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44)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바짝 붙어서다
[김필영 시문학 칼럼](44)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바짝 붙어서다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05.13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김사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12쪽, 바짝 붙어서다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텔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허리 굽은 어머니, 지구별의 성녀』

지구라는 별에서 죽음의 추격을 따돌리며 살아가면서 가장 서글프고 속상한 모습은 날이 갈수록 쪼글쪼글 늙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대다수의 자녀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아니 자신의 어머니가 늙어가는 데에 둔감하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어머니는 그만큼 우리에게 영원히 머물러 계실 존재라는 고정관념이 굳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사인 시인의 시에서 오늘,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허리 굽은 어머니’곁으로 바짝 다가가 본다.

어린 시절엔 ‘기역자’를 생각하면 낫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생각은 차츰 바뀌어 이제는‘기역자’를 생각하면 어머니가 먼저 떠오른다.

곡식이 귀하던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논밭에서 품앗이 하느라 허리를 펼 겨를도 없이 구부린 자세로 혹독한 육체노동을 하셨다.

가뜩이나 허리를 구부리고 일하시다가 참을 먹을 때나 식사를 할 때 귀한 음식이 나오면 물로 배를 채우시고 음식은 집으로 가지고 오시곤 했다. 분명 들판에서 굶으셨는데도 자식에게 먹이려고‘입맛이 없다’거나‘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하셨고 그 대가로 허리가 더 굽으신 것 같다. 어리석게도 그 사실을 아는데 수년이 걸렸으니...

첫 행간부터 목전에서 보는 것 같은 섬세한 묘사는 다큐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품앗이할 논밭도 일감도 없어진 요즘 도시의 골목길에서“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승용차를 몰고 골목길을 가다보면, 파뿌리처럼 머리가 흰 노인이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거운 몸빼를 입고 이륜 밀차를 끄는지, 끌려가는지, 안타까운 모습과 가끔 마주친다.

분명 누군가의 어머니이리라. 안타까운 마음에 노인이 골목을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놀라지 않도록 조심조심 따라가면 뒤따르던 차들의 경적소리가 요란스럽다.

그 순간부터 노인의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는 시작된다.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가 위태롭게 펼쳐지곤 한다. 조마조마하게 스치듯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마지막 연은 팔순의 몸으로 밀차를 밀고‘바짝 붙어서기’를 하는 그 노인이 머리를 두고 지내는 공간이 묘사되고 있다.

늦은 밤 노인이 돌아간 그 방에는 공터에서 주워 왔을 지글지글 스피커가 끓고 화면이 빗금으로 떨리는 낡은 텔레비가 있고, 경첩이 헐거워져 문이 비뚤어지고, 높이 조절나사가 망가져‘기운 씽크대’엔 쭈그러진 냄비들이 허기진 옆구리를 조르고 있다. 방구석에는 뼈마디 굵어진 손으로 꼭 짜놓았을 걸레가 말라가고 있다.

우리는 이 풍경 앞에 왜 목이 메는가? 기운 씽크대 앞에 선‘굽은 허리’는 배를 골아가며 허리 안에 우리를 잉태하여 길러준 허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라‘이 지구별, 우리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길을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오직 자식을 찾아 굽은 허리로‘기역기역’걸어오시던 내 어머니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