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6)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6)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4.02.2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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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이번 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이끈 여러 명사들과의 인연을 서술했다.

특히, 고충석 총장의 에세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접촉'을 할 수 있음에 매우 흥분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박목월 시인, 이은상, 김동진이라는 이름과 비화를 알 수 있음에 더욱 흥미진진함에 나도 잃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앞으로 내용을 조금씩 줄여서 전개할 예정이다. 더욱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바랍니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6번 째 이야기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대학 3학년 때쯤, 국민 가곡 「가고파」 후편 작곡 발표회가 숙명여대에서 있었다. 안성혁 형이 작사자 노산 이은상 선생님을 모시고 왔다. 나도 선생님을 직접 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날 처음으로 작곡가 김동진과 노산 이은상 두 분이 만났다고 들었다.

전편은 김동진 선생이 20대에 작곡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참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작곡한 후편은 그 노래가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전편보다 감흥이 떨어진다고들 평하였다.

역시 위대한 예술은 감수성이 충만한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해본다. 조지훈도 그 유명한 시 「승무(僧舞)」를 열아홉 살에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고파」 후편의 노랫말은 내가 느끼기에 전편보다 더 좋은 것 같다. 노산처럼 자신의 감정을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우리 문학사에 몇이나 될까?

지금도 「가고파』 후편을 읊으면 인생에 대한 잔잔한 애수가 저녁 붉은 노을처럼 피어오른다. 속절없는 세월 따라 아름답던 유년 시절도, 청춘도, 인생도,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는 애절함을 느낀다.

어느 송년 모임에서 노산 선생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노산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동양 고전을 종횡무진으로 횡단하면서 청년들에게 나라 사랑을 강조했다.

진정으로 나라 사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 감동적인 강연이었다.

"나라사랑은 국토 사랑에서 시작해야 한다.나라 있어야 산다. 그러나 나라 있는 것 많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 나라가 힘 있는 부강한 나라야 한다."

그렇다. 노산은 한국의 명산들을 자주 오르내렸고 그 명산들은 그가 쓴 시들의 모티프가 되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솔제니친은 소련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이 떨어져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을 때, 조국 소련을 떠나야만 하는 비애와 조국애를 비행기 타기 직전 땅바닥에 엎드려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극명하게 표출했다.

쇼팽도 조국 폴란드의 흙을 아주 작은 그릇에 담고 고국을 떠나왔다. 이들에게 땅은 어머니다. 이런 서사는 나라 사랑의 시작은 땅을 사랑하는 행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땅은 어머니다.

19세기 병약한 조국 조선을 보라. 나라는 있었지만 얼마나 강대국들에 유린당하였는가. 합석헌 선생의 표현대로 늙은 갈보의 신세가 되었다. 그런 나라를 주권을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부강한 나라가 아니면 구한말(舊韓末) 고종 같은 한심한 사람 수십 명이 있은들 무엇에 쓸 것인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민족은 그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가고파」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또 한 가지. 대학 4학년 어느 매우 추운 겨울 「가고파(전편)」을 부른 테너 이인범 선생의 영결식 행사가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있었다.

내가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인범 선생님은 음대 학장이었다. 선생님과 안면을 트고 지내던 사이라 나도 애도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영결식이 끝나고 운구차가 연세대 백양로를 한 바퀴 돌았다. 그때 선생님이 부른 「가고파」 노래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내 옆에는 유신 체제에 항거하다 옥살이까지 한 신과대학 김찬국 교수님이 서 계셨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오늘처럼 실감 나는 적이 없구나. 나도 목사로서 수많은 설교를 했지만 나 죽으면 나의 설교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평소에 나를 많이 아껴주셨던 김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며 내 등을 두어 번 두들겨주셨다. 그 후 「가고파」를 들을 때마다 이 장면이 생생하게 떠 오른다.

"내가 커피 스푼으로 내 삶을 재어왔기 때문에"라는 T. S. 엘리엇의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에 나오는 시구처럼 훌륭한 예술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볍고 하잘것없음을 느낀다.

문학과 사랑

대체로 문학작품은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이 있다. 안성혁 형 말에 의하면 「가고파」의 탄생도 노산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노산은 친구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노산의 부인은 한국에 사는 것이 우세스럽다며 딸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을 가버렸다. 그 딸이 심치선 선생과 이화고녀 동기동창이었는데 나중에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사회적 비난이 노산에게 쏟아졌다. 그래서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삶과 연맥되어서 나온 작품이 「가고파」라는 것이다.

