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7)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대학원 갈 준비를 하고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7)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대학원 갈 준비를 하고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3.03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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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이번 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이끈 여러 명사들과의 인연을 서술했다.

특히, 고충석 총장의 에세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접촉'을 할 수 있음에 매우 흥분이 되었다.

고 총장의 인생은 60년생 이후 겪어보지 못했던 시절을 음미해 보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고 총장이 걸어온 길이 굉장히 흥미롭고 제주의 섬소년이 어떻게 총장까지 올라갔는지 그의 행보를 우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접해 보는 것이다.

지난 주 고 총장님을 만나 앞으로 내용을 조금씩 줄여서 전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요즘 트렌드에 맞춰 조금씩 하려고 한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7번 째 이야기 :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대학원 갈 준비를 하고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며 4학년 1학기가 끝났고 총학생회 임기도 만료되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별다른 공부도 해놓은 것이 없었다. 읽을 책들을 몇 권 챙겨서 무작정 초정약수가 있는 청주의 어느 절로 들어갔다. 거기서 두 달 정도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일단은 대학원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력이 안 좋은 관계로 보충역 판정을 이미 받아놓은 상태였다. 방위로 군 복무를 마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벌 수 있었다.

“현역으로 군대에 간 동기들보다 2년을 버는 샘인데 사회에 일찍 나가면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서울로 돌아와 대학원에 진학할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학자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에 가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학부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에 책을 많이 읽으며 시간을 좀 벌고 싶었다. 그때 비로소 집중적으로 행정학 공부도 했고 시사영어 학원 타임 반에 등록해서 영어공부도 시작했다.

하숙집도 옮겼다. 강창일(전 국회의원, 현 주일대사)하고는 고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 대학다닐 때도 자주 만나서 술도 많이 먹고 언쟁도 자주 했다.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다.

“형! 형편도 넉넉지 않고 그러니 생활비도 아낄 겸 우리 누님 집에 와서 같이 살면 어떻겠소?”

강창일의 권유로 그의 누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성자 누님은 강 의원 형제 중에서 제일 통이 큰 여장부였다. 후에 경제적으로 재산도 꽤 이루었다. 내 짐작이지만 강 의원이 정치하면서 누님 신세도 많이 졌을 것이다.

그렇게 더부살이가 시작되었는데 성자 누님은 나에게 친 누님처럼 잘해주었다. 내 집이나 진배없이 편하게 지냈다. 한동안, 한 식구처럼 흉허물 없이 살았다. 창일이는 나와 함께 누님 집에 살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다.

그는 ROTC 신분인데도 여전히 술도 많이 마시고 진보적인 동료, 선배, 후배들과 많이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창일은 가끔 나에게 읽어보라고 역사책을 권해주곤 했다. 연세대 김용섭 선생님이 쓰신 책이나 논문이었던 같다.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나는 어릴 때부터 역사책 읽기를 좋아했다. 우도중학교 1학년 때, 전국 중·고등학교를 순회하면서 우리 역사를 강의하는 선생님이 하루는 우도 중학교까지 찾아왔다. 그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찬란했던 고구려가 왜 망했느냐고 질문하셨다.

내가 손을 들어 그 원인과 과정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이런 낙도 학교에서도 이토록 역사를 잘 아는 소년이 있냐고 하시며 매우 칭찬해 주셨다. 어쩌면 오늘날의 역사교육이 그때보다도 못한 것 같아 씁쓸한 적이 많다.

창일이가 추천해준 김 교수의 글은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는 고시답안지 같았다. 조선 중기 이후 조선에도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실증적 사료들을 들어가며 고증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맹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경영형부농( 經營型 富農)들의 사회경제적인 의미를 천착한 글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사학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증거방법은 철저히 실증사학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책을 읽으면서 왜 자본주의적인 맹아가 조선에서 꽃망울을 터트릴 수 없었을까 하는 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원인을 조선의 신분제적인 사회경제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성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 성과를 양반들이 다 가져가는데, 누가 자신에게 이득이 전혀 돌아 오지 않은 노력을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당연히 경쟁을 통해서 시너지(synergy) 효과가 창출되어야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고 시정(市井)에 오래부터 회자되는 말이 있다. 그러나 보상체계의 기준이 공정하면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심성’이 선의의 경쟁으로 바뀐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탄압했지만,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심성을 제도와 정책으로 잘 살려내서 국부의 기반을 닦았다. 그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마을의 근면. 협동. 자조적 노력의 수준에 따라서 그에 상응한 인센티브로 철근과 시멘트의 양을 차등화 시켰다.

일한 만큼 보상을 연동시켰다. 이러한 원리가 작용해서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령 시절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날 그 새마을 운동을 배우기 위해서 오는 후진국 지도자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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