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3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비
[김필영 시문학 칼럼](3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비
  • 뉴스N제주
  • 승인 2023.04.0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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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원구식 시집,『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465) 9쪽, 비)

원구식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비’라고 부르는 이 물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 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아,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물속에 불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 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만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자연의 섭리에서의 과학적 상상력의 비약』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에 의하면 물은 우선 생명의 근원으로 의미화 된다. 사실 우리 몸은 주요 구성요소가 물이며, 지구를 구성하는 주요 원소가운데 핵심이 바로 물이다. 그렇기에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물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생명의 근원으로 사유되었다.

또는 영원의 이미지나 상징, 침례와 같은 재생, 정화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적 의미들은 근대의 제반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굴절되어 여러 의미역을 갖기 시작했다. 원구식의 시를 통해 물의 과학적 상상력을 통한 시의 힘을 느껴본다.

시는 첫 행부터“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비약적 상상력으로 물의 위치를 표현하고 있다. “물의 순환계”는 수분의 증발과 구름의 기능, 비를 통한 물의 지표와 지층, 강과 해양의 순환과정을 통해 생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과학적 사실이다.

바로 그 점은 반드시 비가 와야 할 사건의 현상은 시극적인 사건을 유발시킨 것인데 시인은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라고 표현함으로 과학적 사실에서 상상적 차원으로 시는 비약한다.

화자는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제 화자는 “비”라고 부르는 이 물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다소 기행처럼 보이는 화자의 행동은 산문시를 끝까지 읽어내려 가게 하는 시적 장치이다.

화자는 독자와 스스로에게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므로 ‘비가 와야 하는 당위성을 묻고 있으며, 읽는 재미에 불을 붙인다.

시의 중반에서 화자가 비를 생각하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행위로 시의 반전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펼쳐진다.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던 “어느 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게 된다.

그 사건으로 화자는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즉 “물속에 불이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구름과 구름, 비구름과 대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방전현상에 관한 과학적 현상이다.

그러나 “물속에 불이 있다!”는 과학적 상상력을 시의 힘으로 비약시킨 멋지고 대단한 발견이다. 불이 났을 때 진화하는 물질이 ‘물’임을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직격탄을 날린 파격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의 결구에 이르러 화자는 번개를 맞고 ‘물의 순환계’라는 자연의 섭리에서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킨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깨닫게 된다.

“물의 증발 현상과 구름의 방전 현상이라는 과학적 사실에서 시인은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라는 과학적 상상력의 비약을 통한 시의 위대한 힘을 독자에게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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