이은상의 시 「소경되어지다」에서는 "봐오려 안 뵈는 임 눈 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되어지다."라고 했다.

눈이 멀어서라도 보고 싶다고 노래한 임이 누구였을지 생각해본다.

박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가 나오게 된 배경도 있다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통원 교수님이 이야기해주셨다. 내가 ㅈㄻ었을 때 제주대학교 교수였던 시인 강통원 선생님과는 드문드문 소주를 함께 마셨다.

장교수님은 술자리에서 "고 선생은 꽤 매력 있는 젊은 교수야. 당신은 낭만이 있어"라며 나를 많이 껴주셨다. 어느 날 무르익어가는 술자리에서 목월의 사랑의 도피 행각에 관한 이야기를 실감 나게 풀어놓으셨다.

목월은 번듯한 가정, 한양대 국문과 교수라는 명예까지 버리고 사랑을 좇아 제주에 와서 지냈다. 목월의 그녀는 명문 여대 국문과 4학년이었다.

이들은 당시 제주대학 캠퍼스 근처였던 용담동에 살았다고 한다. 목월은 제주대학교에서 가끔 강의도 했는데 영문학과 4학년이었던 강 교수님이 목월의 조교 역할을 자처했다고 한다.

강 교수는 자연스레 목월의 집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때마다 그 여인은 얼굴은 비추지 않고 커피를 타서 찻잔만 문틈으로 들여놓더란다.

그러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여인의 부모가 제주까지 쫓아 내려온 것이다.

목월은 여인을 태운 배가 당시의 제주부두였던 '산지항'을 떠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목석이 되어 서 있었다고 했다. 목월은 배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땅바닥을 내려치며 통곡을 하더란다.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강 교수님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며 그런데도 그들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데는 부인의 품격이 크게 한몫했을 거라고 얘기했다.

목월의 부인은 남편을 찾아 제주까지 내려왔고 궁색한 살림으로 남편과 함께 지내는 여인에게 오히려 힘들지 않으냐며 위로를 했다고 한다.

영감 잘 모시라는 당부와 함께 돈 봉투를 챙겨주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겨울 따뜻하게 보내라며 겨울옷까지 사서 건네주고는 아무 말 없이 서울로 돌아갔다고 한다.

강 교수님은 목월의 부인이 대단한 품격을 가졌다며 이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곤 했다.

그런 여장부이니 목월도 대단한 시인이 될 수 있었고 박동규 교수를 비롯해 자식들도 훌륭하게 키웠다는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목월의 친구인 황금찬 선생에 의해 이러한 서사가 여성지에 공개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나도 읽어봤는데 강 교수님께서 전하는 버전과 거의 엇비슷하다.

별리의 아픔을 정리하면서 쓴 시가 '기러기 울어에는 하늘 저멀리'로 시작하는 이별의 노래이다. 그 후 이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오늘날 국민이 애창하는 가곡이 되었다.

나는 이 시 중에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고 노래한 3절을 가장 좋아한다.

젊은 날에 훌륭한 강의를 듣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을 만나는 기회를 갖는 것은 일종의 문화접촉이다.

이를 통해서 세상과 인생을 보는 프레임(frame), 즉 뼈대를 조금씩 형성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주대 총장으로 있을 때는 '문화 광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운영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다양한 분야에 속한 사람들의 강연과 예술 등을 접할 수 있었다. 젊은 날은 새로운 체험, 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암묵지 등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가장 안성맞춤의 조직이 대학이다. 대학은 자유의 광장이고 학문의 백화점이며 다양한 생각을 가진 청춘들의 집합소 이기 때문이다.

나의 대학 생활은 종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총학생회 활동도 초심의 기대와는 달리 유신헌법(維新憲法)이 선포됨으로써 전방위적으로 위축되었다. 그저 연고전 응원이나 준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중에 MC로 유명해 진 임성훈 군이 당시 연세대학교 응원단장이었다.

그는 응원을 할 때마다 영양 주사를 맞을 정도로 몸이 약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그의 열정은 연고전을 더욱 뜨겁게 달궜다. 그런데도 연세대학교의 연고전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았다.

선배들이 교정에 진입해서 난동에 가까운 항의를 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려고 시작된 연고전이 왜곡되고 변질돰에 나는 분노했다.

그후에 나는 연세대학교가 발간하는 '연세춘추'에 '연고전 무용론'을 기고한 기억이 난다. 거기서 나라를 되찾은 오늘날에 연고전은 이미 시대적 소명을 다했으니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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