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3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황무지 모래톱
[김필영 시문학 칼럼](3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황무지 모래톱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03.25 09: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정호승 시집, 여행,46쪽 : 창비시

고형렬 시집,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 창비시선 389) 34쪽, 황무지 모래톱

황무지 모래톱

고형렬

해변의 황무지를 쓰고 죽고 싶다
풀 서너줄기 이어진 석양의 모래톱
고독한 동북아시아,
변방의 한 시인 어린 킹크랩의 눈단추처럼
늘 기울어진 하늘을 찾는 물별을
기다리며
스스로 황무지가 된 해변의 나는
안쪽에 옹벽을 올린 절벽의 주거지에서
새물거리는 동북의 샛눈
황무지 모래톱에 눕고 싶어라
황무지 풀밭에서 나를 붙잡고 싶지 않아라
못 죽어 눈물도 없이
바람 우는 황무지 해당화야
흰 불가 갯메꽃 나 수술에서 혼자 운다
먼 곳에서 해변의 황무지가 된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눈물 마르지 않는 내면의 황무지

얼떨결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방황할 때, 해변 황무지 모래톱을 찾아가본 적이 있다. 황무지 모래톱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닷물이 조류의 리듬에 따라 밀려 왔다가 돌아갈 뿐 수심도 얕아 한척의 배도 정박할 수 없는 곳, 어패류들이 자랄 개펄도 없어 갯마을도 없는 곳이었다. 고형렬 시인의 시에 묘사된‘황무지 모래톱’은 어떤 곳인가, 시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첫 행간은“해변의 황무지를 쓰고 죽고 싶다.”는 충격적인 바람을 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에게 외치는 일갈(一喝)이다.

왜 화자는 죽고 싶다는 외침으로 발하고 있는 것일까? 하필 겨우“풀 서너줄기 이어진 석양의 모래톱”쓰고 죽고 싶은 것일까? 2연에서는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화자는 “고독한 동북아시아, 변방의 한 시인”이었다. 대륙의 꼬리에 붙은 작은 나라, 그것도 허리가 동강난 반쪽나라의 시인이었다. 황무지 모래톱에서 그가 기다린 것은 무엇인가? “어린 킹크랩의 눈단추처럼 늘 기울어진 하늘을 찾는 물별”눈물겹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심신은 약해진다. 그 약함의 정도는, 첫 행의 묘사처럼“해변의 황무지를 쓰고 죽고 싶”을 만큼일 수 있다.이제 화자는 서있을 수도 없을 만큼 지쳐가고 있다.

바람에 기댈 기력도 없다. 그러나 세상의 바람도 열지 못하는 소통의 문은 황폐해가는 언어로 닫히었다. 지친 몸을 뉠 곳은 어디인가. 화자는 해변의 황무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화자가 찾는 황무지는 바람에 이우는 갈잎도 없어 외로운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 황무지 해변이 아닌 듯하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만 아득할 뿐 갈매기도 날지 않는 문자적 해변의 황무지가 아닌 듯하다. 그러면 화자가 찾는 해변의 황무지는 어디에 있는가?

3연에 이르러 화자는 자신의 내면에 황무지를 불러들여“스스로 황무지가”되는 길을 택한다. “안쪽에 옹벽을 올린 절벽의 주거지”에 자신을 분리시키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내면에 옹벽을 쌓고 절벽으로 차단해도“새물거리는 동북의 샛눈”의 모습으로 호흡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새물거림’은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북 변방의 시인이라는 존재의 마지막 웃음이며, 그‘샛눈’은 눈을 감지 않으려고 속눈썹을 껌벅이는 시인이라는 존재의 슬픈 몸짓이다.

한 시인이 시를 빚어내며 맥박이 늘어지고 숨결도 미미할 만큼 지극히 연약한 이 몸짓으로 황무지에 스스로를 가두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물겹다.

4연에 이르러 화자의 내면은 더욱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음일 뿐이다. “황무지 모래톱에 눕고 싶”은데, 황무지 풀밭에서 나를 붙잡고 싶지 않“은데, ”못 죽어 눈물도 없이“란 내면의 외침은 무엇인가? 눈물 없이 못 죽는 것이 아니라 눈물 없음을 핑계로 차마 죽을 수 없음을 에둘러 말하는 듯하다.

죽을 수 없음이 내면에서 여명처럼 되살아날 때 화자는 함께 울어주는 존재인 ”바람 우는 황무지 해당화“를 발견한다. 그러나 황무지 모래톱에 드러난 것은 약해진 스스로의 모습이다.

화자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 홀로 핀 ‘흰 불가 갯메꽃 수술’로 들어가“혼자 운다.”어쩌면 그 울음소리는 한동안 멈춰지지 않을 것 같다.

“먼 곳에서 해변의 황무지가”되어 부서진 시와 훼손된 언어, 망가져 가는 세상을 향해‘눈물 마르지 않는 울음’을 쏟아낼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