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2)들어가기에 앞서 -편지 10통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2)들어가기에 앞서 -편지 10통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4.01.27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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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제주대학교 제7대 총장을 역임한 고충석 전 총장님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은 섬마을 우도 소년이 제주대 총장에 오르기까지 살아온 세월을 되짚은 기록이다.

고 전 총장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성장을 거쳐 칠순을 보낸 아들로서 아버지의 무덤 앞에 바치는 삶의 보고서라면 보고서이고 내 삶의 흔적이라면 흔적이라고 이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은 고 전 총장이 세상을 준비했던 유년부터 청년시절 이야기인 '내 젊은 날의 초상화'로 시작됐다.

이어 ▲사회로 나아가다 ▲행정학은 경세지학 ▲제주대학교 제7대 총장이 되어 ▲또 하나의 사명, 이어도 ▲제주대학교를 떠나다 ▲내 나이 여름날 오후 5시 등 총 7장의 구성을 통해 첫 직장생활과 대학 행정의 과정을 서술했다.

특히, 제주경실련 공동대표, 제주발전연구원장, 이어도연구회 이사장 등 다양하게 경험 과정을 기록했다.

지난 번 게재했던 글머리에서 고 총장은 제주대학교 제7대 총장 임기 4년이 생애 가장 숨 가쁘고 치열하며 온갖 노력을 다했던 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고충석'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때 가장 빛나는 것은 아마도 제주대 총장 재임시절 이룬 성과들일 것이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매주 뉴스N제주를 통해 독자와의 만남을 갖는다.

이번 장에서 느낄 수 있는 고충석 전 총장과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소통의 공간은 편지였다. 그동안 많은 편지를 다 태우고 먼훗날 자식, 손주들이 그나마 할아버지의 일생에 대해 느낄 수 있는 편지 10통만 남기고 있다고 술회했다.

편지속에 남겨진 글들이 어떤 내용으로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자랑스러운 글로 채워졌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고충석 총장은 가치관이 정립되고 효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위대한 스승은 바로 아버지였음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고 언급하고 싶다. 

앞으로 행정가로서, 대학 총장으로서, 한 남자의 고뇌와 리더십을 우리는 이글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을 게재하도록 허락해 주신 고충석 전 총장님께 깊은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면서 건강을 행운이 항상 가득하시기를 기원드리며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들어가기에 앞서 -편지 10통

"우리 인간 모두는 약간 비겁하게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다. 그러기에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독일의 저항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대목이다.

인간의 욕망을 단순하게 건드리면서도 부끄럽게 하기에 생의 한 걸음을 잠깐 멈추게 한다.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나는 자전적 에세이를 써본 적이 없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쓸 정도의 유별난 삶을 산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자전적인 글을 쓰는 일이 평범한 인생일 뿐인 나의 삶을 미화하거나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더하여 내 미진한 필력도 한몫했다.

어느덧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에 칠순을 맞고 보니 앞으로의 일보다는 지난 세월을 되새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난날에 대한 회상은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슬픈 일이기도 하다.

영국의 저명한 계관시인 테니슨은 「가을」이라는 시에서 "행복스러운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다시 못 올 지난날들을 회억할 때 그 어떤 거룩한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부질없는 눈물이 가슴에 치밀어 두 눈에 고인다"라고 노래했다.

대학 다닐 때 이 시가 좋아 암송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 이 시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나 했을까? 내 인생의 늦가을에 이르고 보니 이제야 이 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서전이라기보다는 그저 살아온 세월을 한번 되짚어본다는 심정으로 지난 기억을 글로 남겨보기로 했다.

먼저 아버님의 신산한 삶을 생각하면 이 나이에도 가끔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나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였다.

아버님은 나에게 자주 편자를 보내셨다. 아버지와 나눈 편지에는 아버님이 느꼈던 절망과 희망 그리고 녹록지 않았던 삶이 잘 나타나 있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사는 데 막막함을 느낌 때마다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많은 위로도 받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용기를 갖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받은 편지 중 결혼하면서 10여 통의 편지만을 남기고 전부 소각했다. 그나마 몇 통의 편지를 남긴 것은 성장한 자식들에게 할아버지가 얼마나 아비를 사랑했고 우리 부자지간에 어떤 고민을 공유했는가를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살아생전 조부를 뵌 적은 없지만, 훗날 나의 자식들이 할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존경심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2 때 갑자기 찾아온 어머님의 죽음, 대학생으로서 그나마 행복했던 연세대학 시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대학원 시절, 나름 뿌듯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다녔던 제주경실련 대표 시절, 제주대 총장직을 포함한 보직 교수 시절, 교수 퇴임 후 경험한 일들을 회상해보면, 자랑스러웠던 때도 있었고 초라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 나의 삶이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들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세기의 배우 채플린도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절망적이었던 때도 있었고 희망적이었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 인생이 하나의 역사가 되어 관찰자의 관점에서 지나온 세월을 말하려 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제는 고인이 되신 대학 선배 안성혁 형과 명동 명보극장에서 본 영화가 생각난다.

