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남 칼럼](5)희망과 성공의 차이 ... 제주의 역사를 품은 천마
[김택남 칼럼](5)희망과 성공의 차이 ... 제주의 역사를 품은 천마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06.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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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김택남 자서전]내가 꿈꾸고 설계하는 세상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5주년 창간기념에 맞춰 '김택남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두번째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내가 꿈꾸고 설계하는 세상'이라는 내용을 보고 독자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지난 번 제1권 책에 김택남 회장의 '천마와의 만남'이라는 내용에서 김택남 회장이 육지에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제주에서의 귀향하는 모습과 우여곡절 끝에 천마기업을 인수하고 제주에 안착한 김택남 회장의 제주의 삶을 서술했다.

"선택과 집중"

김택남 회장은 선택에 있어서 신중한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선택을 했으면 집중하는 모습은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천마의 역사는 어쩌면 창업자의 선택으로 제주에 준 선물이라고 평하고 싶다.

아래 본문에서 서술되지만 김택남 회장의 육지에서 겪은 많은 경험으로 천마의 인수과정에서 그는 돈 보다도 인간관계를 더 중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업 인수금이 없는데 차용증 없이 돈을 빌려주는 모습, 천마를 인수하고 한탕해서 도망가는 그런 기업가 모습이 아닌 직원들과의 끈끈한 정을 우선시 해서 직원들에게 신뢰를 주려는 노력이 김택남 회장이 이제까지 버티어 온 힘이 아닐까.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와야 한다.

우리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에 뒷모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함부로 행동을 못한다. 앞에서는 그럴 듯하게 포장해도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은 그 사람의 진실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포항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제주에 토종기업을 인수하려고 할 때도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줬다.

그러기에, 그의 진심이 통했기에, 아내가, 친척이, 가족이 응원하고 결국 직원들도 감복해서 최선을 다해 기업을 살리려고 노력한 것이다.

자만하지 않고 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의 수양을 쌓고 있는 사람, 좋은 책이 있으면 언제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책 선물을 하는 사람.

지금은 애월읍 광령리로 천마그룹 본사가 이전됐지만 그 전 탑동에 위치한 천마그룹의 건물은 아름다운 건물로 비춰졌다.

"꿈(목표)을 만들고 끊임없이 도전할 때 비로소 그 꿈이 현실이 된다."(김택남. 후배들에게 특강서)

'자신이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뒤 육지에서 30여 년만에 고향 제주의 향토기업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김 회장은 자신의 인생스토리의 성공요소로 '양보'를 꼽는다.

김 회장은 "삶을 살다보면 남을 이겨야 인생에서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람이 있지만 시간이 흘러 자신의 뒤를 돌아보면 남에게 양보하며 살아온 삶이 행복하고 그 열매도 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내 삶은 도전과 양보의 연속이었다"며 "그런 삶 속에서 작은 성공들이 이뤄졌고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제주의 천마그룹은 현재 에너지, 건설, 언론, 제조업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천마그룹은 김택남 회장이 그림을 그리면서 개척해 나가고 있지만 크게 보면 제주 토종기업이다.
거기엔 사람이 있다. 제주 사람들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많은 인원들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는 가치관을 바꾸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다. 대개 기업들, 특히 재벌을 보는 눈이 부정적인 시각인데 존경의 마음으로 응원하면서 나도 그렇게 되야지 하는 생각의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내게도 기회가 왔을 때 전진할 수 있다.

지난 주에 '나의 멘토'라는 글을 실었지만 사업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멘토가 되어 그들에게 우리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직장을 은퇴하거나 새로 창업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개 경험 부족이다. 그러한 경험을 많이 듣고 사업을 시작한다면 적잖이 도움이 될 것이다. 

부자를 사랑해야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부자가 최고지만 다방면의 부자가 제주에 많이 탄생되기를 기원하면서 도민의 한사람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게 특히 응원을 보낸다.

이 글을 통해 '기회'와' '선택'과 '사명감' 등 이런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빌면서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김택남 천마그룹 회장

 

제주의 역사를 품은 천마

'붉은 산'은 소설가 김동인이 1932년,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에, 만주에서 소작으로 살아가는 조선인 마을이 나온다.

한 조선인이 만주인 지주에게 대들었다가 피투성이가 된다. 그가 눈을 감기 전, 고국산천을 그리워하며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싶다"고 말한다.

일제는 한반도의 원시림을 무지막지하게 잘라냈다. 다 자라서 경제성이 없는 노쇠한 나무와 숲이라는 명목이었다. '붉은산'은 붉은 흙이 보일 정도가 된 벌거숭이 산을 말한다.

1938년, 중국과의 전쟁을 위한 국가총동원령을 내린 일제는 그나마 남아 있던 목탄, 장작, 우마, 목초까지 군수물자로 징발했다.

