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43)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내 번민의 모든 것
[김필영 시문학 칼럼](43)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내 번민의 모든 것
  • 뉴스N제주
  • 승인 2023.05.0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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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정신재 시집, 내 번민의 모든 것 : 도서출판 등대지기) 32쪽, 내 번민의 모든 것 

내 번민의 모든 것

정신재

아내가 징징 운다 격자무늬 문을 반쯤 열고
해 달라는 거다 겨우내 못했던 가사家事
마룻바닥에 핀 버짐과 함께 헤벌어진 팬티가 하품을 하고
아내의 엉덩이가 남아 있는 검정 스타킹의 고뇌
그러다 세탁기를 거쳐 구겨진 빨래는 탈탈 털어야 하고
밀린 청소가 거수경례를 하는 사이
멋진 시 한 구절이 베란다 턱 밑을 내려다보는 거다
알고 싶다 당신과 나 사이
짙은 눈썹, 생동하는 내가 좋아
저 돈벌이도 안 되는 시가 좋아
오늘 따라 아내의 무 다리가
짧아진 미니스커트 안에서 바짝 날이 서 있는데
어떡하나 내 뜬구름 잡는 짓
잘 울리는 법고가 된 심장 앞에
원고 마감 날짜는 잔뜩 엎드려 있고
나가서 돈 벌어 오라는 소리를 듣기 전에
멋진 시 한 벌 골라내야 하는데
그나마 나를 받쳐 주던 변기가 고장나고
목을 빳빳이 세우는 기사의 견적서
자격이 박탈된 로토는 휴지통에 머리를 쳐박고
심술난 아내의 설거지 소리는 고층빌딩을 오르고
읽어야 할 시편은 바닥에 다리를 뻗고 누웠는데
영감靈感의 도깨비는 절망의 코피를 터뜨리고
자본이 눈을 번득이며 거리의 간판을 순시하는 동안
너, 많이 컸구나 번민

『능청과 해학(諧謔)에 담긴 시업(詩業)의 번민』

번민(煩悶)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답답하여 괴로워함’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번민할 수 있으며, 문명사회로 발달해가면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번민할 일이 많아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번민은 살아가는 가치관에 따라 다양하나 번민을 극복하며 사는 사람과 번민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의 행복지수는 다르다. 한 사람이 가진 번민의 양은 얼마나 될까. 모든 번민을 시의 행간에 터뜨린 정신재 시인의 詩속으로 들여다본다.

시인인 화자가 처음 열거하는 번민은 가정생활상의 번민으로서 아내의 가사 도움요청을 받은 집안일들을 열거하는 남편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시인도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도와주어야 할 아내가 있다.

시가 돈이 될 수 없는 세상이기에 시인의 아내는 전업주부일 확률이 낮다. 따라서 직업을 가진 아내가 혼자서 가사를 깔끔하고 여유롭게 처리하기란 무척 어렵다.

어느 봄날, 화자의 “아내가 징징 운다. 격자무늬 문을 반쯤 열고”“겨우내 못했던 가사(家事)”를 도와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남편이 도울 수 있는 가사란 지극히 제한적이겠으나 “마룻바닥에 핀 버짐과 함께 헤벌어진 팬티”와 “아내의 엉덩이가 남아 있는 검정 스타킹”을 세탁기를 거쳐 구겨진 빨래는 탈탈 털어“ 건조대에 널어야 하는 일 등이다.

이런 일이‘번민’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숙련된 가사도우미가 아니니 서툴 수 있겠으나‘번민’의 대상이라는 주장엔 객관성이 부족하다.

이때 화자가 가사를 돕지 않으려고 핑계를 대는데, 그 매개체가‘詩’다. “밀린 청소가 거수경례를 하는 사이, 멋진 시 한 구절이 베란다 턱 밑을 내려다보는”것을 발견하자‘능청’을 부린다. 이 경우 독자는 아내의 품성이 궁금하다.

아주 사소한 가사를 도와달라는 아내에게 시를 핑계로 능청을 부리는 남편을 받아주는 아내라면 남편의 시를 좋아하거나 성품이 대단히 온유한 아내일 것 같다. 행간이 깊어질수록 남편의 능청도 심도를 더해간다. “짙은 눈썹, 생동하는 내가 좋아, 저 돈벌이도 안 되는 시가 좋”다는 나르시스트(narcist)적 능청이 이어진다.

더 나아가 “아내의 무 다리가 짧아진 미니스커트 안에서 바짝 날이 서 있”다는 식으로 아내의 외모를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이런 능청은 배짱 두둑한 남편이 아니고서야 감히 내뱉지 못할 해학(諧謔)이다.

과연 현실에서 이런 능청이 가능할까? 현실에서라면 토라지거나 말다툼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겠으나‘詩’의 행간에서는 웃음을 선사해준다. 독자가 시인남편이라면 키득키득 웃음이 삐져나올 것이 자명하다.

이제 시의 결구를 향하며 화자는 자신을 낮춘다. “어떡하나 내 뜬구름 잡는 짓”이란 표현에서 남편으로서 가사를 돕지 못한 것에 더하여, 넉넉하지 않은 벌이에 대하여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읽을 수 있다.

시의 제목처럼 능청 속에 화자의 번민도 중첩된다. “원고 마감 날짜는 잔뜩 엎드려 있고 나가서 돈 벌어 오라는 소리를 듣기 전에 멋진 시 한 벌 골라내야 하는데”라는 행간은 화자가 열거한‘번민’중에 능청이 아닌 진정성이 엿보인다.

시인이 완성도 높은 시를 쓰기 위해 얼마나 번민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능청의 해학에 담긴 시업의 번민으로 독자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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