알랭 들롱(Alain Delon)과 장 가뱅 (Jean Gabin) 이 나온 '암혹가의 두 사람'이다. 지금도 잊히지 않은 대사 한 토막은 '인생은 이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내 인생도 경쟁에서 꼭 이겨야겠다고 해서 살아본 적은 없다.

본래 나는 승부욕이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인간적인 자존심을 지키고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서 그저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다.

그래서 목표 설정이나 성취를 위한 노력도 차차선 정도로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떻든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후회도 많지만, 나의 노력과 역량에 비해 그래도 잘 살아왔다는 생각에 감사의 마음이 든다.

시인 서정주는 자기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성장하는 과정에 나의 부모님, 특히 아버님의 은혜가 매우 컸다. 아버님은 적어도 내가 돈 걱정 없이 대학 공부를 마치게 하려고 많은 고생을 하셨다. 덕분에 대학 시절에 웬만한 학생들이 다하는 아르바이트 한번 해본 경험이 없다.

모교인 연세대학도 나에게 삶의 지형을 넓혀주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간 여러 일을 하면서 연세대학교의 은사님, 그리고 선,후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시쳇말로 연세대학교는 언제나 내가 힘들 때마다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교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한 바가 별로 없다.

그저 행정학과 발전기금 등 몇 가지 사업에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기부한 것이 전부다. 그 액수를 합쳐봐야 기부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너무나 초라한 규모다.

제주대학과 비교해 연세대학은 잘사는 친정이라 생각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면도 있다. 몇 년 전에 연세대 정갑영 총장이 백양로 재개발사업에 소요될 발전기금을 대대적으로 모금한다고 전해왔다.

아버지 때부터 잘 아는 재일 제주 출신 젊은 기업인을 통해 백양로기금으로 5천만 원을 기부하도록 다리를 놓았다. 제3자를 통한 기부 방식이긴 하지만 나름 모교에 대한 기여라면 기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의 나를 키운 것은 제주대학이다. 제주대학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참으로 무망했을 것이다. 정말로 제주대학교에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다.

총장에 당선됐을 때 "그래! 이제 제주대학에 입은 은혜를 갖을 때가 왔다"라고 생각하고 이러저리 열심히 뛰어다녔다.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총장 시절 내가 대학에 쏟은 땀과 정성이 보탬이 되어 제주대학은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었다고 자명한다.

대학출장 때 이룬 성과로 제주대학교에 진 빚을 어느 정도는 갚았다고 생각한다.

「중앙일보」에서 매년 전국 4년제 88개 국.사립대학을 아주 엄격하게 평가하여 보도하는데, 내가 총장직을 떠나기 바로 전해인 2008년 발표된 제주대학 순위가 34위였다.

전년도와 비교하면 57위에서 34위로 무려 25단계가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다.

당시 35위가 숙명여대였다. 그 기사에는 최근 가장 가파르게 수직 상승한 대학으로 제주대학을 소개했다. (『중앙일보』, 2009년 9월 23일자)

총장 재직 중 나는 뇌혈관 시술을 받았다. 총장을 지낸 분 중에는 총장이 끝난 후 유명을 달리한 분들이 여럿 있다. 그만큼 총장은 힘든 자리이다.

나와 같은 시기에 총장을 했고 그래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부경대 목연수 총장, 목포대 임병선 총장, 군산대 이희연 총장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총장을 마치고 돌아가셨지만 총장 시절 병을 얻은 것이 원인이었다.

나도 취임 2년 차 되던 해에 걷지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파 허리 MRI를 찍으러 제주대학교병원에 갔다가 허리를 찍는 김에 머리도 찍어보자는 병원장의 권유에 마지못해 검사에 응했다.

마침 그때 병원에 새로 들어온 기계의 성능도 테스트할 겸 시험 삼아 머리를 찍어보게 되었다. 그때 머리에 이상이 있다
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천우신조였지만 당시 내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때의 착잡한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학교로 돌아와 총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동안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학에는 비밀에 부치고 아내와 최진호 비서의 수행을 받아 서울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총장 임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무사하게 해달라고, 이 세상에 안 계셔서 더욱 그리운 부모님께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모든 것들이 이제는 다 흘러간 내 삶의 파편들이다. 그 삶의 파편들이 모여 기억의 강을 형성했다. 그 깊은 심연 속에 침잠해 있던 파편들이 떠오른다.

인생의 에세이를 쓰려고 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옛 친구가 다가와서 소곤대듯 그때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일러주는 듯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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