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55)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눈주름 악보
[김필영 시문학 칼럼](55)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눈주름 악보
  • 뉴스N제주
  • 승인 2023.07.28 2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49쪽 : 창비시선 365) 눈주름 악보 )

눈주름 악보

공광규

이른 봄날 오후
벚나무 꽃그늘 돗자리 위에서
모로 누워 자는 아내의 눈주름을 본다
햇볕도 그늘을 만들고
꽃나무도 그늘을 거느리는 걸 보면
아내에게도 그늘이 많았을 것이다.
꽃나무 가지에 앉았던 바람이 깃을 치자
눈주름 위에 음표로 내려앉는
꽃잎 몇 장
저녁이 와서
노을 한 폭 개어다 덮어주는데
낡은 몸에서 오래된 풍금 소리가 터져나온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역사를 낳는 여인, 아내여』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잠든 여인은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공광규 시인의 시를 읽는 순간 스쳐간다. 지난 시대의 여인들은 남편보다 늦게 자고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자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여인들의 마음을 대변한 말 같다. 목련 꽃봉오리가 마른 가지에 학처럼 내려앉은 어느 봄날, 잠든 아내의 주름지고 기미낀 얼굴을 내려다보며 ‘내가 아내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내 먼저 떠나 저 기미낀 눈가에 피눈물 흐르게 하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시의 첫 연은 “이른 봄날 오후/ 벚나무 꽃그늘 돗자리 위에서/ 모로 누워 자는 아내의 눈주름을 본다”로 시작 된다. 잠든 아내를 보는 남편의 시선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시 속의 화자는 ‘아내의 잠든 눈가에 자리 잡힌 눈주름에 주목한다.

아내와 남편은 어떤 관계인가? 혈연적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자식은 1촌간이나 부부는 무촌이다. ‘히브리어성경’에서는 첫 사람 ‘아담’의 아내는 ‘돕는 자’를 의미하는 ‘하와’라는 이름으로 ‘아담의 갈비뼈의 원소를 취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아담’은 그런 아내를 보자‘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최초의 詩를 읊었다. 1연에서 아내의 눈주름을 발견한 영상은 남편의 시력의 밝음을 은유한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려 깊음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2연은 꽃그늘이 드리워진 아내의 눈가에서 ‘그늘’을 발견한다. 그 그늘에서“햇볕도 그늘을 만들고/ 꽃나무도 그늘을 거느리는 걸 보면/ 아내에게도 그늘이 많았을 것이다.”라는 회한이 어린 신음을 읽을 수 있다.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어가는 아내의 눈가엔 유독 꽃그늘 같은 기미가 낀다. 그 그늘이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인지 남편은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한 TV방송프로그램에서, 두 다리를 잃고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장애인이 아내의 사랑의 도움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스포츠 선수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 간증연설을 하였다.

연설 후 사회자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열 번을 결혼한다하면 아홉 번은 이 아내와 하고 싶지만 한 번은 아내가 두 다리 멀쩡한 사람과 결혼하여 고생하지 않고 살게 해주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할아버지의 아내가 아버지를 낳았고, 아버지의 아내가 나를 낳아 주었으며, 한 빵틀에서 구운 국화빵처럼 나를 빼닮은 아이들을 아내가 낳아주었다.

사람의 역사는 아내로 인해 이어지고 존재한다. 남편을 의지하고 세상의 기초를 놓으며 살아오느라 눈가에 잔주름이 늘어난 아내에게 지상의 남편들은 고개를 숙인다.

시의 종반부는 잠든 아내의 눈주름을 오선지가 그려진 악보로 은유하고 있다. 그늘진 눈주름 오선지에 악보 같은 꽃잎 내릴 때, 꽃보다 어여뻤던 아내를 기억해 냈을 것이다.

오래된 몸에서 풍금소리 빠져나오는 아내를 포근히 덮어주는 노을을 보며, 노을 보다 고왔던 아내의 뽀얀 뺨을 기억해 냈을 것이다. 아내의 손을 부여잡고‘정말 미안하다.’고 말할 것인가? 그보다는 지금 아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늘진 눈주름 악보를 어루만지며 그러안아줄 일이다.

갑자기 왜 이러느냐며, 뭘 잘못 드신 게 아니냐며 눈을 흘기는 아내를 지구에 종말이 올지라도 더욱 따뜻하고 그윽하게 사랑해줄 일이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