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남 칼럼](8)희망과 성공의 차이 ... 설계 덕후의 창업기
[김택남 칼럼](8)희망과 성공의 차이 ... 설계 덕후의 창업기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07.08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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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김택남 자서전]내가 꿈꾸고 설계하는 세상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19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이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끌면서 오타쿠(Otaku,オタク)라는 단어가 외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국과 타이완,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특정 분야에 몰두하는 사람을 오타쿠라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타쿠를 한국식 표현으로 ‘오덕후’라고 하거나 줄여서 ‘덕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처 분야에만 한정해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한 분야에 깊게 심취하는 사람을 두루 일컫는다. 직업과 취미가 일치하는 사람을 두고 ‘덕업일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출처:백과사전]

뉴스N제주가 창간 5주년을 맞아 마련한 '김택남 칼럼' 제8탄의 주제는 바로 '선택'이다.

필자는 며칠 전 사업을 하는 여 사장님을 만나 차를 마시는데 그분이 하신 말중에 생각나는 말이 있다. 직장생활하는 사람들 불쌍하다고 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하니깐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서 피곤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월급도 많이 받지 못하는데 여러가지로 불쌍하다"고 했다.

단편적인 말이지만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사업을 하려해도 특별한 사업 아이템이나 자본이 없으면 엄두도 못내고 또, 잘 된다는 보장도 없기에 어쩔 수 없아 직장생활하는 분들이 많다.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려면 무언가 결단이 필요하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지난번 1편에도 언급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네 인생, 'B와 D사이엔 4C가 있다'고 했다. 즉, 'B(birth)'와 'D(death)'사이엔 '4C' 즉 기회(chance), 선택(choice), 변화(change),도전(challenge)만이 성공의 길로 가는 요소인 것이다.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내 인생에 기회가 왔는데 그 기회를 모르고 계속 부지런히 직장생활만 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에 대한 눈을 뜨지 못한다.

결국,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김택남 회장의 성공 요인은 바로 이 선택을 잘 했다는 것이다. 신중하게 기회를 알고 선택을 했다면 다른 요인들은 따라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꿈을 가졌는가. 
꿈은 미래에 대한 기대다.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다.
-김택남

오늘도 당신에게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그 기회를 잘 선택해서 도전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반드시 인생 역전이 올 것이다. 그것을 이번 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미리 안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해보고 나서 새로운 경험을 축적시키는 것이 훨씬 인생에 있어서 의미가 있기에 도전하는 것, 두려워 하지 말기.

오늘도 이 글을 읽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되기를 기원하고 나만의 행복한 도전을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빌면서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김택남 천마그룹 회장
김택남 천마그룹 회장

 

설계 덕후의 창업기

1978년, 부모님이 깨를 팔아 마련해 주신 3000원, 어머니가 나를 따로 불러 부엌 찬장에서 꺼내주신 500원, 도합 3500원을 쥐고 집을 떠났다. 자장면 한 그릇이 200~3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은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하라는 말씀 대신 "가서 잘 해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많이 힘들면 그냥 집에 돌아와도 돼. 너는 공부를 많이 했으니 제주에서도 일할 데가 있을 거야"라고 하셨다.

형 둘, 누나 하나, 여동생 둘인 우리집에서 공고를 졸업한 내가 가장 많이 공부한 게 우리집이었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오히려 내 퇴로를 막아버렸다.

진나리를 치기 위해 출병한 항우가 장하(章河)를 건너자, 타고 온 배를 모두 침몰시키고, 밥 지을 솥도 다 깨뜨려 버렸다. 병사들에게는 3일치 식량만 나눠주었다.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 먹을 솥마저 없다.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병사들은 무섭게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3일 동안 아홉 번의 전투를 치렀다. 진나라의 주력 부대는 궤멸되고 항우는 제장의 맹주가 되었다.

돌아보니 그때 내 마음이 꼭 '파부침주(破釜沈舟)였다.

나는 보란 듯이 성공하고 돌아와 다 기울어진 우리집을 떠받치고 지칠대로 지친 부모님의 마음과 어깨를 펴 드리고 싶었다.

육지에서 일할 동안 단 한 번도 그 마음이 변한 적 없다. 하지만 성공이 정확하게 어떤 건지,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는 몰랐다. 대책도 없고 막연하지만 아무튼 끝까지 희망은 품고 살았다.

평택에서 울산 조립부로 복귀한 후 설계부에서 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늘 사규에 막혔다.

그럴 때 포스코엔지니어링에서 광양제철소에서 일할 설계부문 경력자를 모집했다.(1976년 신설한 포스코종합제철엔지니어링은 2017년 포스코건설에 다시 합병됐다.)

나도 어쨌든 전기설계 경력자이지만 스펙이 너무 빈약했다. 하지만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말이 생각났다.

"해보기는 해 봤어?"

환경과 조건이 바뀌는데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있다. 새로운 변화나 시도보다 기존의 현실에 안주한다. 더 큰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실패나 손실을 피하려는 이런 경향을 '손실 회피 편향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이러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전 영국총리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내가 낙관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돌적인 면은 있다. 빈약한 스펙을 그냥 들이밀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다행히 새 둥지를 튼 포스코엔지니어링에서도 꼼꼼하고 야무지게 일을 잘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설계가 좋았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도면을 풀어내 그때 그 장소에 필요한 설계도를 만들어 내는 그 일 자체가 너무 좋았다. 나는 '설계 덕후'가 됐다.

