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5)"이 당 저 당해도, 괸당이 최고?"
[경제인 칼럼](5)"이 당 저 당해도, 괸당이 최고?"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08.30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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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이번에 ‘이 당 저 당해도, 괸당이 최고?’ 라는 제목의 글은 제주만이 갖고 있는 괸당에서 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적었다. 사실, 어머니가 안 계시면 이모에게 많은 것을 의지한다.

그러기에 이모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 이모의 사랑으로 인해 어린 시절 김택남 회장은 많은 감정을 드러내고 삶의 가치관을 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먼길을 찾아온 조카에게 밥상을 차려주려는 마음은 모든 이모들은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밥을 먹으면서 눈치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러한 밥을 씹으면서 빨리 먹고 돌아가기를 바라는 모습도 보게 됐고 그러한 밥을 먹으면서 밥의 의미도 알게 되고 입안에서 여러가지를 씹으면서 소화시켰을 것이다.

자고로 사람이 큰 인물이 된다는 것은 콤플렉스가 있어야 되는 것 같다.

그 콤플렉스를 만회하기 위해 사람은 부단히 노력하게 되고 결국, '성공'이란 이름으로만이 그 오랜 콤플렉스가 지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제목처럼 '괸당', 친척이 주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 그 친척이 있음으로 인해 자신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고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책이나 운동화 등 받는 사람이 열등감 같은 것을 갖지 않도록 배려하는 이모의 지혜를 알게 모르게 몸에 체득한 김택남 회장의 삶은 좋은 방행으로 흐른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선심에 대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철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게 성격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요즘은 왼손, 오른손 하는 일 알리기에 바쁜 시대인데 자신의 성격에 아직 맞지 않은 탓일 것이다.

여하튼 그러한 현재의 성격들이 어릴 적 그때부터 복합적인 감정들이 섞인 결과이리라. 괸당이 최고인 제주의 사람들의 진정성을 응원하며 오늘 '이 당 저 당해도, 괸당이 최고?'의 글,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나는 밥을 아주 빨리 먹는 편이다. 어렸을 때는 먹을 것이 귀해서 빨리 먹었고 육지에 나가서는 시간이 없어서 빨리 먹었다.

점잖은 자리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남들은 반도 먹지 않았는데 나는 밥그릇이 비워져 함께 먹는 사람들을 당황시킬 때도 가끔 있다.

고쳐야 할 버릇이지만 오랜 습관인지라 마음처럼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밥 먹을 때보다 빠르게 행동할 때는 밥값을 낼 때다.

우스갯소리로 밥값을 내지 않기 위해서 신발 끈을 묶으며 시간을 끌고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본다고 하는데 나는 신발도 채 고쳐 신지 않고 달려가듯 밥값을 낸다.

어려웠던 시절, 누군가에게 밥을 한 끼라도 얻어먹으면 배는 불렀을지 몰라도 마음은 무거웠다. 나에게 돈을 내라고 할 것도 아닌 데 밥을 사주는 사람이 밥값을 낼 때까지 왠지 조마조마했다. 항상 얻어먹는 처지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남에게 밥을 사줄 정도의 여유가 생기고 나서는 밥값을 낼 때는 언제나 서둘렀다.

함께 밥을 먹은 사람들이 혹시 어린 시절 내가 느꼈을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내 나름의 배려다. 이런 배려의 습관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 바로 나의 제주 괸당들이다.

제주에는 괸당문화가 있다. 친인척을 이르는 ‘권당(捲堂)’이라는 말이 제주에 와 괸당이 되고 육지 어디보다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됐다.

선거철에는 당이나 정책보다는 인척에 투표한다고 해서 ‘이당 저 당보다 괸당 최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괸당문화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살아남기 위한 제주 특유의 풍습이었다.

