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이번 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이끈 여러 명사들과의 인연을 서술했다.
특히, 고충석 총장의 에세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접촉'을 할 수 있음에 매우 흥분이 되었다.
고 총장의 인생은 60년생 이후 겪어보지 못했던 시절을 음미해 보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고 총장이 걸어온 길이 굉장히 흥미롭고 제주의 섬소년이 어떻게 총장까지 올라갔는지 그의 행보를 우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접해 보는 것이다.
이번 장은 한국의 리더쉽에 관한 글이다.
고 총장은 추종자들에게 흥을 돋우고 신바람 나게 하는 동력원을 발굴, 그것을 조직화, 제도화시킬 수 있다면 생산성은 저절로 극대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 총장은 그 동력원은 다름 아닌 공정한 보상체계의 구축이라며 특히 보상의 기준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도덕적 명제의 구현자로서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더해져야 한다고 했다.
고 총장은 이러한 가치를 추종자에 대한 물질적 유인보다 상위에 놓아야 한다며 한국형 신바람 리더십은 세상과 가치관이 많이 바뀐 오늘날에도 조직의 효율성 제고 수단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8번 째 이야기 : 젊은이, 세상을 준비하다
삼국시대 벽화에서 배우는 리더십
고대국가인 고구려, 백제의 고분벽화를 보면 술 마시고 춤추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시조는 다르지만, 신라 사람들도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황금장식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가기 전이니 오래된 이야기다.
조선족 자치주에 사는 중국사람(한족)이 같은 지역에 사는 조선족을 평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선족(朝鮮族)은 서로 만나면 춤추고 노래 부르고 술 마시다 꼭 싸우고 헤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만나면 또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술 먹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등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고 하였다.
중국 사람은 한번 싸우면 절교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한국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정이 많고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다. 흥을 좋아하고 신명이 나면 외삼촌 밭도 사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있는 신바람을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요체, 즉 중요한 깨달음을 이해하는 일, 바로 그것이 리더십 연구이다.
나라의 지도력이든, 공. 사조직의 리더십이든 그것이 유효하려면 추종자들의 개인적. 사회문화적인 심성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십 연구란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이고 인간이 접하면서 살아온 사회문화에 관한 탐구다.
한국의 리더쉽이 추종자들에게 흥을 돋우고 신바람 나게 하는 동력원을 발굴, 그것을 조직화, 제도화시킬 수 있다면 생산성은 저절로 극대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동력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공정한 보상체계의 구축이다. 특히 보상의 기준이 공정해야 한다. 여기에 도덕적 명제의 구현자로서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추종자에 대한 물질적 유인보다 상위에 놓아야 한다. 한국형 신바람 리더십은 세상과 가치관이 많이 바뀐 오늘날에도 조직의 효율성 제고 수단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이런 척도에서 문재인 정부를 평가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이런 척도에서 이런 척도에서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나 마나 한 질문이 되었다.
술과 객기로 세상에 저항했던 소라다방의 전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 학기가 아닌 겨우 한 달 정도 공부하다 군 복무 때문에 제주로 내려왔다. 내가 제주에 내려온 후 강창일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 다소 편치 않은 마음으로 제주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입영통지서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예정일자보다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군대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은 사령부에서, 그다음은 예비군 중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 사령부에서의 행정병 근무는 조금 긴장되었지만, 예비군 중대 근무는 세칭 ‘나이롱’ 군인이었다.
예비군 훈련통지서를 돌리고 훈련 출석을 점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퇴근 후에는 여유시간이 많았다.
군대 생활을 이렇게 편하게 해도 되는가 하는 자괴감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거기에 복무기간도 1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니 그 당시 현역병으로 고생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훗날 고위외교관이 된 김욱과 한겨레신문사장. 제주시장을 역임한바 있는 고희범은 나보다 먼저 제주에 내려와 방위 군복무 중이었다. 언제나 고향에 오면 반가이 맞아 주는 김상철이도 있었다.
몇 달이 지난 후 강창일 군도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 요양차 제주로 내려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들과 어울렸다.
제주시 관덕정 근처 ‘중앙 성당’ 맞은편에 있는 ‘소라다방’이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소라다방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들려주는 찻집이었다.
고향을 떠나 유학하던 내 또래는 물론이고 선후배들이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와 온종일 죽치고 있었던 다방이었다.
그때는 위대한 재야 식물학자 부종휴 선생도 나이를 초월하여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그는 우리들의 보스였다.
언론인이면서 해녀 연구자로 이름이 드높은 원희룡 도지사의 장인 되시는 만년 청년 강대원 선생도 가끔 소라다방에 들리곤 하셨다. 돈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 갈 곳이라곤 소라다방만 한 곳이 없었다.
이제 그 다방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지만, 대학 다닐 때나 군대 생활할 때나 나와 같은 가난한 보헤미안들에게는 많은 위안을 주었다. 마신 찻값도 돈이 없으면 외상장부에 달고 후불해도 되는 시대였다.
여하튼 소라다방을 중심으로 대학시절을 함께 했던 그 자들이 한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보헤미안들이 다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은 철상의 표현대로 소녀들도 드문드문 참여했다.
그들은 지금은 어디서 잘살고 있을까. 그들도 가끔 나처럼 소라 시대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 소녀들 중에 우리가 ‘않되도’라는 별명을 붙여준 소녀가 생각난다. 참 마음씨가 고운 소녀였다. 그러나 삶의 여정은 평탄하지 못했는지 일찍 병을 얻어 저세상으로 갔다.
제주대학교에 온 후 우연히 만날 때면 다 ‘골빈당’ 시절이 그리웠는지 나를 늘 고암이라고 불렀다. 우리들은 밤이 되면 술 마시고 다방에 들어가 젊음과 시대를 이야기하였다.
신청곡 ‘사라사데(Scheherazade)’의 ‘지고이너바이젠(Zigoiner Weizen)’이 흘러나오면 철상은 엉터리지만 격정적으로 지휘하고 우리는 모두 술에 취해 달밤의 집시가 되어 정처 없는 발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못다 한 사랑에 목말라 했다. 최인훈의 ‘광장’을 논하고 일본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다 사이 오사무(太帝治) 중편소설 ‘사양(斜陽)’ 속 주인공에게 가슴 아파했다. ‘사양’ 속 내용은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워지는 나의 운명과 오버랩 되면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이 책들을 읽으면 그때의 감동들이 살아날까. 지금은 다 잊었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구절이 있다.
소설 ‘광장’ 속의 한 구절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라는 구절이다.
‘사양’ 속 한 구절 ‘행복이란 절망의 깊은 심연에서 빤짝거리는 사금 같은 것’에서 행복의 참 맛이 어떤 것인가를 느끼게 한다. 또 ‘비 갠 뒤의 무지개는 쉽게 지워지지만, 인간의 마음속에 한 번 걸린 무지개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라는 구절도 생각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