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2024-03-29 11:40 (금)
>
[김택남 칼럼](4)희망과 성공의 차이 ... 나의 멘토
[김택남 칼럼](4)희망과 성공의 차이 ... 나의 멘토
  • 현달환 편집국장
  • 승인 2023.06.10 06: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김택남 자서전]내가 꿈꾸고 설계하는 세상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창간 5주년을 맞아 마련한 '김택남 칼럼' 제3탄의 시작은 바로 '멘토'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나의 멘토'라는 제목을 보고 갑자기 스스로 생각해 본다. 나의 멘토는 누구일까?

사실 멘토는 나의 아버지다. 과거 농사시절에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자식들은 밭에 가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가 익을 때나 약을 치거나 할 때 같이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는 어떤 시대인가? 아이들이 아버지보다 더 똑똑한 인터넷, 디지털,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을 주무르는 시대로 접어들어 굳이 아버지의 조언이나 말이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지지 않고 있다.

과거 농사짓던 지식이나 경험이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부재다. 그래서 멘토,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나의 성공이나 발전을 위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시대에 왜 멘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지 그 이면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아버지가 부재하는 시대, 우리는 어떤 순간에 간절히 멘토를 필요로 할까?

멘토의 필요성에 대해 어떤 대기업의 설문조사를 참조하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뒤이어 ‘불확실한 미래로 두려울 때’, ‘지식이나 노하우가 부족할 때’,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을 때’라는 순으로 데이타가 나왔다.

이를 살펴보면 혼자 결정하기 힘들 때 멘토의 역량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멘토와 멘티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멘토와 멘티 사이에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지혜나 지식도 의미가 없다.

멘토는 멘티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며 이끌어주는 인물이다. 둘의 관계는 우연찮게 만나는 누군가일 때도 적지 않다고 한다.

당신은 어떤 꿈을 가졌는가

꿈은 미래에 대한 기대다.
어떤 미래를 꿈구고,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다. 

짧은 인연을 통해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고, 성숙해지는 일이 벌어지는데 내 인생의 성숙으로 붙들어주신 많은 멘토들은 앞으로도 종종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희망을 갖고 산다는 것, 이 또한 의미가 있다.

김택남 회장은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들에 의해 자기 성공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멘토는 나의 아버지라고  했다. 

오늘 존재감 없는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조용히 '아버지'라고 불러보고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영원한 스승이다. 내 인생의  레인보우다.

오늘도 좋은 시간이 되기를 빌면서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은 크게 성장한다.(사진은 살아 생전에 찍은 김태남 회장의 부모님모습)
사진은 살아 생전에 찍은 김태남 회장의 부모님모습

 

나의 멘토

멘토mentor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말이다. 조언자 또는 조력자 역할을 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가까이에서 자주 만날 수있는 멘토가 있고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 한 곡의 음악처럼 간접  영향을 주는 멘토도 있다.

스티브 잡스는 인텔의 전 CEO 앤디 그로브를 멘토로 생각했다.

"일류기업인은 위기로 발전한다"는 그로브의 말대로 자신이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나는 위기를 겪고도 아마 몇 세대가 흘러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세계적인 위인이 됐다.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창업한 빌게이츠는 뛰어난 투자 실력과 기부 활동으로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이 자신에게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과 장기적인 관점으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준 멘토라고 말했다.

워렌 버핏은 벤자민 그레이엄 교수를 멘토로 삼았다.

버핏은 그레이엄 교수가 쓴 <현명한 투자자>를읽고 그레이엄 교수가 있던 뉴욕 컬럼비아경영대학으로 무작정 찾아가 조언을 요청했다.

버핏은 그때를 자신이 미래의 억만장자가 되는 관계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멘토로 생각하는 공자에게도 멘토가 있었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의 시조로 추앙받는 주공이다. 공자는 주공이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춘 인물의 전형이라며 그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부모님이 멘토 역할을 해주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의 미래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철들고서야 깨달았다.

우리 부모님은 하루하루 어린 자식들을 굶기지 않을 방도만 생각했다. 형님들과 누나는 일찌감치 사회에 나가 일거리를 찾았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도 기술을 배우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나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동안 부모님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거나 시험 결과나 성적 같은 것을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1925년생인 아버지는 20살이 될 때까지 일제 강점기를 보냈다. 25살이던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자 자진 입대하셨다.당시 제주도는 전방에서 가장 먼 신병 보급기지였다.

