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5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마중물
[김필영 시문학 칼럼](5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마중물
  • 뉴스N제주
  • 승인 2023.08.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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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송재학 시집,『검은색』: 문학과지성 시인선 473) 43쪽, 마중물

마중물

송재학

실가지에 살짝 얹힌 직박구리를
으능나무 모든 잎의 무게가 하늘거리며 떠받들듯이
펌프질 전에 펌프에 붓는 마중물로
내이(內耳)의 비알에 박음질하듯 우레가 새겨졌다
마중물은 보통 한 바가지 정도
그건 지하수의 기갈이었지만
물의 힘줄로 연결되었으니
물에게도 간절한 육체가 있다
물의 몸이 가져야 할 냉기가 우선 올라오고 있다
정수리에 물 한 바가지 붓고 나면 물의 주기가 생긴다
마중물 아니라도 지하수 숨결은 두근거려서
마중물 받아먹으려는 물의 짐승들이 붐빈다
물의 손을 잡아주니 알몸의 물이 솟구친다
물의 등 뒤에 부랴부랴 숨는 알몸이다
물이 물을 끌고 오는 활차와
물이 물을 생각하는 금관악기가 저기 있다

뉴스N제주가 주최한 '나의 시 나의 인생' 문학특강 가을편이 19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동안 뉴스N제주 스타디움(제주시 중앙로 253, 5층)에서 김필영 시인이자 평론가를 초대해 특강을 가졌다.
김필영 시인

『생명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 입체적 내재율의 백미』

상수도시설과 전기가 없던 시절, 마당가에 수동식펌프로 물을 길어 올려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 수동식펌프샘은 펌프질을 멈추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물이 우물 속으로 내려가 다시 품어 올릴 때면 한 두 바가지로 물을 부어주면서 펌프로 품어 올려야만 물이 다시 올라오게 된다.

이때 품어 올리는 물을 마중하듯 부어주는 물이 「마중물」이다. 송재학 시인이 사유한「마중물」은 우리를 어떻게 마중하며 다가오는가?

시의 도입부에서는 영상미 넘치는 펌프샘의 정경이 자연과 어우러진다.‘수동식 펌프샘’을 남쪽지방에서는‘작두샘’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마중물을 붓고 가만히 있으면 마중물은 수직관으로 내려가고 만다.

따라서 이 행위는 바가지로 무쇠로 된 실린더(cylinder)역할을 하는 원형 통에 마중물을 조금씩 부으며, 펌프의 심장의 날름막처럼 물을 끌어올리는 원형 고무판이 코끼리 코처럼 늘어진 지렛대를 상하로 움직일 때 피스톤(piston)작용을 하여 공기의 압력을 역이용해 물이 끌어올려지게 되는데 “실가지에 살짝 얹힌 직박구리를 으능나무 모든 잎의 무게가 하늘거리며 떠받들듯이 펌프질 전에 펌프에 마중물을”붓는 행위는 물을 불러올리려는 간절함이 수반된 것임을 알게 한다.

지하수가 마중물에게 붙들려 어두운 수도관을 수직으로 올라올 때 들려오는 굉음을 “내이(內耳)의 비알에 박음질하듯 우레가 새겨졌다.”고 할 만큼 감각과 시각과 청각으로 느껴지는 파격적인 운동의 모습은 입체적 내재율이 돋보이는 행간이다.

중반으로 들어가며 ‘마중물’이 필요한 이유를 물의 이미지를 반어적 상황인 “지하수의 기갈”이라고 비트는 대조법을 사용해 긴장이 고조된다. 화자는 펌프샘을 수 없이 경험하고 이 시를 썼음이 분명하다.

이어지는 행간에서 찾아낸 것이 물의 물성적 특질을 인체에 비유하여 “물의 힘줄로 연결되었으니 물에게도 간절한 육체가 있”다는 에로티즘을 발견할 수 있는 시안(詩眼)은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서로를 갈구하는 물의 몸이 ‘마중물’을 맞을 때 인체의 생리적 현상은 고조되기 시작한다. 물의 호흡으로 생기는 입김처럼 “물의 몸이 가져야 할 냉기가 우선 올라오고” 마중물이 닿는 순간 “정수리에 물 한 바가지 붓고 나면 물의 주기가 생긴다.”고 함으로 지하수에 새로운 생명력이 꿈틀거림을 알려준다.

펌핑(pumping)하는 피스톤운동은 작두와 고무밸브의 절묘한 조화와 탄력적 움직임으로 만남의 절정을 향하게 된다. 지하의 물은 “마중물 아니라도 지하수 숨결은 두근거”린다. 수직의 관 아래 “마중물 받아먹으려는 물의 짐승들이 붐빈다.”는 표현의 ‘물의 짐승들’은 먹이를 찾아 몰려드는 하이에나가 연상된다.

마중물과 지하수의 만남을 “물의 손을 잡아주니 알몸의 물이 솟구친다.”고 함으로 비로소 절벽에서 손을 내밀어 지하수를 맞는 마중물의 마지막 역할이 강조된다. 이제 마중물은 사라졌다.

그러나 물은 비로소“물의 등 뒤에 부랴부랴 숨는 알몸”으로, “물이 물을 끌고 오는 활차”로 콸콸 분출한다. 결구는 “물이 물을 생각하는 금관악기”인 작두샘 하나쯤 우리의 가슴에 심어 놓을 때, 우리도 누군가의 마중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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