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50)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은하계의 끝에서
[김필영 시문학 칼럼](50)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은하계의 끝에서
  • 뉴스N제주
  • 승인 2023.06.24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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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조명제 연작 장시집,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노래 : 문예운동사)114쪽, 은하계의 끝에서

은하계의 끝에서

조명제

벌판의 메마른 모래흙 바닥에 자란
작디작은 풀들이 가난한 이삭을 내밀었네.
강아지풀 바랭이풀 우거진 들녘 끝에서
농사에 바쁜 사람들은 벌판의 먼지알 같은
풀 이삭을 보지 못하리. 우연히 다가왔던
눈동자가 한일자로 그어진 염소도 그냥 지나치고 마네.
몸 기댈 만한 풀 아니라며 방아깨비도 머물지 않고,
부지런히 풀씨를 찾는 들새들도 거들떠보지 않네.
쓸쓸한 가을빛 햇살만이 작디작은 풀들의 잎과 이삭과
모래흙을 어루만지네. 마을 앞에서 풀 열매를 훑는 닭들은
머리를 옆으로 제켜 기우는 해를 한번 힐끗 바라보리.
작은 풀은 달빛 별빛을 기억하고, 대지의 바람과
이슬을 추억하리. 굽이치는
태백산맥으로 몰아치던 눈보라를 기억하고,
아침 안개 속에 거름을 져내던 부지런한 농부의
발소리를 기억하리. 궂은 일 마치고
냇가로 서답 이고 나와 빨래하던 아낙들의
신 팔목을 기억하리. 풀씨 곁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헤듯,
작은 풀 이삭 들꽃 하나도
우주의 중심축은 놓치는 법 없으리.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들풀의 기억으로 우주의 섭리를 일깨우는 생명의 시학』

태양과 지구 및 그 외 행성들과 위성으로 이루어진 태양계는 1,000억 개가 넘는 별이 있는 우리 은하계의 일부부에 불과하다. 우리 은하계의 직경은 너무나도 엄청난 거리라서, 빛의 속도(초속 299,790킬로미터)로 여행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을 가로지르는 데는 100,000년이 걸릴 것이라 한다.

이렇듯 인간의 정신으로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은하계 끝 지구별에서 지극히 사소한 사물을 통해 소중한 것을 발견한 시가 있다. 조명제 시인의 시안(詩眼)을 통해 ‘들풀’을 들여다본다.

화자는 은하계의 무수한 별 중 하나인 지구별 끝에 서 있다. 고개를 들어 천체 망원경을 통해 은하계의 먼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고래를 숙이고 쪼그려 앉아“메마른 모래흙 바닥에 자란 작디작은 풀들이” 내민 들풀의 “가난한 이삭”에 주목한다. 쓸모없는 잡초로 일컫는“강아지풀 바랭이풀 우거진 들녘 끝에”서있는 것이다.

화자는 광활한 무한의 공간은하계 끝에서 하필 ‘들풀’을 화두로 등장시킨 것일까? 우리 주변에 가장 하찮아 보이는 잡초를 스쳐가는 존재를 등장시켜 우리의 사물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맨 먼저 등장하는 무관심의 주체가 있다. “농사에 바쁜 사람들은 벌판의 먼지알 같은 풀 이삭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므로 ‘사람’임을 알려준다. 다음으로 들풀을 외면하고 지나치는 존재는 “눈동자가 한일자로 그어진 염소”와 “몸 기댈 만한 풀 아니라며” 떠나는 “방아깨비”와 “부지런히 풀씨를 찾는 들새”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무관심은 사람의 무관심과는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잡초인 ‘바랭이 풀’의 무성한 뿌리는 땅속 흙에서 영양을 길어 흙 표면을 비옥하게 하고, 햇빛에 말라가는 흙 표면의 수분을 유지시켜주는 이로운 역할을 하지만 곡식 곁에 풀이 자라면 사람들은 가차 없이 뽑아버린다.

그러나 여치나 방아깨비 등의 잡초에 대한 무관심은 동일한 생명으로서 해를 입히지 않는 면에서의 무관심이다. 온갖 풀벌레들은 잡초잎사귀 사이에서 살아가며 짝을 찾고 사랑하며 번식하며 서로 해치지 않는다. 거처를 제공하고도 생색을 내지 않는 들풀도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무관심하다.

중반의 행간을 지나며 묘사의 주격이 바뀐다. 이제 들풀을 무심히 스치는 존재들을 향한 ‘들풀의 몸과 생각’으로 느껴지는 ‘들풀의 기억’들을 열거한다. 한낮의 맹렬한 땡볕에 지친 몸을 측은히 바라봐주는 ‘달빛과 별빛을 기억한다’하고, 외로운 풀잎들과 도란거릴 수 있게 불어오는‘바람을 기억한다’고 한다.

풀씨를 여물도록 키우고 난 겨울 날 “굽이치는 태백산맥으로 몰아치던 눈보라를 기억”한다고 한다. 발에 밟혀 여린 몸이 으깨어질지라도 “아침 안개 속에 거름을 져내던 부지런한 농부의 발소리를”기억한다 하고,“궂은 일 마치고 냇가로 서답 이고 나와 빨래하던 아낙들의 신 팔목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시의 결구에 다다르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에 신문고를 두드린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도 ‘들풀’은 은하계 끝 아주 작은 별인 이 땅의 주역들의 웃음소리를, “풀씨 곁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땅에 난“작은 풀 이삭 들꽃 하나도”헛되이 난 생명이 아님을 “우주의 중심축은 놓치”지 않는 섭리의 끈으로 견고하게 붙들고 있음을 은하계의 끝에서‘들풀’을 통해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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