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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칼럼](6)누나의 반지
[경제인 칼럼](6)누나의 반지
  • 현달환 편집인
  • 승인 2020.09.06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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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에 '누나의 반지'라는 제목은 누나가 유일한 재산(?)을 동생을 위해 처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누나는 엄마의 대리모라고 할 정도로 마음이 넓다. 동생의 투정도 다 받아주는 누나의 마음에서 어린 택남은 엄마에게서 받지 못했던 새로운 형제의 우애를 느꼈다.

‘성공해서 돈을 벌어야지!’

택남은 여기서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  돈을 벌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누나의 반지로 인해 굳은 결심을 하게 된 것 같다. 아무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가슴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못하면 그 목표가, 결심이 희미해질 수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스쳐지나도 동생(택남)이 누나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을 것인데 누나는 부모에게 반항한 것이다. 그 반항이 동생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이다. 자신도 배움의 길이 멈췄는 데 동생도 자신처럼 멈춰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양보한 누나의 희생을 풀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성공'이라는 것을 열여덟 살의 택남은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우리들의 가정에도 누나가 있고 형님이 있고 동생이 있다. 보통 형제애가 강하면 서로 도와주고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누나의 도움으로 책을 사게 되서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 자격증도 취득하고 졸업 후 취직도 해서 결과가 좋게 나타났지만 그 후 택남은 누나의 은혜를 잊지않고 항상 챙겨드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누나가 없어요"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누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형제들이 곤경에 빠지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형제들이 발을 벗고 도움을 준다면 형제애가 강해지고 그 가정이 잘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그렇게 못하는 형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핵가족 시대로 변한 요즘, 형제들을 만나 함께 식사하는 것도 어려운 시대가 왔다. '누나의 반지'라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족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부모와 자식만이 아닌 형제애가 더해질 때 그 가족은 행복의 밀도가 더 커짐을.

앞으로 택남의 인생이 어떻게 성공으로 올라설지 다음편이 궁금해진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현무암 바위 길을 누나의 손을 잡고 다녔던 판포초등학교지나간 세월 속에 건물은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가슴속의 생생한 추억들이 더욱 아련해진다.
현무암 바위 길을 누나의 손을 잡고 다녔던 판포초등학교지나간 세월 속에 건물은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가슴속의 생생한 추억들이 더욱 아련해진다.

나는 3남 3녀 모두 여섯 형제의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한 분을 두었고 아래도 여동생 둘이 더 있다. 그래도 다행히 여섯 형제의 허리에 있어 형들과 누이에 대한 추억이 다른 형제보다는 많은 편에 속한다. 먹고 살기 팍팍했던 제주는 우리 형제를 다 보듬어 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자랄 때 우리 형제들이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은 추억이 없다. 내가 제주에서 자랄 때 이미 나이 든 형님들은 객지에 나가 생활하셨고 나도 형님처럼 나이가 들자 육지에 터를 잡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가르쳐주신 것이 형제 간의 우애다. 곧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할 것을 아셨던 부모님은 같이 사는 동안이라도 형제 간의 위계와 우애를 심어주시려 노력하셨다.

늘 바깥일에 바쁜 당신들을 대신해, 손위 형제들은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라 가르쳐주셨고, 혹시 형제간의 다툼이 있을 때는 시비에 상관없이 언제나 손위 형제의 편을 드셨다.

아무리 부모님이 위계를 잡으려고 노력하고 형님들이 군기를 세운다고 하지만 늘 터울이 붙어있는 형제 간은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 데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서운하고 미안한 것이 쌓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명절이나 제사때 형제들이 모이면, 어린 날 서로에서 미안하고 서운한 것을 털어놓곤 하는데 나는 늘 바로 밑 동생인, 정숙의 타깃이 된다.

사소한 일에도 동생을 야단치고 어린 동생에게 내 일까지 떠넘긴 것을 보면 나도 우리 형님들처럼 무서운 오빠였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왜 그리 엄한 오빠밖에 되지 못했는지 지금은 늘 동생에게 미안하다. 못난 나와 달리 내 위 은숙이 누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었는데도 말이다.

은숙이 누나는 우리집의 맏딸로 태어났다. 육지에서도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지만 제주의 딸들은 육지보다 더 빨리 철이 들어야 하고 해야 할 일도 많다. 하루 종일 밭일을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살림을 배우고 동생들을 돌보는 것도 모두 누이들의 몫이다.

그런 제주의 딸들 중에 우리 누이는 최고였다. 눈이 맵고 손이 야무진 우리 어머니는 동네에게 가장 깨끗하게 집을 가꾸셨다. 우리 형제 모두 나이가 들어 어머니 대신 집안의 청소를 해야 했지만 어머니 눈에 든 것은 은숙이 누나뿐이었다.