신병은 만17세 이상의 제주 청년과 제주로 피난 온 육지 사람들이 입대했다.

신병 훈련 기간은 처음에는 12주였다가 전황이 나빠지자3주까지 단축됐다. 신병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된 아버지는총상을 입고 쓰러졌지만 무사히 구조되어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그런 당신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용기도 있었지만 가난을 벗어날 묘수는 찾지 못했다.

일거리를 찾아 육지에도나가봤지만 빈 손으로 돌아오셨다. 대신 이런저런 경험을 얻은 덕에 별 것 아닌 일도 마치 전문가처럼 자신 있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 자신감으로 동네 이장이라도 할까 했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후보 등록조차 거절당했다.

내가 아버지의 은근한 유혹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하자 아버지는 작전을 바꾸었다. 한림공업고등학교에 입학시험 치러 가는 날, 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공부는 무슨 공부, 남자가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니까."

그 뒤로도 아버지는 틈만 나면 사업 타령을 하셨는데, 나중에 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아버지는 늘 밖으로 일하러 다니는 어머니 대신 집의 살림을 맡았다. 아끼고 쪼개 써야만 했고, 그렇게 하셨다. 나는 어린 나이에 해녀가 된 누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책값 내줄 형편도 안 되는 아버지가 사업, 사업 하신 것은 그나마 나라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공부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고 단정했다. 학교를 다니며 시간을 까먹는 것보다 일찌감치 어떤 일이든 시작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더 악착같이 공부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부모님의 지원이나 격려 같은 게 있었다면,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하지 않았을것 것 같다. 의지할 데가 없었고, 그래서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그덕에 고2 때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딴 극소수의 학생에 포함됐다. 그 자격증으로 현대중공업에 취업했다.

현대중공업에서 혼자 익힌 설계기술로 설계전문회사인 포스코엔지니어링으로 이직하고, 포스코엔지니어링에서 쌓은 기술과 커리어로 내 회사를 창업했다.

내가 사업가가 되어 돌아오자 그제서야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큰소리로 말했다.

"거봐 김회장,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업하라고 했더니만 이렇게 성공했잖아!"

돌이켜 보니, 아버지가 내 멘토였다. 아버지는 현실적이었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무턱대고 공부만 잘하면 얼마든지 성공할수 있다는 빈말보다 나에게 분명한 꿈을 심어주었다.

내 형편에는 턱도 없지만,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업가가 인생목표로 자리잡았으니 말이다.

천마그룹 주위 정화활동 중인 김택남 회장과 직원들
천마그룹 주위 정화활동 중인 김택남 회장과 직원들

사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좀 더 현실적인 나의 멘토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또 다른 기질을 나에게 물려주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마을에서 소문난 억척 어명이었다.

생활력 강하기로 소문난 제주 어멍들도 우리 어머니의 강한 의지와 부지런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물질에는 영 소질이 없었던 어머니는 대신 땅위에서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열심히 일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어려운 살림에도 저축했다. 5,60년대에 제주도에도 해외에서 들어온 쌀과 밀가루 등 구호물자가 배급됐다.

구호물자 덕에 게을러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구호물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손대지 않고 모두 모았다.

그렇게 모은 곡식을 판 돈으로 집을 구했다. 1959년에 내가 태어난 한림읍 월령리 집이 무려 다섯 번의 이사 끝에 장만한 집이었다.

회사 일이란 늘 크고 작은 장애물을 만난다. 장애물에 막혀 멈춰서면 아까운 시간과 돈이 마치 꼭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물 새듯이 흘러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임직원은 한숨만 내쉰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는 대체로 방법을 찾아낸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더 절박하기 때문이다.

절박하면 보인다. 흔히 말하는 주인의식은 함께 절박하자는 말이다. 아까운 시간과 돈이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간다고 생각하면 뭐든 방법이 보인다.

나는 자식들을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어떤 방법이든 기어코 해결책을 찾아낸다.

어쩌면 내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악착같은 게 아니라 그런 어머니를 잊지 않기 위해 그 기질을 따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담당 직원을 재촉하여 함께 새 길을 만든다.

임직원들도 그렇게 단련되고 강해진다. 그렇게 나도 누군가의 멘토가 된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다음주에 계속]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