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1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기차를 기다리며
[김필영 시문학 칼럼](17)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기차를 기다리며
  • 뉴스N제주
  • 승인 2022.10.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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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천양희 시집, 『한국대표명시선 100』시인생각, 38쪽, 기차를 기다리며

기차를 기다리며

천양희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 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 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는 것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도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다는 걸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는 걸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인간, 기다림과 지나침의 철로를 사는 디아스포라』

기다림이란 말은 희망과 관련이 깊다. 약속된 기다림은 살아가는 힘이 되지만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 그 기다림의 빛깔이 다를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 기다리는 동안 시간과 공간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를 스쳐갈까? 천양희 시인의 시를 통해 기차역에서 인간의 한 생을 태우고 오는 기차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본다.

화자는 어느 역에서 플랫폼으로 들어올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기차를 타는 여행이라면 짧은 여정이 아님을 가늠하게 한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처럼 우리의 삶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기다림’에 시간성을 부여하여 기다림이 철로와 같은 길고 긴‘인내의 길’임을 일깨워준다. 그 기다림을 2행에서는“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라는 탄식이 가슴으로 질주해온다.

그것은 두 줄 평행으로 뻗은 철로의 모습에 투영된 우리의 삶을 관조한 것이다. 평생을 마주보며 살아가도 만날 수 없는“서러운 평행선”같은 것들은 무엇일까? 행간에서는 독자에게 사유의 몫으로 생략되었지만 그것은 물질이나 명예일 수도 있고, 사랑이나 행복일 수 있다. 혹은 평생 놓지 못하는 숙명적인 환경일 수 있다.

이제 시는 화자의 목적지와는 다른 목적지로 가는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육중하고 긴 철마의 위용과 무게와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의 존재에 압도된다. 그리고 그 무게를 말없이 버티어내는 철로의 인내와 멈추었다 출발하는 열차의 덜컹거림에 우리의 생을 반추해보게 한다. 그러면서“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삶이‘기다림’이라는 굴렁쇠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준다.

중반을 지나며 화자는 역을 정차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기차’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쾌속열차일 수도 있는 그 열차의‘지나침’을 보고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알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 버린다.”고 함으로,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기차의 질주와 그 속도에서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은유하고 있다. 특히 불완전함과 실수로 인한 우리의 행위와 말들을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로 비유하여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애환과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화자가 타고자 하는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무수한 열차가 역을 도착하고 지나쳐 간다. 시의 하반부는“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고 함으로‘기차의 존재’를‘나그네’와 같은 인간의 존재와 동일선상에 놓는다. 우리는 생을 살며 얼마나 많은 역과 같은 정착지에서 멈춤과 지나침을 겪게 되는가? 얼마나 많은 인연을 지나쳐 왔는가?

우리는 그 많은 기다림과 지나침을 통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발견하게 됨을 알게 된다. 그 무수한 기다림과 멈춤과 지나침의 연속에서“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수없이 기차역을 뒤에”두고 훌쩍 “한 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렸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지만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존재를 지나치기 쉽지만 머물기도 쉽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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