거지, 도둑, 대문이 없다는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을 잘 드러낸 정낭
거지, 도둑, 대문이 없다는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을 잘 드러낸 정낭

넉넉한 형편의 친척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지들에게 베풀고 나누며 서로 기댈 언덕이 되어 그 힘들고 지난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친척이라도 매번 도움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받은 도움은 언젠가 되갚아야 했고 되갚을 여력이 없었던 우리 부모님들은 친척들에게 도움을 바라지도 않으셨다. 없이 살아도 자존심만은 지키고 사셨던 분들이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나누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괸당들도 있었지만 어떤 괸당들은 가슴에 새길 상처를 주기도 했다.

우리 이모 중 하나는 읍내로 시집을 갔다. 당시 여관업을 했으니 근방에서는 제일 잘 살았을 거다.

우리 누이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이모네 여관에 취직을 했다. 어린 날 우리 누이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늘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살뜰하게 챙겨 준 것은 우리 누이였고 나는 가끔 누이가 보고 싶을 때면 먼 길을 걸어 이모네 여관집을 찾았다.

부모님은 일하는 사람 불편하게 왜 자꾸 찾아가냐며 나에게 눈치를 주곤 했지만 반가운 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먼 길을 달려갈 이유가 됐다.

이모도 때때로 찾는 조카의 방문을 반겼다. 거리보다 마음이 멀어진 친정 소식을 가지고 오는 조카니 이모가 더 기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모는 부모님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외할머니의 건강을 챙기기도 했다. 그리고 갈 때마다 먼 길 달려온 조카를 위해, 오랜만에 만나는 오누이를 위해 이모는 밥상을 차려주셨다.

이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누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당시 나에게 몇 되지 않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모의 눈치가 이상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묻는 외할머니의 안부도 건너뛰고 밥상부터 차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여관 문을 흘끗 보며 흡사 망을 보는 듯했다.

“이모, 누가 와?”

나는 평소와 다른 이모 때문에 밥도 먹지 못하고 이모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밥 한 술 떼지 않은 나를 보더니 이모는 한숨을 쉬었다.

“얼른 밥 먹고 가!

그리고 이어진 이모의 말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혔다.

“네 이모부 오기 전에!”

불안한 이모의 말과 표정에서 나는 그동안 나 때문에 겪었을 이모의 걱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주는 것도 없이 불쑥 찾아와 밥이나 축내는 군식구’ 이모부에게 나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은 친척이었고 그 불편한 속내를 이모에게 드러냈던 것이다.

먼 길을 찾아온 조카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이모는 이모부가 돌아오기 전, 밥이라도 먹여 보내고 싶었던 마음이었고 내가 이모부가 오기 전, 얼른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이모가 차려준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그리고 누나를 보는 둥 마는 둥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를 악물었다. 왜 부모님이 누이를 찾아가는 걸, 이모의 여관에 찾아가는 것을 걱정하셨는지 이해가 됐다.

없이 사는 친척은 말로 바라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만 폐를 끼친다는 것을 어머니는 돌려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의 자존심은 아팠다.

나는 거지도 아니었고 밥을 얻어먹기 위해 그 먼 길을 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진심과 상관없이 이모부에게는 나는 그저 부담스럽기만 했던 존재였다는, 넉넉한 형편에도 밥 한 끼 나누는 것이 아까운 친척이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상처가 됐다.

“네 누나는 잘 있든?”

집에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는 누이의 안부를 물었다.

“네.”

마음에 생채기가 난 나는 어머니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했다.

이모네 집을 다녀오면 미주알고주알 누나와 이모네 이야기를 풀어놓던 막내아들의 평소와 다른 대답에 어머니는 잠시 나를 바라보셨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으셨다. 말하지 않아도 굳어진 나의 표정에서 어머니는 미루어 짐작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다시는 이모네 집을 찾지 않았고 어머니도 왜 누나 보러가지 않냐며 묻는 일도 없었다.

