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3)유년, 세상모르고 살았던 행복한 둥지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3)유년, 세상모르고 살았던 행복한 둥지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4.02.04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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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제주대학교 제7대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른 아침에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 한참 나도 몰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느꼈다.

1장 마지막 글 어머님과의 이별 이야기에 눈물은 머무르지않고 흘러 안경을 벗고서야 얼굴에 자국을 지울 수 있었다. 유리창으로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비가 멈춘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섬마을 우도 소년이 제주시에 유학하면서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머니의 정을 그렇게 많이 접하지 못해 살아온 회환들이 눈물로 뿌려졌을 것이다. 섬이라는 한계로 '연결에서 단절'된 상황과 가족의 간절한 만남의 시간과도 허락치 않은 세월을 살아야 했던 시간들로 인해 마음이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섬속의 섬 우도에서 태어난 고충석 총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 지난 일대기를 쓴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제1편에서 다음 장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님의 죽음으로 인해 어머니의 리더십과 대장부 기질을 닮고 싶었던 고충석 총장의 다음 상황이 궁금해졌다.  마음을 추스려 이어가도록 하겠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3번째 이야기
유년, 세상모르고 살았던 행복한 둥지

내 고향 우도, 나의 정신적 원동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내 고향은 우도다.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고향이라고 해서 변변하게 이바지한 것이 없다. 그럴 힘도 없었다. 지난날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지 못했고 그나마 최근엔 자주 우도를 찾는 편이다.

내 고향 우도는 늘 나를 키워준 정신적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식들에게 마치 가훈처럼 "너희들이 인생을 살면서 어렵고 힘들 때는 너희 선대들이 운명처럼 부딪히고 살았던 우도의 칼바람과 거친 파도를 생각하라"라는 말을 자주 해준다. "거기서 너희들은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도 사족으로 붙인다.

나는 우도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산호사 모래사장이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고향에 가면 지금은 더 유명해진 산호사 모래사장에 가끔 들른다.

그때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 시합에서 꼭 1등을 하고야 말겠다고 대회 일주일 전부터 바지 끝을 끈으로 단단히 묶은 채 모래를 허리부터 발목까지 가득 채우고 달리기 연습을 하는 소년과 마주한다.

모래사장이 패도록 죽으라고 연습해도 성적은 늘 3등에 그쳤던 키 작은 왕고집 우도 소년, 바로 어릴 때 내 모습이다. 그를 떠올릴 때면 나는 혼자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묘한 행복감에 젖어들곤 한다.

도산 이은상은 시 '가고마' 후편에서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라고 노래했다.

가난이 뭔지, 출세가 뭔지, 사랑이 뭔지 모르고 철부지 개구쟁이로 살았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이렇게 우도는 넓은 서랍 속의 사진처럼 나의 유년 시절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10대 관광지로 불리고 있는 우도는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고 있다. 1년에 2백만이 넘는 인파가 우도를 찾는다고 한다. 오로지 우도를 방문하기 위해서 제주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시인 이생진은 우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내 어린 시절에 우도는 엄청나게 못살았다.

우도뿐 아니라 당시 제주 전체가 전반적으로 가난했다. 그래도 우도는 풍부한 어장을 기반으로 한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산업 형태를 띠고 있어서 우도 사람들은 그런대로 먹고는 살았다.

요새는 우도 땅콩이 유명하지만, 그 당시에는 땅콩 재배 농가가 없었다. 우도산 미역과 우뭇가사리가 전국에서 가장 유명했다. 우도산 우뭇가사리를 건조해서 만든 식재료인 한천은 일본과 홍콩으로 수출되었다.

나의 중부는 부산에서 큰 규모의 한천 사업을 운영하였다. 우도에서 우리 집은 살림살이가 꽤 넉넉한 편에 속했다.

거상다운 풍모를 지녔던 해상 상인 어머니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반반씩 닮았다. 어머니의 도전 정신과 친화력 그리고 아버지의 세심함, 고지식함, 원칙론적인 생활관이 내 DNA에 흐르고 있다.

어머니는 소위 '해상 상인'이었다. 우도의 천초와 미역을 부산과 여수에 싣고 가서 팔아 돈을 많이 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돛단배나 작은 발동선에 엄청나게 많은 미역과 천초를 싣고 그 먼 바다를 다녔으니 상당히 도전적인 분이었다.