제주도는 오름의 땅이다. 400여 개의 오름이 여기저기 솟아있다. 일제시대 대부분 '붉은 오름'이 되고 오름에서 땔감을 얻던 가난한 도민들은 말똥과 소똥, 흙을 털어내고 말린 풀까지 땔감으로 사용했다.

1943년, 제주시 동문로에 '하네다연탄상회'가 문을 열었다. 제주도민의 어려운 땔감 사정에 착안한 김봉학(1922~2001)씨가 전남 화순에서 무연탄을 반입하여 연탄을 만들었다.

사업이 번창하자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쿠니상회와 손잡고 일본에서도 석탄을 수입했다. 하지만 그의 서민형 에너지사업은 불행한 역사 앞에서 한순간에 멈춰 섰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열린 3.1절 집회에 거의 3만명에 이르는 도민이 모였다. 기마경찰의 흥분한 말에 어린아이가 다치자 화난 군중들이 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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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천마그룹 본사

경찰이 대응 사격을 하면서 사건이 엉뚱하게 커졌다. 당시 도민들이 요구한 것은 양곡 수집 정책의 폐기였다. 해방 후 해외동포의 귀환과 월남민의 증가로 식량이 부족하자 미군정은 미곡법을 실시했다.

농가마다 현미나 백미 0.45석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의무적으로 정부에 매도하게 했다. 마치 일제시대 강제 공출을연상시키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도 미곡 강제 공출은 있었지만 보리, 밀 등 제주 농민의 주된 식량인 하곡에 대한 강제 공출은 없었다. 항의하는 농민들과 곡물 징수 관리들과의 마찰이 잦았다.

단지 식량부족과 가난을 하소연했던 3.1절 집회 사건은 급기야 군과 경찰이 도민들을 공산당 세력으로 몰아 학살한 1948년 '4·3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밭농사와 바닷일만 하던 순박한 도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얼토당토 않는 좌·우 이념의 굴레를 씌웠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 희생자만 2만5000~3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들도 마치 피난민처럼 고향 마을을 떠났다.

그렇게 사라진 마을이 80여 군데나 됐다. 김봉학 씨도 제주도의 사정이 흉흉하던 1947년, 세 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50년대 연거푸 흉년까지 든 제주도민의 삶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런 제주도를 외면했다. 가난과 배고픔에 지칠 대로 지친 제주도민을 지원한 것은 정부가 아닌 재일제주도민들이었다.

천마그룹 본사(광령리 소재)
천마그룹 사명

일본은 1920 년대에 공업화를 시도했다. 1922년 한국인의 일본 도항을 허락한 것은 부족한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1923년 서귀포와 오사카 사이 항로를 개설하고, 일본 아마가사키기선회사가 이 항로를 매일 운항했다.

1927~1936년 1만5954 명의 한국인이 서귀포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로 건너갔다.

1928년 20만4420명이던 제주 인구가 1934년 18만8410명으로 줄어들었다. 지금도 오사카에 재일교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제주도민이 가장 많다. 재일 제주도민들은 어려운 생활비를 쪼개 제주도에 남아 있는 가족과 친척에게 보냈다.

일본으로 건너간 김봉학 씨와 동생들은 도쿄 아라카와구에서 천마합성수지를 창업했다. 미국에서 유행한 '훌라후프'(hula noop. 허리로 빙빙 돌리는 플라스틱링)를 일본에서 처음 생산한 천마합섬은 도쿄 증시에 상장될 만큼 성장했다.

재일 사업가로 성공한 김봉학 씨 등 재일 제주도민들은 그러나 고향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었다. 어쩌다 고향을 방문하면 감시의 눈이 따라다니는 사찰 대상이었다.

1961년 5월, 김영관 해군준장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했다.(당시 군정 시절이었다.) 제주도의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한 그는 도민들의 체념적인 삶을 바꿀 전환점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김영관 지사가 추진한 일이 4·3사건 이후 폐허가 된 중산간 마을의 복구와 재일 제주도민의 자유로운 고향 방문이었다.

1962년 4월 이원일을 단장으로 하는 1차 모국 방문단이 고향을 방문했다. 김영관 지사와 기관장, 유지들이 제주공항에 나와 1차로 방문한 14명의 동경 재일제주개발협회 회원들을 환영했다.

60년대 제주도 개발사업은 재일 제주도민들의 투자가 큰힘이 됐다. 김봉학 씨도 1966년 4월 14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65-1에 본사를 둔 천마물산을 설립했다. 그가 고향 제주도에서 다시 시작한 사업이 연탄 대신 LPG다.

천마그룹 본사(광령리 소재)
천마그룹 본사(광령리 소재)

유전에서 원유를 채취하면 액체석유와 기체석유가스가 함께 나온다. 기체를 운반이 용이하게끔 액화시킨 게 LPG다.

