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12)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봄 나이테
[김필영 시문학 칼럼](12)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봄 나이테
  • 뉴스N제주
  • 승인 2022.09.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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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황동규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지성 시인선 422>116쪽, 봄 나이테, 감상평 : 김필영)

봄 나이테

황동규

C자로 잘룩해진 해안선 허리
잎이며 꽃이며 물결로 설렌다.
노랑나비 한 쌍 팔랑이며 유채밭을 건너고
밝은 잿빛 새 두 마리 앞 덤불에서 뜬금없이 자리 뜬다.
바닷물은 들락날락하며 땅의 맛을 보고 있다.
그냥 흙 맛일까?
바로 뒤통수에서 물결들이 배꼽춤 추고 있는데.

‘섬들이 막 헛소리를 하는군.
어. 엇박자도 어울리네.
물결들이 발가벗었어
바투 만지네, 동그란 섬들의 엉덩이를.’

가까이서 누군가 놀란 듯 속삭이고
바다가 허파 가득 부풀렸다 긴 숨을 내뿜는다.
짐승처럼 사방에서 다가오는 푸른 언덕들
나비들 새들 바람자락들이
여기 날고 저기 뛰어내린다.

누군가 중얼댄다.
‘나이테들이 터지네.’
그래. 그냥은 못 살겠다고
몸속에서 몸들이 터지고 있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봄, 약동하는 생명의 흥겨움을 빚다』

세계문학의 명작들에는 비극적 소재가 많다. 그것은 비극적 소재들이 작품구성과 기승전결의 전개상황을 긴장감 있게 극화시킬 수 있음으로 인해 반전효과의 극대화를 통해 더 큰 감동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우리 인류가 겪어온 삶의 끊임없는 비극으로 점철된 역사로 이어져 내려온 숙명적 환경을 극복해 보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한국문학의 詩에서도 삶의 아픔을 애절하게 빚은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애송되고 있음을 본다.

황동규 시인이 상재한『사는 기쁨』이란 시집은 제목은“사는 기쁨”이었으나 많은 작품들 속에 아픈 일화들이 녹아 있다. 116쪽에 이르러서야 밝은 시 한 편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의 흥겨움을 봄나물 맛처럼 감칠맛 나게 은유한「봄 나이테」가 가슴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다.

첫 연에“C자로 잘룩해진 해안선 허리, 잎이며 꽃이며 물결로 설레는 곳, 노랑나비 한 쌍 팔랑이며 유채밭을 건너”는 곳이라면 한반도 남쪽 제주도이거나 남해의 어느 바닷가마을쯤이겠다.

한반도에서 봄바람이 먼저 닿는 남쪽해변에 살며시 사립문을 열고 들어온 봄이 줌인(zoom in)된다. 겨울을 난“밝은 잿빛 새 두 마리 앞 덤불에서 뜬금없이 자리를”뜨는 건 털갈이 하고 신방을 차리려는 사랑의 행차다.

신방을 차리는 날에는 들러리도 하객들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봄을 맞는 흥겨움엔 어디 공중을 나는 나비와 새들 뿐이랴.

랜즈는 바닷가를 끌어당겨 행간에 풀어놓는다. 이제 봄이 등장하는 흥겨운 장면이 입체적으로 묘사된다. “바닷물은 들락날락하며 땅의 맛을 보고 있다.”는 묘사는 먼 바다에서 봄이 섬과 재회하는 극적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슬플 때 춤을 추는 일은 없다. 춤은 가장 흥겨울 때 나온다. 잔물결이 출렁이는 풍경을‘배꼽춤’으로 묘사한 것은 파도가 얼마나 봄바람에 흥겨워하는지, 파도의 영어단어 Wave를 최상의 신명나는 시어로 승화시킨 묘사이다. 그런 물결의 공연을 보는 섬들은 이제 제정신일 수 없다.

막 헛소리를 하는 섬과 배꼽춤을 추는 물결의 조우는 엇박자도 어울릴 만큼 조화롭다. 물결들은 더 이상 아무런 가식이 없다. 발가벗은 채로 다가와 “동그란 섬들의 엉덩이를”만진다. 에로티즘의 향연이 드맑게 다가온다. 오히려 성스럽게 느껴진다.

3연에서 4연으로 들어서자 랜즈가 섬에서 바다를 향해‘클로즈 업’할 때“바다가 허파 가득 부풀렸다 긴 숨을 내뿜는다.”단순히 살아있는 바다가 아니라 향유고래가 수면으로 올라와 물을 내뿜듯, 파도가 섬에 부딪쳐 포말을 내품는 광경은 바다와 섬의 만남이자 우리와 봄의 생동감 있는 만남으로 다가오는 한 폭의 그림이다.

“가까이서 누군가 놀란 듯 속삭”인다는 행간에서‘누군가’라는 불특정 지칭은‘봄의 속삭임’이 사물과 우리 모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게 한다. 이제 봄의 상륙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짐승처럼 사방에서 다가오는 푸른 언덕들”이란 묘사에서 푸른 언덕을 향해 코뿔소처럼 들이닥치는 봄의 속도를 느끼게 한다. 땅에서만이 아니다. 공중에서도“나비들 새들 바람자락들이 여기 날고 저기 뛰어내린다.”누군가‘나이테들이 터지네.’라고 중얼댄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그래. 그냥은 못 살겠다고 몸속에서 몸들이 터지고 있다.”봄이 주는‘약동하는 흥겨움’을 값없이 만끽해도 나무랄 자 우주에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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