내 어머님 같은 분들을 두고 오래전부터 제주 섬에서 전해오는 명언이 있다.
'저승 돈 주워다가 이승에서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만큼 목숨을 걸고 바다 건너 육지를 왕래했다는 뜻일 것이다.

어머님이 물건을 싣고 육지로 출항할 때면 무사히 저 바다를 잘 건너게 해달라고 빌던 어린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내 추억 속을 횡단한다.

어머니는 물으로 나갔다 제주로 돌아오실 때는 부산, 목포 정기여객선을 이용했다. 그야말로 여장부였다. 통이 크기가 남자들 저리 가라 했다. 배운 건 없었지만, 거상다운 리더십과 카리스마, 친화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비교적 고지식하고 꼼꼼하며 약속이나 원칙을 중시하는 분이셨다. 어머니와 달리 자식들 교육에 관심을 많이 두셨다. 그 시대 우도에서 우편을 통해 『동아일보」를 구독할 정도로 지식인다운 풍모도 있었다.

아버지는 촌사람치고는 굉장히 식견이 높았다. 술을 좋아하셨고 정치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어머니가 장기간 출타할 때에는 아버님이 집안일을 떠맡았다.

나는 어머님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아마 어머님처럼 호방하게 살고 싶었던 무의식적인 지향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학총장을 하면서 내 천성은 어머님보다는 아버님 쪽을 더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 한 번 원칙을 세우면 타협을 하지 않고 밀어붙이다 보니 캠퍼스 내에 불만 세력이나 섭섭해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어머님처럼 도전적이고 호방하게 살고 싶은 리비도(libido)도 분명 나의 내면에 잠재해 있을 것이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생각은 나이가 든 지금도 내재해 있다. 그러나 그 힘이 아버지를 닮은 성격 지향을 이기지는 못한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합리적 처세가라고 할 수 있는 자아(ego)가 승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창한 꿈을 그려보다가도 저녁에는 다시 소시민적인 삶으로 돌아간다.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이드(id), 에고(ego), 슈퍼에고(super ego)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때문에 삶이 힘들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늘 에고의 승리였다. 이런 성격 지향이 어쩌면 큰 도전과 주목할 정도의 모험이 없는 삶을 살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부모님 슬하에서 나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도초등학교 출신 동기 중에서 제때에 대학교에 간 사람은 아마 나뿐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일곱 살 때 입학했다. 힘도 세고 고집도 무척이나 셌다. 그래서 친구들이 별명을 '팔갑선'이라고 붙여줬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에게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학교는 왜 안 간다는 말이냐?"고 물으셨다. 어이없게도 내가 고집을 피운 가장 큰 이유는 곤밥 때문이었다.

당시 제주도 농촌 동네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 퇴물을 집집마다 돌리는 풍습이 있었다. 더욱이 우리 동네는 고씨 집성촌이라서 뒷날 아침 집집이 제사 음식을 돌렸다. 그 제사음식에 '곤밥'(쌀밥의 제주어)이 있었다.

당시 곤밥은 부잣집에서도 먹기 힘들었다. 그나마 우리 집은 귀한 손님이 방문할 때 가끔 보리와 쌀을 섞은 '반지기'를 먹을 수 있었다. 대부분 좁쌀밥이나 보리밥을 먹을 때이니 쌀밥을 먹는 것은 정말 어쩌다 한번 오는 기회였다.

설사 쌀밥을 먹을 형편이 되는 부자들도 공동체적인 시각에서 나 혼자 쌀밥을 먹는다는 것이 계층 간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라 생각했다. 당시에는 과시적 소비를 자제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소위 '염치'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 동네는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 살았고 제사가 많아 곤밥을 먹을 기회가 간혹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학교에 간 뒤에야 제사상에 올렸던 곤밥이 우리 집에 배달되어 학교에서 파하고 돌아오면 나의 몫이 생각만큼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왜 내가 없을 때 곤밥을 가져오느냐며 차라리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무척 엄했던 아버지도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난 학교를 한두 달 다니다 그만두고 말았다.

여덟 살이 되어 제 나이에 다시 입학해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버지의 교육열

제주자연문화재돌봄센터, 우도 내 자연문화재 정기 모니터링
우도 바다모습

아버지는 교육열이 대단한 분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직접 글을 가르쳤다. 공부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할 때는 사정없이 매까지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추천할 만한 교육법은 아니다. 유년 시절 농촌에서 살았지만 나는 밭을 갈거나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농사일은 몰라도 되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 우리 형제 중 누구도 농사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

우리 집은 모두 5남매인데, 남자 형제들은 대부분 어릴 때 육지에 나가 공부했다.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의 대단한 결심 때문이었다. 큰형님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으로 유학하러 갔다.

