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71)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소리를 디자인한다
[김필영 시문학 칼럼](71)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소리를 디자인한다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11.18 0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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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고종목 시집, 조각놀이『글나무』15쪽, 소리를 디자인한다

소리를 디자인한다

고종목

가위손을 쥐었다 펼 때마다
가위에다 몸의 신경 줄을 건다
새파란 가윗날이 깊은 어둠을 연다
어둠 속에서 사륵사륵 눈 내리는 소리 열린다
가윗날에서 떨어져 나간 신경 줄 한끝
휘파람새 부리에 닿아
아침 안개 저녁노을을 불러 온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적시는 빗소리에 닿아
풀벌레 울음을 깨우고 바람 소리에 닿아
모래섬 산호섬 돌섬을 먼 바다에 심는다
소리보다 먼저 수평선에 가닿은 마음 한 가닥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실려 돌돌 말아 되돌아온다
동트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갈매기 울음 속에서
바다의 자궁 속에서 듣던 물소리
하늘에 걸린 금줄을 흔들어 일곱 빛깔의 소리를 낸다
가위손이 잡은 흰말채나무 지휘봉으로
아기 공룡의 발자국을 디자인한다

김필영 시인
김필영 시인

『천을 자르는 가위소리로 모자이크한 소리의 조각보』

사물을 절단할 때 나는 소리는 절단도구의 강도와 예리함의 정도, 절단물성의 분자구조 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제초도구로 풀을 베는 소리,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소리, 석재공장에서 돌을 절단하는 소리, 조리사가 식도로 식품을 자르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가 날 수 있다.

옷감이나 자수나 수공예품을 만들 때, 천을 조각으로 재단하기 위해 가위질을 할 때는 어떤 소리가 들리는가? 고종목 시인의 시는 가위질을 통해 어떻게 소리를 디자인 하는가?

화자는 조각보를 만들기 위에 재단할 천을 앞에 놓고 가위질을 하려한다. 가위를 쥐고 잘라야 할 천에 가위를 들이댈 때 긴장이 고조된다.

시는 그 순간을 “가위손을 쥐었다 펼 때마다/ 가위에다 몸의 신경 줄을 건다.”고 함으로 몸과 가위가 외적인 일체감을 넘어 예민한 신경계에까지 일체감으로 연결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가위질이라는 행위의 정확성 가부에 따라 잘라진 천조각의 운명과 가치가 좌우되는 중대한 순간임을 직감케 하고 있다.

이제 천을 자르기 위해 신경줄을 걸고 가윗날이 천을 자를 때, “새파란 가윗날이 깊은 어둠을 연다.”고 역설적 표현을 주목한다.

원단의 자태를 가위라는 도구로 손상시키는 행위에서 가윗날이 어떻게 어둠을 여는 것일까? ‘천’이라는 몸이 조각나는 행위, 더욱이 조각보를 만들려고 미리 계획된 ‘조각보’ 디자인에 따라 가위가 지나갈 때, 삼각형, 사각형, 원형, 또는 다각형 조각천이 생겨날 것이다.

‘천 자르기’라는 가위질에서 시작된다는 면에서 개성적인 고유물체가 만들어지기 전, 원단이라는 재료의 대기상태는 어둠이라 할 수 있고, ‘조각보’라는 작품의 탄생을 위해 가윗날에 천이 잘라지는 것이므로 어둠을 연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중반으로 접어들면, 가위를 들고 천에 가위질을 하는 순간, 가윗날에 천이 잘리며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상현상에 대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가윗날이 만든 첫소리는“어둠 속에서 사륵사륵 눈 내리는” 소리가 열리는 것이다. 이는 아무도 모르게 내리는 눈의 역할을 생각해보게 된다. 세상 온갖 부조화의 모습을 죄다 덮어버리는 눈처럼 가위로 천을 자르는 것은 바느질하는 자의 마음에 내리는 눈처럼 모든 것을 덮어 잊어버린 상태로 가위질에 임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제 화자는 천을 자르는 가위가 지나가는 과정에서 ‘신경 줄 한끝’의 이탈하는 것을 방임한다. 그러자 “가윗날에서 떨어져 나간 신경 줄 한끝/ 휘파람새 부리에 닿아/ 아침 안개 저녁노을을 불러온다.”

아침 안개는 가윗날에 잘린 조각천이 만들어낼 작품의 무한성을 은유한 것일 수 있으며, 저녁노을은 아름다움의 예술적 이미지를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조각천으로 변모하는 다양한 형태는 시공을 초월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쳐준다. 계절을 초월하고 장소를 초월해 수평선에서 파도에 실려 다시 돌아오는 소리의 조각들은 “바다의 자궁 속에서 듣던” 해조음으로, 하늘에 “일곱 빛깔의 소리”로 들려온다.

천을 자르는 가위소리를 듣고 아기공룡의 발자국까지 생명의 시대를 넘나드는 상상의 조각보들은 화자이자 시인의 분신들이다.

시의 본문에 조각보를 만드는 바느질 장면묘사는 행간 어디에도 없으나 창조적 조각보를 만들기 위해 가윗날로 천을 자를 때, 어둠을 열어 분신과 같은 조각보의 독특한 모습들을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디자인하는 상상력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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