뉴욕타임즈가 1910년 3월 31일자 신문에 LPG를 이렇게 소개했다.
"쇠로 만든 병에 연료가 담겨 일반 가정에 3주면 도달할 수 있게 됐다.”

어느 회사에 들어와 함께 일하고 싶다면 최소한 그 회사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회사는 앞선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 노력으로 만든 조직이다. 그 토대를 만든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 과정을 모르고 그 조직의 완전한 일원이 되기는 어렵다. 그간에 만난 모든 문제와 해답이 축적돼 있는 역사를 따라가면 미래로 가는 길이 보인다.

1966년 천마물산에 이어 1969년 제주은행을 설립한 김봉학 대표는 아침 일찍 주변 상가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일찍 문을 열고 문앞을 깨끗이 청소하는 상점을 눈여겨보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은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법이 없다며, 그런 상점은 담보가 없어도 언제든 지원해 주라고 했다.

임직원들에게도 근면과 성실, 올바른 자세를 강조했다. 신입사원들에게 직접 인사법을 가르쳤다. 제주은행 직원들은 고객이 들어오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완고한 면도 있지만 임직원들과 순댓국을 먹으며 허물없이 농담하는 털털한 성격의 김봉학 대표는 꽤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

특히 '자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가는 임직원들을 보면 차를 세웠다.

당시 제주도에 하얀 벤츠는 한 대뿐이었다. 김봉학 대표가 타고 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직원이 하얀 벤츠를 보고 허둥대다가 그만 길옆 도랑에 처박히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도 경제계의 거인이던 그가 1995년 갑자기 쓰러지면서 그의 '에피소드'도 중단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막대한 부실채권이 발생한 제주은행은 신한금융지주에 넘어갔다. 병사의 부친을 대신했던 김성인 제주은행장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앞으로 막대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장이 날아와 있었다. 한 언론은 어쩌면 김봉학 대표 일가와 제주은행이 IMF외환위기와 금융구조조정의 최대 피해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LPG 유통, 부동산 임대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온 천마물산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다.

2005년, 근 40년간 독점해온 LPG 충전시장에 새로운 사업자가 들어오자 주주들은 회사 매각을 결정했다.

반면 천마물산 노조는 회사의 일방적인 매각을 반대했다. 천마물산 인수를 검토하던 투자금융사는 그런 노조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나는 어떤 결정이 필요하면 머릿속에서
관련 사실과 정보들을 마치 설계도를 그리듯 연결시켜 본다.

그런 경험과 습관이 쌓이면서
판단이나 예측의 정확도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 '걸림돌'이 나에게는 기회로 연결됐다.(어떤 일이든 우연은 없다. 반드시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

"타지 사람보다는 제주가 고향인 사람이면 노조의 반대가 그나마 덜 심하지 않을까"라고 기대한 것이다.

기업 인수작업은 짧게는 수개월 내에 끝나기도 하지만 길게는 수년 이상이 걸린다.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한 인수전략 수립 및 실사, 실행 등 일련의 작업이 진행된다. 나에게 천마물산을 소개한 사촌동생은 나를 설득하는 한편 투자금융사에 나를 주주 대표로 추천했다.

나는 동생이 설명해준 천마물산의 히스토리에서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꼈다. 제주의 굴곡 많은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천마물산을 다른 외지인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제주 토박이인 내가 인수하여 멋지게 다시 날게 하고 싶었다. 김봉학 대표는 나처럼 키가 크고 거구였다.

내가 천마물산을 인수하자 그와 내가 같은 핏줄이라는 소문이 제주도에 나돌았다. 나는 친인척은 아니지만 그의 사업가의 꿈과 열정을 유지하고 싶었다.

보통 기업이나 사업이 성공하려면 그 바탕에 그 기업과 조직에 대한 리더의 강한 사명감과 애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적인 성공 요소를 안고 시작했던 셈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새 인수자로 나선 내가 제주 토박이라는 말을 듣고 반대 일색이던 노조가 꽤 많이 찬성 쪽으로 기울었다고 했다.[다음 주에 계속] 

사진=제민일보
사진=제민일보

◇제주의 역사를 품은 천마

어느 회사에 들어와 함께 일하고 싶다면 최소한 그 회사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회사는 앞선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 노력으로 만든 조직이다.

그 토대를 만든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 과정을 모르고 그 조직의 완전한 일원이 되기는 어렵다. 그간에 만난 모든 문제와 해답이 축적돼 있는 역사를 따라가면 미래로 가는 길이 보인다.

◇강한 사명감과 애정

나는 천마물산의 히스토리에서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꼈다. 제주의 굴곡 많은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천마물산을 다른 외지인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제주 토박이인 내가 인수하여 멋지게 다시 날게 하고 싶었다. 기업이나 사업이 성공하려면 그 바탕에 그 기업과 조직에 대한 리더의 강한 사명감과 애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적인 성공 요소를 안고 시작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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