당시 백부와 외숙이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님은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해서 부산 유학에 실패했고 결핵까지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린 자식을 키워 본 나의 처지에서 볼 때, 당시 그 어린 큰형을 부산으로 유학 보낸 것을 보면 '아버님은 정말로 독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큰형은 우도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물려준 재산을 전부 처분해 서울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결국 풍찬노숙의 삶을 살다가 후손 하나 남기지 못하고 객사에 가깝게 생을 마감했다.

아버님의 과도한 교육열이 부른 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한다. 그 어린 나이에 부산에서 얼마나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했을 까? 큰형을 생각할 때마다 고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깊어진다.

둘째 형도 우도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제주시로 유학을 갔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버지는 둘째 형을 오현고에 합격시키기 위해서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우도초등학교에 부임한 선생님에게 집중적으로 과외를 시킬 만큼 아들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내 누이동생도 제주시에 유학하여 여고를 나왔지만, 그녀 또한 아버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큰누님만 물에 가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나중에야 아버지는 자식을 너무 일찍 유학 보내는 게 부작용이 많다는 사실을 큰형님의 사례에서 배우신 것 같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꽤 공부를 잘했지만, 아버지는 어린 나만은 제주시로 유학을 보내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셨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 왕고집 기질이 발동했다.

"아버지, 제주시에서 중학교에 다니겠습니다."
"형들을 보면 모르겠느냐? 공부하라고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유학을 보냈지만 하나같이 모두 실패했다. 넌 우도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부터 제주시에 나가 살아라."

아버지의 반대는 완강했다. 그 일만큼은 아버지도 물러나지 않고 주변 사람까지 동원하는 강수를 두셨다. 당시에 같은 동네 사는 가까운 친척 형님이 우도초등학교 고태주 교장이셨다.

"충석아, 너도 알다시피 네 형이 부산과 제주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모두 공부에 실패했다. 그러니 아버님을 이해하고 너만큼은 우도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고등학교는 제주시에 가서 다니거라."

그 형님까지 나서서 나를 말리며 타일렀다. 집안의 신망도 두텁고 평소 존경했던 형님의 말씀이라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고태주 형님은 당시 우리 집안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집안에서 십시일반 학비를 보태줘서 육지에 가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는 광주사범인가를 졸업하고 우도초등학교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충분히 출세의 길을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학교를 졸업하자 당신을 키워준 고향에 봉사하겠다고 귀향했다.

정확지는 않지만 20대부터 교장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는 평생을 우도초등학교장으로 지내며 고향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고태주 교장에 대해서 "그 정도 학식이면 넓은 곳에 나가서 큰 뜻을 펼쳐야지 우도에만 사는 답답한 사람"이라면서 안타까워하셨다. 반면에 어머니는 늘 "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고태주 형님 정도만 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결국 난 우도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물을 향한 내 동경은 여전히 살아 꿈틀거렸다.

'언젠가는 꼭 제주시로 전학하고야 말겠어!'

아버지의 반대에도 내 뜻은 여전히 완강했다. 그때 제주시에 살던 외사촌 누님과 매형이 중재에 나섰다. 매형이 어머니를 설득했다.

"충석이를 제주시에 보내면 제가 알아서 전학 절차도 알아보고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매형의 약조를 담보로 나는 그토록 꿈꾸던 제주시로 나올 수 있었다. 누님과 매형은 그 약조를 잘 지켜주었고 제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장가갈 때까지 친동생보다도 더 나를 사랑해주셨다.

매형은 일찍 저세상으로 가셨지만 아직도 매형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많다.

대학 졸업 후 군대까지 마친 나는 불확실한 앞날을 생각하느라 하루하루 우울한 색조를 드리우며 지내고 있었다. 그때 매형은 팔공산에 있는 큰 절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절이 첩첩산중에 있어서 우리를 태운 버스가 꼭 정복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들었다.

*큰스님을 만나 장래 희망을 얘기하면 발복한다고 하더라."

매형은 나에게 접견비를 넣은 봉투를 주면서 큰스님을 만나게 해주셨다. 스님을 만나고 나서 매형과 나는 소원을 담아 부처님께 여러 번 절을 올리고 그 험악한 산길을 가로질러 하산했다.

