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4)소년, 둥지를 한 발짝 벗어나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4)소년, 둥지를 한 발짝 벗어나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4.02.12 1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지난 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장 마지막 글 어머님과의 이별 이야기에 필자는 꽤 많은 눈물을 흘렸다. 섬속의 섬 우도에서 태어난 고충석 총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 지난 일대기를 쓴 자전 에세이 제2편  '소년, 둥지를 떠나 한 발짝 벗어나'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어릴 적 잠시 '타락'의 생활에서 벗어나 성장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지만 그래도 잊지못할 분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전했다. 내용을 보면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 고충석 총장을 아주 좋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증고등학교 학창시절 은사님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거론하면서 특징을 설명하는데 사람의 행동과 마음은 나이들어도 오래도록 남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학생이나 후배, 또는 다른 상대방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평소에 말이나 행동을 잘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4번째 이야기

소년, 둥지를 한 발짝 벗어나

사막 같은 삶에서 이성의 현실로

어머니와의 사별로 나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인 고등학교 2학년을 사막 같은 분위기에서 보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 좀 노는 친구들하고 술집을 출입하는 날이 잦았다.

그때 막걸리도 많이 마셨다. 2학년 1학기 성적표가 아버지에게 통보되었다. 아버지가 통지표를 받자마자 제주시 누님 집으로 쫓아오셨다.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 때려치우고 우도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깊은 절망을 읽었다. 누님도 장사에 바빠서 내가 그렇게 막 나갔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타락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아버지의 절망에 한없이 죄스러웠다. 그만큼 나는 이드보다 에고가 강한 성격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심리 구조다.

아버지가 불쌍해서라도 나는 타락할 수 없었다. 다시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실존주의자가 말했던가. 이론적으로는 염세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낙관주의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내일 태양이 떠오르면 또다시 생존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렇게 나는 점점 깊은 슬픔의 늪으로부터 서서히 이성의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고 현실의 문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땅에 묻고, 큰돈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남겨놓은 현금을 가지고 제주시로 왔다. 그때는 정기예급 이자가 꽤 높을 때라 농협에 돈을 맡겨 그 이자로 고교 생활은 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마침 농협에는 친구 임용순 군(현재 강원대 명예교수)의 누나인 임화순 누님이 근무하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 누님은 상당한 미인이다. 교양 있고 마음씨도 참 따뜻한 분이었다.

신성여고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리더실도 강했다.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었던 누님은 누구보다 나의 형편을 잘 이해해주셨다. 한여름 밤, 별을 헤던 꿈 많던 소년이 집에 놀러 가면 누님은 수박을 사다가 썰어주면서 평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기억이 아련하다.

안타깝게도 누님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10대부터 앓았던 폐결핵으로 저 세상으로 일찍 떠나가셨다.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왼쪽부터 고충석, 문정인, 문승일)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왼쪽부터 고충석, 문정인, 문승일)

문정인 교수 부모님도 정말로 고마운 분들이다. 특히 문 교수 어머니는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나를 늘 불쌍히 여기셔서 집에 놀러 가면 아버지 몰래 용돈을 손에 쥐여주곤 하셨다.

어머니는 자식 둘을 앞세우고 한 많은 세월을 살다 가셨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나 사회인이 돼 서도 늘 나를 사랑해주셨다.

제주시에 있을 때 거처가 마땅치 않으면 문 교수 집이나 월평에 있는 과수원에 가서 장기간 살기도 했다. 그 과수원에 지금은 중산농원이라는 예쁜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지금도 문 교수는 물론 그의 동생들하고도 형제지정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일찍 죽어서 너무나 아쉬운 문승일 군과 그 어머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승일이네 집을 내 집처럼 자주 들락날락했고, 그 집에 가서 밥도 많이 얻어먹었다. 승일이 어머니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속이 깊고 따뜻한 분이셨다.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

"우도 남자들은 주머니를 두 개씩 찬다더라. 너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승일이 어머니는 우도의 일부다처 풍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나에게 당부하시곤 하였다. 승일이는 정말 유능한 의사였다. 승일이는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환자에게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쏟아놓아 환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가 할 걱정을 의사 본인이 걸머지고 결정적인 순간에도 환자 본인이 잘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의사의 사명은 환자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촉발해주고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일이라고 했다. 승일이는 그런 의사였다.

환자를 상대로 하는 상담 기술도 뛰어났다. 참 머리도 좋고 인간으로서도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친구였다. 내가 대학원 다닐 때는 박봉의 인턴 월급을 쪼개 매달 일정액을 용돈으로 보내주었다. 아직도 그 우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해진다.

제주경제정의실천연합(제주경실련) 활동을 할 때도 돈이 필요하면 찾아가서 후원금을 받아내곤 했다. 조금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기꺼이 기부해줬다.

지금도 가끔 문승일내과병원이 있었던 곳을 지날 때마다 승일이와 지냈던 그 시절 생각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김영천 군, 이재훈 군의 부모님들도 우도 출신이라고 나를 각별하게 배려해 주셨다.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시다.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영천 군 집에서 친구들하고 정말로 악동 짓을 많이 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꾸짖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정말로 너그러운 분들이셨다.

