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45)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이 하찮은 가치
[김필영 시문학 칼럼](45)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이 하찮은 가치
  • 뉴스N제주
  • 승인 2023.05.2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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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김용택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 창비시선 387) 9쪽, 이 하찮은 가치)

이 하찮은 가치

김용택

11월이다.
텅 빈 들 끝,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어둠이 온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지나온 마을보다
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
그리고 불빛이 살아나면
눈물이 고이는 산을 본다.
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있고.
소들이 외양간에서
마른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
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는다.
비가 오려나보다.
차는 빨리도 달린다. 비와
낯선 마을들,
백양나무 흰 몸이
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창에 조용히 묻히는
이 저녁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은 생과 하물며
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
나는 비로소 내 형제와 이웃들과 산비탈을 내려와
마을로 어둑어둑 걸어 들어가는 전봇대들과
덧붙일 것 없는 그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외롭지 않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
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
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
외롭지 않게 되었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황혼의 길에 대한 대응』

사람이 살아가면서 존재의 가치나 사물의 가치를 찾는 일은 직간접 체득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기되는 무수한 의문들이 깨달음의 과정으로 답을 찾을 때 우리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초연해진다. 홀로 흙에서 왔다 홀로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본디 외로운 존재로서, 사랑하는 이를 얻기도 하고, 잃어가며 외로움의 경계를 넘나든다. 스마트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하찮은 가치마저 잊고 사는 것 같다. 김용택 시인의 시를 통해 어떤 것들이‘하찮은 가치들’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지 들여다본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11월의 텅 빈 들 끝,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차창에 들어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이 길은 어쩌면 화자의 황혼기에 해당하는 생애의 한 지점일 수 있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지나온 마을보다 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는 행간의 풍경 속으로 우리가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어두워지고 있는 풍경 속에서 불빛을 살아나자 “눈물이 고이는 산을”발견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명의 존재로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황혼을 바라보고 과거의 풍경 속으로 달리는 버스는‘생을 달리는 마차’같다. 그러나 시는 자연의 생태적 상상력의 변형을 뛰어 넘는다. 행간의 표현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전개되고 있음이 그 점을 말해준다.

“눈물이 고이는 산을”보자,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다. “소들이 외양간에서 마른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 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는다.”어머니 아버지가 계신‘눈물이 고이는 산’은 기쁨과 슬픔으로 흘린 눈물의 발원지가 부모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인 바, 그 발원지에서 흐르고 흐른 눈물이 섬진강물이 되어 흘렀다면 사랑한 이들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희비애락을 함께 한 존재에 대한 역사는 단절 없이 눈물로 강물로 지금까지 흐르고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행간의 중반을 지나며“차는 빨리도 달린다. 비와 낯선 마을들, 백양나무 흰 몸이 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창에 조용히 묻히는 이 저녁”에 이르는 전개는 바퀴로 달려온 버스만큼이나 빠르게 달려 와버린 덧없이 흘러간 지난시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이 하찮은 가치’에 등장시키는 존재들의 무한 가치는 어떤 정도일까? 언뜻 이 행간의 관념적 사유의 동사적 표현들은 반어적 의미로 대입하면 어떠할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중략) 남은 생과 하물며 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는 동사적 행간을‘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지지 않았다.’라고 하고, “나는 비로소 내 형제와 이웃들과 산비탈을 내려와 마을로 어둑어둑 걸어 들어가는 전봇대들과 덧붙일 것 없는 그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외롭지 않다.”는 행간의 동사적 결론을 반어적으로‘그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외롭다.’고 해본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모자랐지만 남아있는 그 짧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 모든 시간들이 지금도 흐르고 있는 사랑이 이렇게 외롭다.’고 해본다. 시에서도 극과 극은 축 하나로 통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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