매형의 그 지극한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해진다. 술을 너무나 좋아하다 보니 세상살이에는 무심하여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에 대한 기대와 관심만큼은 각별하셨다.

따뜻한 청주 한잔 대접할 기회도 주지 않고 병을 얻어 저세상으로 황급히 떠나버렸다. 이제 매형도 누님도 이 세상에는 없지만 가끔은 보고 싶고 한없는 고마움 을 느낀다. 이 자리에서라도 그 고마운 정을 남기고 싶다.

갑작스런 어머니와의 이별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난 형님들과 달리 비교적 사춘기를 잘 보낸 편이다. 누님과 매형, 친구들 덕이 컸다. 좋은 친구를 사귀고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자연히 사춘기를 별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오현중학교로 2학년 초에 전학 와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 우정을 나눴다.

당시 나를 돌봐주었던 누님네는 국민대 교수였던 박기환 박사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박 박사의 모친은 나와는 먼 친척 관계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박 박사와는 친구가 됐다.

박 교수는 수재 중의 수재였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명문 브라운 대학(Brown University)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수, 기업 CEO 등을 거쳐서 지금은 또다시 교수로 돌아왔다.

박기환 군을 매개로 문정인(문재인 대통령 특별보좌관, 연세대 명예특임 교수)등 좋은 친구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이들 때문에 우도 촌놈이 제주시에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오현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주로 오현중 출신 친구들과 좋은 우정을 나눴다.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학원에 다녔고 가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사 먹었다. 돈이 없을 때는 시계를 담보로 맡기기도 하였다. 문정인은 항상 짜장면 곱빼기를 주문할 정도로 대식가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먹보였다. 농담이지만 아마 그때 먹은 식량이 체력의 바탕이 되어 오늘날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친구들과 과외를 받기도 하고 내 스타일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4월,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해상 상인으로서 열심히 돈을 벌어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 덕에 우리 가족들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집안의 대들보가 무너져내린 것이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나는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았다. 당시 어머니는 신용으로만 거래하던 터라 제대로 된 장부를 작성하여 남기지 않은 탓에 거래처로부터 받을 돈도 거의 회수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어머니와 같이 산 햇수가 고작해야 13년 정도였다. 당시 우도에서 제주시로 오는 교통편도 요새처럼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주로 장사차 육지에 갔다 오는 편에 제주시에 들러 나를 잠깐씩 보고 갔다. 잘해야 1년에 두세 번 정도였다.

더욱이 아버님은 늘 촌음을 아껴서 공부해야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방학이나 명절 때도 우도에 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이러다 보니 우도를 떠나온 후 어머님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추억의 장면도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제주시에 있어서 잘 몰랐지만, 어머니의 삶은 그리스의 비극시인 소포클레스의 말처럼 고해(苦海) 그 자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어머니는 육지와의 교역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였지만, 큰형은 너무나도 부모님 속을 썩였고 아버님은 그 분노를 그대로 어머니에게 투사했다.

그 당당하던 어머니가 싫의 의욕을 잃고 화를 참느라고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셨다고 한다. 이런 생활은 꽤 오래갔고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쓰러졌다 일어나는 일이 몇 번 반복되다가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허망하게 저세상으로 떠나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심장마비가 사인이 아닐까 추측한다. 당시 의료 시설이 전혀 없었던 우도였기 때문에 제대로 손도 못 써보고 어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어머니 형제들은 다들 장수하셔서 아흔 전후까지 사셨는데 어머니만 일찍 가신 걸 보면, 정신적 고통이 죽음을 재촉했다고 생각한다. 연세대학 다닐 때 강승호 군하고 우연히 점집에 간 적이 있다. 어머니가 나랑 일찍 이별해서 저 세상 가서도 늘 내 손을 잡고 다니면서 보살피고 있다는 점쟁이 말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불원간 생활 근거지를 제주시로 옮기고 점포와 주택을 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제주시에 와서 할 사업을 구상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무런 준비가 안 되었던 나에게 무척이나 큰 시련이었다.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다.

어머님 없는 세상, 살아가기가 막막할 것 같다는 생각이 해일처럼 엄습해왔다.

어머니 삭망 날에는 거의 빠짐없이 우도에 갔다. 혼자 사는 아버님의 절망과 아무런 고생도 모르고 자란 중학교 2학년 누이동생의 비탄을 보고 제주시 로 돌아올 때는 나도 그만 바닷속에 푹 빠져 수장되어버리고 싶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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