지금의 문예회관 근방에는 일찍 귀향해 큰 사업을 하는 이재훈 군 부모님의 과수원이 있었다. 가끔 거기서 잠도 자고 공부도 했다.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그때는 시내에서 거기까지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 다리를 하나 건너야 했다.

영화 제목을 따서 우리는 그 다리를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렀다. 과수원에서 가끔은 막걸리도 한잔씩 마시곤 했다. 가난이 무엇이고 권력이 무엇인지 모르던 순백의 소년 시절, 우정이 전부인 것처럼 신앙하던 그 시절이 신앙하던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봉식 전 교육감은 내 친구 고병희 군의 부친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당신 집으로 나를 불러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당신 집에 와서 살라고 하셔서 6개월 정도 병희와 한 방에서 같이 살았다.

내 결혼식에 주례도 서주셨다. 그 세대에 그분만큼 풍부한 지식과 교양, 아름다운 글솜씨, 격조 높은 말솜씨를 가지고 있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들

중ㆍ고 시절의 은사님들도 내 기억 속에 귀중하게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생각나는 몇 분이 있다.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신 김운기, 박인호 선생님이다. 김운기 선생님은 내가 우도에서 오현중학교로 전학할 때 다리를 놓은 분으로 중학교 때 영어를 가르치셨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한 5~6분 정도 삼국지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난 후 영어를 가르쳤다.

삼국지 강의는 학생들을 강의에 집중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삼국지를 통해서 호연지기를 키우라는 메시지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담임을 맡으셨는데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힐 뻔한 일을 잘 해결해주셨다. 교육은 늘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는 교육철학을 가지신 분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에게도 늘 관대하였다. 지금은 그 사위가 제주대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동료 교수로서 우정을 나누고 있다.

박인호 선생님은 '독일 장교'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멋쟁이였다. 독일어를 정말 잘 가르치셨다. 겉으로는 냉정한 것 같지만 마음은 따뜻한 분이시다.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주셔서 독일어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열심히 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고등학교 때 이미 원서로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덕분에 연세대학교 독일어 입학시험 문제를 쉽게 풀었다. 최소한 90점 이상 얻었을 것이다. 독일어 성적이 좋아 연세대학에 입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생님 덕분에 독일어를 잘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작고하셨는데, 오현고 교장을 지내신 양후림 선생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내가 문과반이기 때문에 그분께는 직접 수업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화학 과외를 받으면서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늘 제자를 친구처럼 흉허물 없이 편안하게 대해주셨던 분이다. 다른 선생님들보다 늘 기대와 칭찬의 말씀을 나에게 많이 해주셨다. 선생님을 만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 함을 느꼈다. 나도 학생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뒷줄 왼쪽부터 고병희, 문정인, 네 번째 고충석, 앞줄 왼쪽 두 번째 박기환, 세 번째 김영천)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뒷줄 왼쪽부터 고병희, 문정인, 네 번째 고충석, 앞줄 왼쪽 두 번째 박기환, 세 번째 김영천)

김인호 국어 선생님도 당당함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셨다. 당시 어린 마음이었지만 선생님의 꼿꼿한 자세가 인상 깊었다. 귀향한 후 우연히 뵈었지만, 그 당당함을 나이 들어서도 잃지 않고 사시는 것 같았다.

고문승 선생님은 반공 도덕을 가르치셨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라 선생님의 강의가 참 좋았다. 그분은 교과서 지식보다는 젊은이의 희망, 비전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셨다. 교육의 덕목을 잘 짚은 것이다.

나도 교육은 희망을 파는 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정치를 하기엔 순진하고 이상적인 분이었다. 그래서 정치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계몽적인 강연을 주로 하는 목사나 대학교수가 되었다면 주목받는 인물이 되없을 것이다. 고3 때인가 '타임'지를 가지고 와서 표지 기사를 해설해주셨다.

구소련 점령 아래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운동의 주인공 알렉산더 두브체크에 관한 내용이었다. 정말 멋있는 강의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학원가서 동구공산주의(Eurocommunism)를 연구하면서 그때 그분의 강의가 상기 되곤 했다.

'양코'라는 별명을 가진 양남부 선생님도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선생님께 영어 과외도 가끔 받았다. 제주도에서 군 복무를 할 때 몇 번 본 기억이 난다.

너무나 쓸쓸한 말년을 살다가 최후를 맞으셨다는 소식만 들었다. 가슴이 참 아팠다. 너무나 감성적인 분이라 학교를 떠나신 후 냉혹한 현실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역사를 가르치셨던 양필순 선생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내가 제주대에 갓 부임했을 때 봉직하던 학교로 찾아뵈어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하고 헤어졌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초등학교 때 1학년 담임이셨던 채정옥 선생님, 6학년 담임이셨던 정태석 선생님도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너무나 철없던 시절 늘 나를 격려해줬고, 공부에 취미를 붙이게 해주셨다.

얼마 전에 채정옥 선생님은 저세상으로 가셨고 정태석 선생님은 생존해 계신데 소식으로만 근황을 접한다. 죄송한 생각이 많이 든다.

초·중·고 시절에 은혜를 입었던 고마운 이들이 어찌 이분들뿐이겠는가.
지면 관계상 다 적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저세상으로 가신 분들에게는 명복을, 살아 계신 분들께는 여생이 늘 행복하시길 빈다. [다음에 계속]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