거지, 도둑, 대문이 없다는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을 잘 드러낸 정낭
거지, 도둑, 대문이 없다는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을 잘 드러낸 정낭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어린 시절의 상처를 푸념처럼 털어놓고 있지만 모든 친척들이 우리 가족에게 인색했던 것은 아니다.

낙천에 사는 이모와 이모부는 우리 가족의 마음을 헤아려 상처받지 않게 배려해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그리고 내가 남들보다 쳐지지 않게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반은 그 이모 내외 덕분이다.

이모부 집에는 나와 동갑내기인, 그러나 나보다 1년 먼저 학교에 들어간 이종사촌이 있었다. 끼니를 때우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니 학교를 다녀도 책을 살 수 없었던 나는 모든 책을 그 이종사촌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러나 누구도 내가 헌 책으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종사촌의 책은 언제나 새 책처럼 깨끗했다.

매 학기 이모가 가져온 책을 보면, 대체 이 사촌은 학교에서 공부는 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책이 깨끗했다. 사촌에게 물려받은 것은 비단 책만이 아니었다.

사춘기가 시작되던 중학교 시절 나는 ‘운동화’를 신고 싶었다. 형편이 좋은 친구들은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신발에 따라서 친구들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운동화와 비교하면 내가 신던 고무신은 초라했고 그들의 운동화가 부럽기만 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져 우리집 형편을 뻔히 알고 있던 나는 어머니께 운동화를 사달라고 말 한번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가 찾아왔다. 쌀이며 보리며 가져온 꾸러미를 주섬주섬 풀던 이모는 나에게 꾸러미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거 영실이가 신던 건데 택남이 네가 신을래?”

이모가 건네 준 꾸러미에는 내가 소원하던 운동화가 들어있었다.

이종사촌이 신던 것인지 때가 타긴 했지만 아직 못 신을 정도는 아니었다. 성급해진 나는 이모에게 감사인사를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수돗가로 향했다.

그리고 서둘러 운동화를 빨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겨울이었지만 손이 찬물에 어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운동화를 빨았다.

한참을 수돗가에서 씨름을 하고 나자, 갑자기 목이 메었다. 묻은 때를 벗겨내자 운동화는 낡기는커녕 새것과 다름없었다.

이모는 행여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새 운동화를 사주는 대신 신던 것이라며 운동화를 건넸던 것이다.

그제야 이종사촌이 쓰던 새 책의 비밀도 알 수 있었다. 물려줄 책이나 물려받을 나를 위해 되도록 조심스럽게 아끼며 사용해 낙서 하나 허투루 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운동화를 한참 동안 아끼고 아껴 신었다. 그 신발을 신을 때마다 어린 내 마음까지도 헤아려 배려했던 이모의 마음이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이후, 나는 그 이모네를 우리 부모님처럼 생각하고 모시려고 노력한다. 누구보다 우리 가족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신 덕이기도 하지만 결코 그 이유만은 아니다.

자기 것을 내어주면서도 조심스럽게 배려했던 그 마음이 나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밥 한 끼를 얻어먹어도 불편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주는 것 없어도 고마운 사람이 있다.

나의 두 이모부는 내게 많은 것을 해주셨지만 무엇보다도 배려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다. 배려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감동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TV나 주변에서 불우이웃돕기 행사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불우이웃을 돕는 행사에 어느 단체나 회사에서 나왔는지 알리는 조끼 하나씩을 꼭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누구를 위한 봉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어느 단체나 회사에서 나왔는지 홍보하기 위한 행사처럼 보인다.

조끼를 맞춰 입을 돈으로 차라리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눔의 원칙이다.

천마에서 나눔의 행사를 할 때는 현수막 하나 걸지 않는다. 작은 것을 나누면서 생색을 내는 것 같아 부끄럽기 때문이다.

대신 더 많은 분들을 직접 찾아뵙고 생활의 어려움을 들으며 마음을 나누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내가 배운, 내가 실천하고 싶은 나눔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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