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66)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돼지의 속눈썹
[김필영 시문학 칼럼](66)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 돼지의 속눈썹
  • 뉴스N제주
  • 승인 2023.10.14 01: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박형준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116쪽. 돼지의 속눈썹

돼지의 속눈썹

박형준

밤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거울을 보고 운다
누군가 거울 속에서
부드럽게 속눈썹을 만진다
수에 떠내려가는 자운영
지붕 위로 떠밀려온 꽃밭
그 위에서 울고 있는 돼지
흙탕물 속에서
꽃 뿌리에 감긴 다리
꽃잎의 흙탕물이 밴
돼지의 속눈썹
거센 비 지나간 후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다
누구도 지붕 위에서 혼자 울고 있는
돼지에게 말을 걸지 마라
생의 널빤지를 잡고
죽은 자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는
도시의 수평선에서
간신히 귀환하는 날
거울 속에서,
고독한 집의 강물에서,
지붕을 타고 하류를 떠내려간 돼지가
울고 있는 밤이 있다

뉴스N제주가 주최한 '나의 시 나의 인생' 문학특강 가을편이 19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동안 뉴스N제주 스타디움(제주시 중앙로 253, 5층)에서 김필영 시인이자 평론가를 초대해 특강을 가졌다.
평론가 김필영 시인

 

『표류하는 현대인을 바라보는 젖은 속눈썹』

시골집에 기르던 돼지가 엄동설한에 새끼를 낳을 때, 맹추위에 덜덜 떠는 어린 것들이 가엾어 어머니는 더운 물로 씻겨 방으로 데려온 적이 있었다. 속눈썹이 길고 눈빛이 참 맑았다.

그날의 속눈썹 깜박이는 새끼돼지의 눈빛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람 가까이 가축으로 자라 온 몸을 오직 사람을 위해 바치고 떠나는 돼지이기에 그 속눈썹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박형준 시인이「돼지의 속눈썹」을 통해 현대인을 바라본 시선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첫 연은 “밤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거울을 보고 운다”로 시작된다. 화자는 왜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들여다보고 우는 것일까? “누군가 거울 속에서 부드럽게 속눈썹을 만”지기 때문이다.

눈빛이 사물을 향하게 될 때 반드시 통과하는 곳이 속눈썹이다. 사랑하는 마음의 눈빛이 속눈썹 사이를 통과할 때 견사 날실 한 올 한 올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반짝인다.

마음이 눈물샘을 적실 때 처마 끝이 봄비에 젖듯, 맨 먼저 속눈썹이 젖는다. 일상에 허덕이다 늦게 귀가한 날 거울 속 젖은 속눈썹 사이로 물질문명에 쫒기며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보인다.

거울을 통해 둘째 연은 뉴스의 한 장면 같은 과거로 돌아간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자운영 지붕 위로 떠밀려온 꽃밭”이라면 얼마나 생경한 장면인가? 그런데 강물에 떠내려가는 지붕 “그 위에서 울고 있는 돼지”를 발견하게 된다. 탈출해 보려고 몸부림치다가 “흙탕물 속에서 꽃 뿌리에 감긴 다리”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돼지의 모습이다. 아무도 돼지가 떠내려가는 탁류의 강물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때 화자는 “꽃잎의 흙탕물이 밴 돼지의 속눈썹”을 보게 된다. 이 돼지의 젖은 속눈썹은 1연의 거울 속에서 우는 화자의 모습과 닮은 것이다.

3연은 절망적인 장면은 사라지고 “거센 비 지나간 후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행간은 “누구도 지붕 위에서 혼자 울고 있는 돼지에게 말을 걸지 마라”고 부르짖고 있다.

“밤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거울을 보고” 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군가 거울 속에서 부드럽게 속눈썹을 만”져주는 존재는 “홍수에 떠내려가는 자운영 지붕 위로 떠밀려온 꽃밭 그 위에서 울고 있는 돼지, 흙탕물 속에서 꽃 뿌리에 감긴 다리, 꽃잎의 흙탕물이 밴” 속눈썹으로 울던 돼지와 같은 존재인 우리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은 2연의 과거의 화자가 첫 연의 거울 속 현재로 회귀한다. “생의 널빤지를 잡고 죽은 자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는 도시의 수평선에서 간신히 귀환하는” 존재는 2연의 “홍수에 떠내려가는 자운영 지붕 위로 떠밀려온 꽃밭 그 위에서 울고 있는 돼지”의 모습과 같은 이미지로서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거울 속에서, 고독한 집의 강물에서, “흙탕물 속에서 꽃 뿌리에 감긴 다리 꽃잎의 흙탕물이 밴 돼지”가 울고 있는 그 절망의 2연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거울’이라는 반사물체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강물에 떠내려가며 울고 있는 돼지의 젖은 속눈썹을 통해 “생의 널빤지를 잡고 죽은 자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치는 도시의 수평선에서” 간신히 고독한 집의 강물로 돌아오는 현대인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 울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