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6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그 밤의 영정
[김필영 시문학 칼럼](69)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그 밤의 영정
  • 뉴스N제주
  • 승인 2023.11.0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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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유종인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문학과지성 404) 54쪽, 그 밤의 영정, 감상평 : 김필영)

그 밤의 영정

유종인

웃고 있다
도무지 나오지 않는 얼굴로 웃고 있다
잘린 꽃들의 상부(上部)가 와서
숨을 놓은 당신의 얼굴을 에두르면서
오, 당신은 이제
시간의 뿌리, 그 아랫도리를 놓고
춥고 쌀쌀한 날 빗소리를 들일 아랫목을 놓고
아, 생의 시퍼런 들판 남도(南道)는 한 번 더 못 내려가고
혼백이 나뉜 꽃과 얼굴로
당신은
그 밤의 화안한 독거 화실(畵室)처럼
아랫도리가 잘린 꽃들에 둘러싸여
당신은 마음 없이 웃고
나는 취하면 안 되는데 걱정하며 취해갔다
하룻밤 사이,
우리는 뭔가 서로 다른 나라의 시민이 되어
아침이 와도
밀고 당길 문을 당신은 가지지 못했다
편편이 기억이거나 그늘이다
꽃을 들이밀어도 손으로 받지 않고
오래도록 문밖에 세워놓는다
영원도 모르고 영원에 던져진 당신,
영원을 손쓸 일 아득타

뉴스N제주가 주최한 '나의 시 나의 인생' 문학특강 가을편이 19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동안 뉴스N제주 스타디움(제주시 중앙로 253, 5층)에서 김필영 시인이자 평론가를 초대해 특강을 가졌다.
김필영 시인, 평론가

『망자(亡者)를 보내야 하는 가장 고독한 존재의 그 밤 』

길든 짧든 함께 살아온 가족과 사별하는 시간은 막막하다. ‘왜 떠나야 하느냐’고 목이 찢어지도록 부르짖어도 누구도 그 의문에 답을 줄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 납덩이처럼 끌려간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무너져 내리는 가슴은 절망과 설움이 뒤범벅되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고 싶은 밤은 수렁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그 밤, 그 영정 앞에서 별리를 감당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유종인 시인의 시를 통해 그 밤 영정 앞의 존재가 되어본다.

첫 행은 사별이라는 생애 최상의 슬픔과는 상반된 장면이 서술되고 있다. “웃고 있다 도무지 나오지 않는 얼굴로 웃고 있다”는 묘사가 그것이다. 보내야 하는 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무너져 내리는 가슴은 절망과 설움이 뒤범벅되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고 싶은데 고인의 모습을 담은 영정은 웃고 있으니, ‘울고 있다’는 표현보다 ‘웃고 있다’는 표현이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왜 떠나가야 하느냐는 울분에 왜 우느냐고 반문하듯, 웃고 있는 영정 속 고인의 모습이 남은 자들에겐 오히려 원망스럽고 야속하다.

살아가는 일들의 반복적인 문제들 속에 좋아하는 꽃을 가꿀 여유도 없었으나 떠나야 하는 시간에 목 잘린 꽃들이 얼굴을 에둘러 모여 있다. 이제 잘린 꽃에 둘러싸인 고인은 질곡의 “시간의 뿌리, 그 아랫도리를 놓”고, “춥고 쌀쌀한 날 빗소리를 들일 아랫목”도 놓고, “생의 시퍼런 들판 남도(南道)는 한 번 더 못 내려”갈 것이다. 이 점은 고인의 생애에 지극히 하찮은 일상의 일부를 서술한 것으로 느껴지나 그 사소한 일상마저 더는 할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 더 큰 상실의 아픔을 반어적 상황묘사로 강조한 셈이다.

3연으로 들어서면, 조문객의 발길도 끊긴 밤, 영정 속 망자와 화자가 밤을 새운다. 영정 속에서 망자는 여전히 딴전이다. 여전히 “그 밤의 화안한 독거 화실(畵室)처럼 아랫도리가 잘린 꽃들에 둘러싸여” 망자는 마음 없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런 현실상황에 낯설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아의 현실상황에 대한 인식의 감각이 흔들리고 있다.

어떤 위로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몇 잔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취하는지, 안취하는지, 찾아오는 조문객들께 미안하고 고마워서 “취하면 안 되는데 걱정하며” “하룻밤 사이, 우리는 뭔가 서로 다른 나라의 시민이 되어” 밤을 새운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 화자는 망자에 대한 현실 상황에서의 어떤 변화를 막연히 기대하는 듯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현실부정의 상황을 심리적으로 희구한다.

그러나 “아침이 와도 밀고 당길 문을 당신은 가지지 못했다.”는 행간에서 하룻밤을 새워도 여전히 영정 속 사진의 존재는 생과 사는 밀고 당기는 협상의 상태가 아닌 결과적 정지 상태임을 알게 한다. 현실부정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실망감으로 머릿속은 “편편이 기억이거나 그늘이다.”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잔인하고 집요하게 따라붙는 최대의 적인 죽음이라는 존재는 이처럼 사별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절망 속에 허덕이게 한다.

“꽃을 들이밀어도 손으로 받지 않고 오래도록 문밖에 세워놓는” 그 밤의 영정 앞에서 “영원도 모르고 영원에 던져진” 사랑하는 이가 “영원을 손쓸 일 아득”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장 고독한 존재의 그 밤을 통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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