손이 거친 아들들은 고사하고 아래 여동생들도 야무지지 못해 어머니께 꽤 혼이 나곤 했는데 누나는 언제나 어머니마저 감탄하게끔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누나는 야무지고 깔끔한 사람만은 아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서든 나타나 나를 구원해 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자 누나는 내 보자기 가방을 들었다. 학교까지 10리길이 조금 못되는 거리, 지금이야 번듯하게 포장도로가 생겼지만 내가 다니던 그 시절에는 포장도로가 없었다. 해안가를 따라, 현무암 바위 길을 질러가야 했고 어린 걸음에 그 길은 나에게 벅찼다.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서 누나는 기꺼이 내 보자기를 어깨에 짊어졌다. 누나는 양 어깨에 내 보자기와 자신의 보자기 가방을 짊어지고 손 하나를 내게 내주었다. 나는 누나의 손을 잡고 그렇게 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파하면 나는 누나의 교실 앞에 보자기 가방을 던져두었다. 누나는 수업이 끝나면 그 보자기를 또다시 양 어깨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자기를 두고 누나는 나에게 잔소리한 적도 생색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형과 누이들이 동생 짐을 들어주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그런 누나를 둔 친구가 없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집에 돌아가는 길, 친구들과 달리 짐을 짊어지지 않은 내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특별한 것은 누나였는데 어린 나는 그걸 헤아릴 철이 없었다. 누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고목나무에 앉은 매미처럼 늘 누나만 따라다녔다.

가을이 되면 학교 가는 길에 멜 떼들이 현무암 바위로 올라오곤 했다. 고래를 피하기 위해서 해안으로 몰려온 멜 떼들이 현무암 바위를 은색으로 수를 놓으면 누나와 나는 학교 가는 것을 미루고 멜떼들을 줍기 시작했다.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나는 학교를 가는 대신 누나와 바닷가에서 노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누나는 집으로 돌아가 대나무 쟁반을 챙겨왔고 나는 현무암 바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펄떡이는 멜 떼를 잡았다. 쟁반 한가득 멜을 잡으면 누나는 어머니처럼 솜씨를 부렸다. 싱싱한 멜 떼를 간장에 은근히 조려 밑반찬을 만들고 남은 멜은 내장을 떼어내 해풍에 말렸다.

현무암 바위 길을 누나의 손을 잡고 다녔던 판포초등학교지나간 세월 속에 건물은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가슴속의 생생한 추억들이 더욱 아련해진다.
현무암 바위 길을 누나의 손을 잡고 다녔던 판포초등학교 지나간 세월 속에 건물은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가슴속의 생생한 추억들이 더욱 아련해진다.

해가 지고 집에 돌아온 부모님이 하루의 일과를 물으면 누나와 나는 서로 눈짓을 하며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을 부모님께 비밀로 하곤 했다. 마당에 널린 멜만 봐도 우리가 학교에 가지 않고 멜을 주웠다는 것을 부모님은 아셨을 테지만 나는 그저 누나와 오누이만 아는 비밀이 생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고작 나보다 세 살 많은 누나는 늘 바쁘기만 했던 부모님 대신 내 모든 것을 챙기고 아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누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참동안 나는 학교 가는 것이 심드렁해졌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당시, 나는 다리에 힘이 붙어 더 이상 학교 가는 길이 벅찬 어린 아이가 아니었지만 누나 없이 홀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가을이 돼서 멜 떼가 올라와도 더 이상 멜을 잡기 위해 해안을 뛰어다니지도 않았다. 아마 왕국이에게 만년필을 가져간 범인으로 몰렸을 때 그렇게 서러웠던 것도 내 편을 들어줄 누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학교에서 누나 없는 홀로서기에 애를 먹는 동안 누나는 사회에 나가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아직 어른이 되기 이른 나이. 그렇지만 누나는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어른이 돼야 했다. 누나는 할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벌이가 좋은 해녀가 되었다. 거친 바다에 부풀어 오르는 숨을 참고 뛰어들어 가족의 생계를 보탰다.

처음 해녀일이 서툴렀을 때는 제주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해녀생활이 익숙해지자 배를 타고 육지에 나가 두어 달씩 일을 하고 돌아왔다. 누나가 멀리 배를 타고 나가면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설레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누나가 육지에 다녀오면 나에게 줄 무언가를 꼭 하나쯤은 챙겨왔기 때문이다. 누나가 육지에서 사다 준 옷이나 학용품들은 나에게는 더없이 큰 선물이었다. 그러나 누나가 ‘숨’을 담보로 벌어오는 귀한 돈이 쓰이는 곳이 내 학비였다는 것을 나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유달리 자식 공부에 인색하셨던 내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내게 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기술을 배우라 권하셨다. 그때 누나가 내 편을 들었다고 한다. 학교 보낼 돈이 없다며 강경히 반대하시던 아버지를 설득한 것도 누나였다. 보내자고 한 사람이 책임지라는 말에 누나가 학비를 대줬다는 걸 나는 고등학교 2학년때 알았다.