포스코엔지니어링에서 외주를 주는 설계는 내가 표준기술서를 만들어 주면 그들이 상세 설계도면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오는 설계도면에 늘 문제가 보였다.

다른 공정도 다 까다롭지만 1500도가 넘는 쇳물을 만드는 제선공정은 특히 전기설비 스펙이 복잡하고 엄격하다.

김택남 회장
젊은 시절 현장에서 김택남 회장 모습

우리는 늘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한다.

틈이 많은 설계도면을 돌려보내면 외주업체들은 그 원인을 나의 깐깐한 성격 탓으로 돌렸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잘 되면 내 덕, 안 되면 남 탓이다. 내 잘못은 환경 탓이고, 남 잘못은 그 사람 탓이다.

자신들이 그린 설계도면에 문제가 있어도 남 탓이다. 그러고는 밥을 먹자, 술을 마시자는 등 엉뚱한 방항에서 문제를 풀려고 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좀 무뚝뚝한 편이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일단 말이 짧고 간단하다. 처음 만나면, 대부분 그런 나를 어려워한다.

아마 나의 큰 키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할 것 같다. 가끔 선배나 동료들과 함께 외주업체를 만나도 그들이 어린 나를 어려워했다. 그러면 마치 내가 문제아가 된 기분이었다.

더는 이런 자리에 나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외주업체 대표가 설계도면 얘기를 꺼냈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기준에 맞지 않는 설계는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그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순간 멍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김계장이 설계를 좀 해줘. 우리가 납기를 못 맞추면 우리 회사도 문 닫지만 전기설비팀도 문제가 생기잖아."

그의 말대로 설계가 늦어져 부품 공급이 제때 안되면 그 책임은 나뿐만 아니라 전기설비팀이 떠안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이 천근만근이었다.

다음날 과장에게 그대로 보고하자, 돌아온 과장 말이 뜻밖이었다.

"자네가 설계하는 건 원칙에 맞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공기를 지켜야 하는 것도 원칙이야."

만약 내가 설계한 게 문제가 되면 내 개인 문제이지만, 공기를 놓치면 전기설비팀 전체의 문제다.

나는 퇴근 후 설계를 시작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즐거웠다. 나는 설계 덕후였고, 설계는 나의 덕질이었다.

공자가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듯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고 또한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2년 4월 광양제철소가 준공되고 나는 포항 포스코엔지니어링으로 복귀했다. 광양제철소 플랜트설계는 나에게 엄청난 커리어로 남았다.

나는 진작부터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 때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온다. 누구는 기회를 잡고, 누구는 기회를 놓친다. 그게 기회라는 것을 알아 채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이 말렸다.

열에 아홉은 기회 앞에서 망설인다. 실패할 거라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 이렇게 합리화한다.

이렇게 무모하게 시작해서는 안 되지! 앞으로 영원히 해야 될 일이니 좀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반면 지나가는 기회를 붙들고 도전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합리화한다.

실패해도 좋다! 실패는 오래 가지 않는다! 설사 실패해도 실패를 닫고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두려움 앞에서 서로 다르게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 차이가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 인생을 결정한다.

절대 안 된다며 겁주는 사람들의 조언을 따를 건지,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을 나 혼자만의 결정으로 밀어붙일 건지, 갈림길에서 나는 내 본능을 선택했다.

당시 국내 건설 붐이 한창 이었고 내 나이는 서른 두 살이었다. 아내도 다른 사람들처럼 걱정하는 눈치면서도 다행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해주었다. 만약 아내까지 끝내 안 된다고 했으면 내가 어떻게 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결정이 나와 아내의 인생까지 바꾼 건 사실이다.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몇 번이나 내 결정을 후회하기는 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가 말했다.

"육지에서 멀 어질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나는 수평선을 향해 나가기 위해 '태평양기전'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내가 쥔 자본은 퇴직금 300만원이 전부였다. 은행융자를 받아야 했는데, 포항에서 이발소를 하던 큰형은 보증을 서줄 수가 없다고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큰형이 현명했다. 나는 가진 게 너무 없었다.

오로지 성공하겠다는 막연한 희망뿐이었다. 포항시 남구 상도동 지인의 사무실 한 켠을 빌리고, 처남과 경리 여직원, 나 셋이 시작했다.

설계와 제작은 모두 내 담당이었다. 개업 초기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흔히 스위치보드라고 하는 수배전반을 제작했다.

아내 손까지 빌렸다.

직원 두 사람 봉급 주기도 빠듯하던 사업이 안정되기 시작한 건 포스코가 생산하는 컨트롤박스의 외주제작을 맡으면서다. 한 업체가 나를 찾아와 포스코에서 자신들에게 컨트롤박스 제작을 발주하면서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실적도 없고 사업체 규모도 작은 태평양기전은 직접 포스코의 외주를 맡을 수 없었다.

안정된 직장을 떠날 때 동료와 선배들의 안팎의 생각을 모두 느꼈다. 용기는 부럽지만 잘 안 될 거라는 예상이 섞어 있었다.

나는 나를 입증하고 싶었다.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두 가지 강한 의욕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창업에 대한 두려움을 멋지게 극복하고 싶다는 의욕과 반드시 좋은 회사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욕.

덕분에 나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매일매일이 필사적이었다.

[김택남 자서전]내가 꿈꾸고 설계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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