되기 마련이다. 이론적인 접근이 없으면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자격증은 무엇보다도 신뢰를 준다.

국가공인 자격을 가지면 국가공인 신뢰를 얻는다. 내 인생을 밝혀줄 빛은 ‘전기’에서 나왔고 전기에 관련된 모든 자격증을 따리라 결심했다.
자격증 시험만을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 있을 만큼 쉽지 않은 시험인데 나는 업무와 시험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다. 시간을 쪼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잠을 줄이는 거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는 3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한참 시험을 준비할 때 일이다.

매일 꺼지지 않은 내 방 불빛이 궁금했는지 동료의 아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하나 네는 왜 밤에 불을 안 꺼? 밤에도 켜져 있더니 새벽에도 켜져 있던데?”

“애들 아빠가 공부하느라고요.”

아내는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공공의 적’이 되었고 "하나 아빠가 고속 승진을 하는데 다 이유가 있다"며 동료의 아내들은 동료들을 괴롭혔다. 그 덕에 다음날 점심은 내가 사야했다.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소방설비 1급자격증 시험에 합격했고 서른두 살 때에는 전기공사기사 1급자격증마저 취득했다. 전기설비에 관해서는 이론에서나 현장에서나 ‘전문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온다. 잠을 편히 자지 못했지만 피곤한 줄 몰랐고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내 앞에 놓인 무수한 시험들은 즐겁게 도전했고 그 도전에서 얻는 성취에 행복했다. 최선은 스스로의 노력이 자신을 감동시킬 때 쓰는 말이라는데 그 시절의 나는 최선을 다했다. 목표를 세우고 그곳으로 직진해 달려가는 젊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름답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도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젊은이라 할 수 없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성공은 도전의 연속이다. 도전에 성공하면 자신감을 얻고 실패해도 최소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세상은 도전하는 자의 것이고 성공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걸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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