“아버지 책 사게 돈 좀 주세요.”

대부분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2학년 때부터 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를 시작한다. 원리와 실습은 학교에서 배우지만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참고서며 문제집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식들이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신 아버지는 그 돈마저도 아끼셨다.

“그 까짓 자격증 있으면 월급쟁이밖에 더해? 남자가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니까.”

아버지는 책값을 내어주는 대신, 학교 갈 때마다 용돈을 얻을 때 마다 계속 되는 사업타령을 늘어놓으셨다. 다른 자식들은 공부를 안 해서 야단인데, 공부하겠다고 나서는 아들을 타박하는 아버지라 니! 나는 그때만큼 아버지가 야속했던 적이 없다. 답답해지는 내 가슴에 반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누나가 사줄게, 가자!”

집에 다니러 온 누나가 나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더 이상 아버지와 실랑이를 해봤자, 책이 나올 것 같지 않자 누나가 나선 것이다. 누나는 나를 데리고 읍내로 향했다. 누나가 어렵게 번 돈이 또 다시 내 공부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마음이 불편하셨는지 불편한 마음을 화로 푸셨다.

“그래, 처음부터 네가 시킨 공부니, 끝도 네가 내라!”

아버지의 짧은 한 마디에 내 학비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됐다. 누나와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누나가 내 학비 대준 거야?”

나는 누나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물었다.

“내가 도와준 것이 얼마 되겠어? 어멍 아방이 힘드셨지.”

동생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도 생색 한번 내지 못하는 우리 누나는 내 물음에 가볍게 답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누나의 속을 이해할 만큼 눈치가 생겼다.

“책 비쌀 텐데….”

누나에게 또 다른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미안해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공부나 열심히 해. 아버지 저렇게 못마땅해 하시는데 너 시험 떨어지면 너랑 나랑 아버지한테 한걱정 듣는다!”

누나는 책값 걱정에 불안해하는 나를 오히려 격려해줬다.

현무암 바위 길을 누나의 손을 잡고 다녔던 판포초등학교지나간 세월 속에 건물은 사라지고 표지석만 남아 가슴속의 생생한 추억들이 더욱 아련해진다.
누나가 나를 위해 내놓은 반 돈짜리 금반지 2g도 채 되지 않는 무게지만 내 마음에 천근보다 무거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읍내에 도착해서 누나는 금은방을 찾았다. 누나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에서 끼고 있던 반 돈짜리 금반지를 뺐다. 그 반지는 누나가 해녀 일을 하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산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누나가 반지를 빼 금은방 주인에게 내놓자, 나는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누나는 반지를 판 돈으로로 책을 사주었다. 오랜만에 오누이의 외출이니 외식을 하자며 귀한 자장면도 사주었다. 그 자장면을 먹으면서 허전해진 누나의 손가락에 목이 메었다.

그러나 거기서 울음을 터뜨리기엔 나는 다 큰 청년이었고 미안한 마음으로 눈물을 보이기엔 누나의 사랑이 너무 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신 마음에 서슬 퍼런 칼 하나를 품었다.

‘성공해서 돈을 벌어야지!’

성공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것은 나에게 더 이상 꿈일 수 없었다. 가난 때문에 자식에게까지 인색했던 부모님의 서러움과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한 누나의 희생을 풀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성공이라는 것을 열여덟 살의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성공의 첫걸음은 자격증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책 하나를 통째로 외우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책을 보는 데만 석 달이 걸렸지만 보면 볼수록 책을 읽는 시간이 짧아졌고 시험을 보러 갈 때엔 어떤 페이지에 무슨 문제가 나오는지 책을 보지 않고 맞출 수 있을 정도가 됐다.

2학년 때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대부분 3학년 때 합격하는 시험에 나는 남들보다 1년 먼저 합격을 했다. 2학년 때 자격증을 딴 학생은 한림공업고등학교에서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고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나는 3학년 때에는 학교에 가는 대신 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취업해 육지로 올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기 전문가’로서 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육지로 올라온 후에 우리 누이는 결혼을 하고 서울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누나를 생각하면 아직도 바닷가에서 멜을 잡는 아이가 되지만 흘러간 세월 속에서 서로 가정을 이루고 사느라 얼굴 보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나는 누나를 볼 때마다 나의 성공은 미련 없이 책과 바꿔버린 누나의 반지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전한다. 하지만 내가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면 누나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 사례를 친다.

“별 것도 아닌데, 네가 성공하니까, 그 반지가 빛나는 거지.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우리 누나는 언제나 자신이 한 일은 당연하고 남들이 하는 일만 대견해 한다. 평생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남들에게 자랑한 적이 없이 언제나 다른 사람을 칭찬하기 바쁘다.

누나의 겸손과 배려는 아직도 내가 배우고 본받아할 덕목이고 내 마음엔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 고마움의 빚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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